
그러나 자세히 보면 한국은 겉으로 큰소리치는 남자들도 살기 힘든 구조로 돼 있다. 사실 이 사회에서 남자들이 지고 살아야 할 심리적, 경제적 부담감과 소외감, 불안 등은 상상외로 크다. 거기에 갱년기가 돼 남성호르몬이 감소하면서 남성들은 더욱 우울하고 위축된다. 남자도 여자처럼 갱년기를 앓는다.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에 시달렸으면 40~50대의 한국 남성 사망률이 여자보다 3배나 높고, 미국 등 다른 선진국보다 2배가 높을까. 이것이 그동안 권위적이라고 매도됐던 한국 중년 남성의 현주소다.
인생의 정오에서 다시 맞는 사춘기
여자는 감정 표현에서 자유롭다. 그러나 남자들은 감정의 억압을 미덕으로 삼고 강하게 보여야 한다고 배우며 자란다. 울면서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되는 남자들이 불안하거나 열등감을 느낄 때 고작 할 수 있는 행동이란 소리를 버럭 지르며 화를 내는 것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교육과 사회적인 분위기는 남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감정에조차 무지하게 만든다. 이러한 행동은 오히려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남성들을 참을성 없고 자기만 아는 동물로 만들어버리고, 더 소외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그동안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져야 했던 경제적 심리적 압박은 실로 잔인했다.
언제나 가정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야 하고, 아무리 힘들어도 울거나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는 사람들. 부인과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얼마나 제공할 수 있느냐에 따라 가장으로서의 능력이 평가되는 사람들. 부인은 아이와 한덩어리가 돼 움직이고,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틈도 시간도 없어, 가정에서 아웃사이더로 배회하는 사람들. 아이와의 대화도 점점 줄어들고, 밤낮 할 것 없이 열심히 일한 대가가 가정에 무심한 아버지라는 비난으로 되돌아오는 사람들. 직장에서도 후배들에게 밀려 언제 잘릴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하루하루 생존하는 것이 전쟁인 사람들. 정작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준비해놓지 못한 채 다가오는 노년이 두렵기만 한 사람들. 이래저래 들이켜는 술과 끊지 못하고 피워대는 담배에 젊어서부터 혹사당한 몸은 급속도로 나빠지고, 이런저런 스트레스에 성기능도 예전 같지 않아 남성으로서의 자존심은 뭉개진 지 오래된 사람들. 이것이 어쩌면 현재 우리나라 중장년층의 현주소인지도 모른다.
거기에다 갱년기가 되어 아이들로부터 해방되나 싶으면 연로하신 부모님이 기대어 온다. 즉 부모님의 부모 역할을 해야 하는 시기가 도래하는 것이다. 주변을 돌아봐도 온통 돌보고 책임져야 할 사람과 일뿐이고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곳은 아무데도 없다. 그래도 여지껏 정말 열심히 살아왔는데 대부분 잘못했다는 소리만 들릴 뿐 누구도 따듯한 격려나 위로의 말 한마디 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한국의 중장년층 남성들은 외로움과 자신에 대한 회의, 자신이 살아온 시간, 앞으로 살아갈 시간에 대한 불안으로 방황하고 있다.
이러한 심리적 부담이 없더라도 40세란 나이는 인생의 딱 반을 산 나이다. 즉 인생의 후반부로 넘어가는 시점이다. 사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성장하고 발전하는 동물이다. 예전에 사람의 성장은 사춘기 때 완성되고, 사춘기를 지나면 더 이상 인격이 발달하지 않는 걸로 생각했으나 최근의 정신분석 연구에 따르면 사람은 죽을 때까지 성숙하고 그가 처한 환경이나 사회적 요구에 따라 적응하고 성장한다고 밝혀지고 있다. 통념과는 달리 우리의 IQ도 계속 바뀌고 영양이 잘 공급된다면 80세까지 10정도 더 증가한다고 한다.
일찍이 공자는 “吾 十有五而志于學하고 三十而入하고 四十而不惑하고 五十而知天命하고 六十而耳順하고 七十而從心所欲하야 不踰矩니라(나는 열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 독립했고 마흔 살에 망설이지 않게 되었고 쉰 살에 천명을 알게 되었고 예순 살에 남의 말을 순순히 듣게 되었고 일흔 살에 마음 내키는 대로 좇아도 법도를 넘어서지 않게 되었다)”고 설파하며 나이에 따라 시기를 구별해 성취해야 할 과제들을 제시했다. 공자님의 시대에는 40은 불혹의 나이로 웬만한 유혹에는 흔들리지 않는, 인생의 중심을 잡는 나이였나 보다. 하긴 그때는 평균 수명이 60이 안 되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