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 글래스고대 전경
말하자면 극단적인 부정과 긍정의 반응이 친분 정도와 반비례해서 나타난 셈인데, 그렇다고 나를 격려해준 사람들의 진심을 의심하는 건 아니다. 그분들의 칭찬과 격려는 당연히 고맙게 여기고 있다. 아마도 나와 가까운 사이일수록 유학으로 얻을 수 있는 성취보다는, 딱하다면 딱한 나의 처지-아이 둘을 돌보면서 혼자 공부해야 하는-를 걱정하는 마음이 앞섰을 것이다.
나이에 비해 철이 없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나 역시 이번 유학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이 될지는 떠나오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사실 내가 글래스고대학으로부터 박사과정 입학 허가를 받은 것은 2008년 초의 일이다. 그러나 막상 2008년 중순이 되어 짐을 싸려니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겨우 여덟 살, 네 살인 아이들의 손을 붙들고 비행기를 탈 용기도 없었고, 한국에 홀로 남을 남편 걱정에다 겨우 장만한 아파트(그 아파트가 상징하는 안락한 생활)를 떠나고 싶지도 않았다. 아니, 이제 좀 편하게 살까 하는데 왜 굳이 사서 고생을 하나 싶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학교에 입학을 한 해 미뤄 달라는 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학교가 허락해준 한 해 동안 과연 이 때늦은 유학을 가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로 수없이 갈등한 끝에 2009년 8월, 더는 미룰 수 없는 시점에 도망치듯 유학을 떠나온 것이다.
마흔 살 유학은 미친 짓?
막상 영국에 와보니 “나이 마흔에 유학은 미친 짓”이라면서 나를 뜯어말리던 친구들의 말이 백 번 옳았다는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든다. 한국에서 별다른 지위나 직업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한국에서 누리던 모든 기득권과 안락한 생활을 버리고 새삼 학생 신분으로 되돌아간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한국에 비하면 형편없이 작고 추운 집에, 말이 안 통해 친구도 사귀지 못하는 딱한 아이들, 그리고 좁은 부엌에서 10년 만에 김치를 담근다고 끙끙대다보면, “어휴, 내가 정말 미쳐도 단단히 미쳤지” 하는 한탄이 입에서 절로 나온다.
하지만 내가 친구와 가족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유학을 떠나온 것은 나름의 생각이 있어서다. 나는 10년 전에 런던의 시티대학교에서 예술경영과 예술비평 복수전공으로 석사과정을 마쳤다. 영국의 석사학위(MA, 또는 MSc)는 1년제다. 그래서 1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수업 들으랴, 시험 치랴, 심포지엄 참가하랴, 튜토리얼(Tutorial) 하랴, 논문 쓰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박사과정에 비하면 다분히 짧고도 형식적이지만, 영국의 대학원에서는 석사과정도 튜토리얼을 해야 한다. 교수와 학생이 1대 1로 만나 논문 주제에 대해 심도 있게 토론하는 수업방식인데, 이 튜토리얼은 영국의 대학원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외국 학생으로서는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지도교수와 1시간 이상 이야기를 주고받아야 하는 괴로운 시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석사 시절 튜토리얼 당시 내가 몇 가지 주제에 대해 이야기할라치면, 지도교수는 웃으면서 “그건 박사과정에 들어가서 해라”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교수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그럼 이 주제는 교수의 마음에 들지 않는가보다” 하고 넘겨버리고 다른 주제를 찾아내 이야기하곤 했다. 그렇게 숨가쁜 1년이 지나고, 마지막 3학기가 끝날 무렵(영국의 대학원은 보통 가을, 겨울, 봄의 3학기로 구성된다), 갑자기 지도교수가 “박사과정에 지원했느냐?”고 물었다. 당시 나는 3주간 덴마크에서 열리는 심포지엄에 다녀오는 바람에 빠진 수업들을 보충하느라 정신이 없던 차라 교수의 말뜻을 제대로 알아채지 못했다. 그래서 잠시 눈을 깜박이다 “아니요, 저 박사과정 진학할 생각 없는데요”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교수는 매우 실망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래? 나는 네가 당연히 박사과정에 들어올 줄 알았는데…” 하고 말끝을 흐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