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5월호

‘UDT의 神’ 조광현 전 해군 대령

“고 한주호 준위처럼 솔선수범하는 아름다운 전통 지켜나가야”

  • 조성식│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airso2@donga.com│

    입력2010-04-19 18:05: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수중폭파, 전천후 특수전, 폭발물처리, 대테러…최정예 특수부대
    • UDT 교육훈련대장 세 번, UDU대장, 초대 UDT전대장 역임
    • 천안함 수색 둘러싼 현역-예비역, UDT-SSU 미묘한 갈등
    • 죽어서 돌아오면 왔지 낙오하진 않겠다
    • 입교생 120명 중 7명만 살아남은 혹독한 훈련
    • 전두환, “왜 UDT가 오만가지 다 하느냐”
    • 북파공작훈련 받은 UDT 대원들, 특수임무수행자로 보상해야
    ‘UDT의 神’ 조광현 전 해군 대령
    천안함 사건은 한주호 준위라는 영웅을 탄생시켰다. 사나운 파도처럼 들끓던 해군과 국방부에 대한 비난여론을 일순 잠재울 정도로 그의 순직은 국민의 가슴을 울렸다. “한 준위가 해군을 살렸다”는 얘기가 나왔다.

    그가 35년간 몸담은 UDT(Underwa- ter Demolition Team·수중파괴대)는 해군의 최정예 특수부대다. 1955년 창설된 한국함대 해변단 소속 수중파괴대가 원조. 1983년 제25특전전대라는 단위부대로 독립했으며, 1986년 56특전전대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2000년 해군 특수전여단으로 발전했다. 이 부대는 수중폭파 외에 전천후 특수전(SEAL·Sea, Air, Land), 폭발물처리(EOD· Explosive Ordnan-ce Disposal), 대테러 임무를 맡고 있다. 훈련과정과 임무가 미 해군의 특수전부대인 SEAL과 같다고 해서 UDT/SEAL 부대라고도 한다.

    UDT는 훈련과정 수료율이 20% 안팎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혹독한 훈련을 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1955년부터 1971년까지 한 기수 평균 수료생이 25명에 지나지 않았다. 1972년 이후에도 연 평균 수료생이 50명이 채 되지 않을 만큼 소수정예 전통을 지켜왔다. 지금도 UDT부대의 전체 병력은 수백명에 불과하다.

    UDT에 대해선 예로부터 전설적인 얘기가 많았다. 사람이 아니라 살인병기이며, 바닷 속으로 헤엄쳐 북한에 잠입해 특수임무를 수행하거나 몰래 고향사람을 만난 후 돌아온다고 했다. UDT 부대가 있는 경남 진해의 한 술집에서 UDT와 해병대 간에 큰 패싸움이 났는데 해병대가 깨졌다는, 진위 확인이 어려운 풍문도 ‘UDT 신화’를 신봉하는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

    “그분은 우리 세계에서 신”



    한 준위 사건이 난 후 UDT에 대한 국민적 관심도가 높아졌다. UDT동지회(UDT전우회의 후신) 주변으로 알아보니 ‘UDT의 산 역사’라 할 만한 사람이 있었다. 한 UDT 관계자는 “우리 세계에서 그분은 신(神)”이라며 “UDT를 제대로 알려면 꼭 만나보라”고 권했다. “역대 UDT부대장 중 미 해군의 UDT/SEAL 훈련 및 EOD 교육을 가장 확실하게 이수한 사람”이라는 평도 들렸다. UDT 교육훈련대장을 세 차례 지낸 데 이어 초대 UDT전대장(25특전전대장)을 역임하고 UDT전우회 중앙회를 창립한 조광현(70) 예비역 해군 대령이 바로 그다. 조씨는 해군 첩보부대인 UDU (Underwater Demolition Unit)대장도 지냈다.

    조씨와의 인터뷰는 네 차례에 걸쳐 10시간 넘게 진행됐다. 그는 “나 개인보다 UDT의 활약상이나 UDT 임무의 중요성이 부각되기를 바란다”고 몇 차례나 강조했다. 나는 “UDT의 상징적 인물인 조 선생의 삶을 소개하는 것 자체가 UDT를 알리는 것”이라고 말해줬다.

    ‘UDT의 神’ 조광현 전 해군 대령
    눈매가 날카롭고 하관이 갸름한 그는 170㎝가량의 키에 날렵한 몸매였다. 줄곧 78㎏의 근육질 몸무게를 유지했는데 몇 년 전 위암수술을 받고나서 10㎏가량 줄고 근육이 많이 빠졌다고 한다. 4월 하순 경기도 과천에서 열리는 풀코스 마라톤대회에 출전신청을 했다는 얘기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풀코스 대회에 나가려면 30㎞대를 세 번 정도 뛰며 컨디션을 조절해야 하는데 한 번 뛴 후 천안함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연습을 못해 걱정이라고 했다. 칠순의 나이를 의심케 하는 그의 놀라운 체력에 대해선 뒤에 자세히 설명하기로 한다. 마라톤대회 출전은 그의 몇 가지 취미 중 하나라는 점만 언급해두자.

    조씨가 1983년 UDT전대장을 지낼 때 한주호 준위는 그 밑에서 훈련교관을 했다. 1976년 하사 한주호가 UDT 22기로 입교했을 때 조씨는 서해의 한 섬에서 UDU대장을 맡고 있었다.

    “한 준위는 예의바르고 솔선수범하는 사람이었다. 경례도 절도 있게 잘하고. 작년에 소말리아 청해부대에 파견 나가 있을 때도 몇 차례 안부전화를 걸어오곤 했다. 죽기 전날 그가 함수 침몰지점에 부이(Buoy·浮漂)를 설치했다는 얘기를 듣고 참 큰일 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밤에 곰곰 생각해보니 사리 때라 물살이 세져 위험할 것 같았다. 그래서 다음날 한 준위에게 ‘무리하지 말고 젊은 애들이 들어가게 하라’고 말해주려 몇 번 전화를 걸었는데 통화가 되지 않았다. 바빠서 그러려니 했다. 그날 오후 5시쯤 현장에서 순직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저녁밥이 안 먹혔다.”

    “오후 작업은 현역이 하겠다”

    ‘UDT의 神’ 조광현 전 해군 대령

    천안함 수색작업에 참가한 UDT동지회 회원들이 4월5일 오전 백령도에서 철수하고 있다.

    조씨는 한 준위가 순직한 3월30일 밤 경기도 성남 국군수도병원에 있는 빈소를 찾았다. 다음날 오전 조문 온 김태영 국방부 장관, 김성찬 해군참모총장과 귀빈휴게실에서 조우했다. 조씨가 인사를 하자 김 장관이 “조광현 선배님 아니십니까” 했다. 이에 조씨가 “어떻게 제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묻자 김 장관은 “특전 분야에서 조 선배님을 모르면 특전맨이 아니죠”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때 내가 한 준위 장례 문제로 화가 나 있었다. 한주호 아니면 해군은 떡이 됐을 게 아닌가. 그 사건이 나는 바람에 해군 욕하던 여론도 잠잠해지고 실종자 가족들도 (구조에서) 인양 쪽으로 방향을 튼 것 아닌가. 그런데 해군 작전사령부장(葬)으로 3일간 치른다고 해서 화가 났지. 다음날 오전에 총장이 온다기에 얘기 좀 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던 거다. 그런데 김태영 장관이 먼저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꺼냈다. 김 장관은 ‘한 준위는 해군을 살린 영웅이다. 3일장은 너무 짧다. 살신성인의 영웅적 행위를 널리 알려야 하는 것 아니냐. 해군장으로 5일장을 치르게 해 일반 국민도 많이 조문하게 하자’고 했다. 참 고맙더라.”

    UDT동지회(회장 심현표)는 실종자 가족의 요청에 따라 천안함 실종자 수색작업에 참여했다. 회원들 중 50m 이상 심해잠수 경험이 있는 직업 잠수사 12명이 우선 선발됐다. 이들은 3월29일 해군 2함대사령부가 있는 경기도 평택에서 헬기를 타고 백령도로 들어갔다. 어선을 타고 사고현장에 도착한 그들은 한 준위를 비롯한 UDT 현역들과 함께 물속으로 뛰어들어 함수 실종자 수색에 나섰다.

    최악의 작업환경이었다. 조류와 수온, 시정 등 모든 면에서 안전기준을 초과했다. 미군이 참여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한국군은 안전수칙을 위반하고 작업한 셈이다. 수심 40m에서 스쿠버(Scuba·휴대용 수중호흡기)만 메고 들어가면 불안해서 작업을 오래할 수 없다. 기껏해야 15~20분이다. 호흡이 빨라지고 조류가 세기 때문에 체력소모도 크다. 잠수경력이 몇 년 되지 않은 젊은 군인이나 아마추어 잠수사들이 나가떨어진 것도 그 때문이다.

    UDT 예비역들은 다음날 오전에도 한 준위팀과 함께 수색작업을 벌였다. 점심 때가 돼 식사를 하기 위해 백령도로 철수했다. 기상이 더 나빠지고 있었다. 12시20분쯤 한 준위가 전화를 걸어와 “오후 작업은 현역들이 하겠다. 실종자 가족들이 저토록 애타게 기다리고 있으니 오늘 중으로 작업을 끝내겠다”고 했다. 오후 3시20분쯤 현장에서 연락이 왔다. 한 준위가 사고를 당했다는 것이었다. 수색에 참여했던 UDT 예비역들은 다음날인 3월31일 장비는 남겨둔 채 몸만 빠져나와 분향소로 향했다.

    “군에서 함미 쪽 접근 막는다”

    ‘UDT의 神’ 조광현 전 해군 대령

    1968년 UDT 14기 입교생은 120명이었으나 수료생은 7명뿐이었다.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조광현 대장. 오른쪽 옆으로 최웅 육군특전사령관, 미 해군 잠수함장. 서 있는 사람들은 교관들과 수료생들이다.

    선체 출입구를 개방하고 통로 내부에 인도줄을 설치하는 등 성과를 내긴 했지만, UDT 예비역들의 수색작업은 순조롭지 않았다. 작업환경이 열악해 잠수할 수 있는 시간이 극히 제한돼 있는데다 역할분담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탓이었다. 특히 함미 수색작업은 SSU(Ship Salvage Unit·해난구조대) 측과의 업무협조가 원활하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다.

    “현역은 훈련은 잘돼 있지만 실전경험이 부족하다. 반면 직업으로 잠수를 계속해온 예비역들은 실전경험이 풍부하다. UDT 예비역들이 참여한 건 군의 수색활동에 만족하지 못한 실종자 가족 측에서 도움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물에 들어갔던 예비역들이 나와서 내게 하소연을 했다. 군에서 함미 쪽은 접근을 못하게 한다고. 현장 지휘부와 사전 조율이 되지 않은 탓이었다. 사전에 협의를 해서 작업 배당을 받아야 하는데 무작정 작업하겠다고 하니 군 쪽에서 난색을 표했던 모양이다. 군에서 탐탁지 않게 여긴 면도 있었고.”

    조씨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4월1일 인천에서 백령도로 들어가려다 기상 악화로 대기했다. 다음날 UDT 동지들과 함께 백령도로 들어가 임차한 어선(5t급)을 타고 사고현장으로 향했는데 풍랑이 거셌다. 선장이 항해를 거부하는 바람에 되돌아와야 했다.

    “SSU부대 책임자에게 전화해 ‘오후 함미 수색작업을 우리가 맡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하자 ‘오후 작업계획을 수립해 준비하고 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현역 후배들이 하겠다는 걸 뺏는 것도 모양이 우습고 해서 ‘그럼 다음날 오전엔 우리가 하겠다’며 물러섰다.”

    해난구조가 전문인 SSU가 있는데 굳이 UDT가 참여한 이유가 뭘까.

    “수중 탐색은 기본적으로 UDT의 임무다. 실종자 수색뿐 아니라 선체의 위치 확인, 장비 찾기, 폭발물 탐지 및 처리 등 UDT가 해야 할 일이 많다.”

    4월3일 조씨를 비롯한 UDT 예비역 20여 명은 백령도 앞바다에서 한 준위 추모식을 치렀다. 한 준위가 순직한 장소가 내려다보이는 전망대였다. 조씨는 천안함 수색에 참여했던 UDT 예비역들과 함께 4월5일 백령도에서 철수했다.

    4월7일 KBS-TV 밤 9시 뉴스는 한 잠수사의 증언이라며 한 준위가 함수 쪽이 아닌 제3의 장소에서 사망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이 잠수사는 UDT동지회 회원이다. 이에 대해 UDT동지회가 강력히 항의하자 다음날 KBS는 자막을 통해 오보였음을 시인했다. 하지만 방송내용을 정밀 분석한 UDT동지회는 KBS가 악의적인 왜곡보도로 UDT와 해군의 명예를 떨어뜨리고 한 준위의 죽음까지 모독했다며 언론중재위원회에 제소하고 민사상 책임도 묻겠다는 방침을 정했다. 천안함 사건 이후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조씨는 4월13일 합동참모본부에서 열린 폭발물 관련 자문회의에도 참석했다.

    “훈련 마치니 무서운 게 없더라”

    ‘UDT의 神’ 조광현 전 해군 대령

    1970년대 초 11대 UDT대장이던 조광현씨는 박정희 대통령 여름휴가 기간에 해상 경호임무를 맡았다.

    2007년 발행된 ‘대한민국 해군특수전여단 50년사’라는 책은 조씨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UDT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인물, 세계적인 용맹과 명성을 떨친 미 해군 UDT/SEAL 대원들도 ‘코리안 캡틴 조’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 명성이 널리 알려진 사람, 자신의 해군생활 목표를 UDT 발전으로 정하고 특수전전대 창설의 주역으로….”

    1940년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난 그는 해군사관학교 16기로 임관했다. UDT를 군 생활의 목표로 정한 건 생도 때였다. 이유를 묻자 “호기심이 많았고 물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는 해사 럭비선수였다. 축구선수나 럭비선수는 물에 들어가면 근육이 풀린다는 속설 때문에 다들 물속에 들어가기를 꺼렸으나 그는 예외였다. 해군사관학교는 진해시 옥포만에 자리 잡고 있다. 수영 실력이 출중했던 그는 틈만 나면 학교 앞 바다 속에 들어가 해삼을 따먹었다. 동기생이 해사반도(사관학교 박물관 옆 부두) 앞 바닷속에 떨어뜨린 시계를 건져준 적도 있었다.

    1961년 5·16이 일어난 후 3군사관학교 체육대회가 취소됐다. 럭비부 합숙생활을 하던 그는 일반 생도 생활로 돌아왔다. 그해 여름 4학년 생도들은 대한적십자사가 주관하는 수상인명구조훈련을 받았다. 강사는 모두 미국 UDT과정을 수료한 한국 UDT 교관들이었다. 잘 다져진 근육을 가진 그들의 구릿빛 몸매에 반한 조씨는 졸업 후 해병대로 가려던 계획을 수정했다. UDT 장교가 되려면 미국에 가 UDT 교육을 받고 와야 했다. 미국 유학을 다녀온 UDT 선배들에게 물어보니 가장 힘든 훈련이 찬물에서 오래 견디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그때부터 매일 바닷물로 뛰어들었다.

    졸업식에서 국방부장관상을 받을 정도로 성적이 우수했던 조씨는 임관 후 지금의 구축함보다 작은 호위구축함을 탔다. DE로 불린 이 군함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군이 타던 것이었다. 항해 중 어망에 스크루가 걸리면 아무리 큰 배라도 꼼짝하지 못한다.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그는 해결사 노릇을 했다. 어망에 걸린 어선을 구해주고 답례로 생선을 받기도 했다.

    5년 동안 배를 타면서 그는 UDT 미국 유학길을 모색했으나 쉽지 않았다. 먼저 신청한 선배들에게 밀렸기 때문이다. 당시 UDT 유학은 경쟁이 치열했다. 지원자들은 먼저 ECL이라는 영어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해군은 매년 장교, 부사관 한 명씩 2명을 선발해 UDT 유학을 보냈다.

    대위 때인 1967년 3월 그는 마침내 미 해군의 UDT과정 유학길에 올랐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 해군은 남태평양에서 자주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그런데 작전 전개과정에 거대한 산호초와 일본군이 설치한 인공장애물, 또는 기뢰에 부딪혀 상륙군이 상륙도 못하고 수장(水葬)되는 일이 잦았다. 이에 미 해군은 이러한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해 수영실력이 뛰어난 장병을 선발해 특수부대를 창설했다. 이것이 UDT의 기원이다.

    이후 상륙작전 개념이 재래식 상륙주정이 아닌 헬기에 의한 수직상륙, 고속 호버크래프트에 의한 수면기동으로 바뀌게 되면서 UDT는 변화를 요구받는다. 1961년 쿠바를 전복하려는 피그만 작전이 실패로 끝난 후 케네디 대통령은 새로운 특수부대 창설을 지시했다. 이에 미 해군은 해상 상륙작전에 얽매이지 않는 전천후 특수부대를 창설했다. 이것이 바로 SEAL이다. SEAL은 기존의 UDT 임무 외에 선박과 교량 파괴, 적진 침투, 요인 납치 등의 특수임무를 부여받았다. 1983년 SEAL이 해군 특수전사령부로 개편되면서 UDT는 SEAL로 통합됐다.

    워커를 칼로 도려내다

    ‘UDT의 神’ 조광현 전 해군 대령

    UDT부대의 표어는 ‘불가능은 없다’다.

    조씨가 입교한 미 해군 UDT/SEAL 교육과정의 정식 명칭은 ‘Basic Under water Demolition/SEAL Training Course.’ 샌디에이고에 있는 특수전학교에 개설된 이 과정은 5개월 동안 3단계로 진행됐다.

    첫 단계는 체력 및 정신력 강화훈련. 특수체조와 구보, 수영, 장거리 고무보트 젓기, 갯벌 훈련, 찬물 견디기 등의 훈련이 6주 동안 쉴 틈 없이 진행된다. 마지막 지옥주에는 일주일 동안 전혀 잠을 못 자면서 극한의 고통을 체험하는 말 그대로 지옥훈련이 전개되는데 이 과정에서 통상 훈련생의 절반가량이 탈락한다.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고통을 극복해 졸업할 때는 자신의 체력과 정신력이 10배 이상 강해졌다고 인정하도록 만드는 것이 훈련목표다. 훈련을 마치면 무서운 게 없어진다.”

    훈련생들 사이에 가장 힘든 훈련으로 꼽히는 게 찬물 견디기였다. 바닷물에 들어가 목만 내놓고 몇 시간씩 견디는 것이다. 하지만 진해 앞바다에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조씨에게는 그다지 힘든 훈련이 아니었다. 정작 그를 괴롭힌 건 구보였다. 해안 모래밭에서 워커를 신고 뛰는데 발목이 여간 아픈 게 아니었다. 구보훈련이 끝나면 숙소까지 기다시피해서 갔다. 몇 주가 지나자 아킬레스건이 부어 워커에 발목이 닿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견디다 못한 그는 발목과 접촉하는 워커 부위를 칼로 도려냈다.

    “의무실에 가보니 의사가 무조건 쉬어야 한다고 했다. 진단서를 찢어버리고 다시 훈련에 합류했다. 1960년대 중반 월남전 상황이 악화되자 미군의 UDT 투입 수요가 증가했다. 그 바람에 훈련 강도가 더 세졌다.”

    지옥주가 되자 조(組)가 새로 편성됐다. 조씨는 태국, 베트남, 터키 등 외국인 교육생들이 모인 조의 조장을 맡게 됐다. 고무보트에 올라 밤새 교대로 노를 저어 수십㎞를 나아가고 갯벌에서 이어달리기를 했다. 모든 게 조별 경쟁이었다. 5일째 되자 잔디밭에 눕게 한 후 잠들지 못하게 하는 훈련이 실시됐다. 4일 동안 전혀 잠을 못 잔 상태라 상당수 훈련생의 눈꺼풀이 감겼다. 이들은, 조씨의 표현대로라면 ‘개 취급’을 받았다. 부사관들이 교관이었기 때문에 구타는 없었다. 하지만 팔굽혀펴기를 시키고 등에 올라탄다든지 구보에서 뒤처질 경우 바닥을 기게 하고 워커발로 얼굴을 걷어차는 등 강도 높은 체벌이 가해졌다.

    2단계는 전문교육이었다. 새벽 5시부터 체력훈련이 실시됐고, 주간에는 이론과 실습교육을 받았다. 잠수, 폭파, 통신, 정찰, 소부대전술, 독도법, 수상인명구조, 사격술, 유격훈련, 잠수훈련 등이 이어졌다. 체력단련프로그램은 더욱 강화된 방식으로 진행됐다. 수영훈련을 할 때는 오리발을 찼다. 다이빙을 배우는 한편 수중에서 나침반을 품고 2000야드(1800m) 목표지점을 찾아가는 컴퍼스 수영, 수중침투 폭파훈련을 받았다. 컴퍼스 수영의 경우 목표지점 좌우 25m 안으로 들어와야 합격이었다. 폭약을 고무보트에 싣고 해안으로 침투하다 파도에 보트가 뒤집혀 총기를 분실하면 밤새 고된 기합을 받아야 했다.

    정신이 신체를 지배한다

    체격이 작은 동양인으로서 불리한 점은 없었을까.

    “맨몸수영은 서양애들한테 도저히 안 됐다. 하지만 다리 힘으로 하는 오리발수영에서는 앞섰다. 또 매일 산꼭대기를 돌고 오는 선착순 달리기가 있었는데 다리가 짧은 사람이 유리했다. 일주일 내내 1등으로 들어오자 열외를 시키더라.”

    3단계는 전지훈련인 임무형 종합야외기동훈련(FTX). 무인도에서 전투상황을 설정하고 실전과 다름없는 훈련을 하는 것이었다. 각 조는 매일같이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으며 소부대 전술을 익혀나갔다. 해안 침투, 야간 기습폭파, 매복 등의 전술훈련과 함께 생존훈련이 실시됐다. 정해진 좌표를 찾지 못하면 물도 보급되지 않았다. 며칠씩 굶은 훈련생들은 바닷가로 가서 해삼과 해초를 따먹었다. 40m 잠수와 10㎞ 수영, 40㎞ 구보 등 육체적 훈련강도는 더욱 높아졌다.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든 적 없느냐고 묻자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미국 유학 당시 나는 한국 UDT 훈련대에서 대기하다가 출국했다. 미 해군의 UDT 훈련이 워낙 세 무사히 수료하는 게 쉽지 않다는 얘기를 듣고 ‘죽어서 시체로 돌아오면 왔지 낙오는 안 하겠다’고 공언했다. 교육을 받으며 한번도 힘들어 못하겠다는 생각은 안 했다. 극한의 고통을 이겨내며 ‘정신이 신체를 지배한다’는 신념을 갖게 됐다.”

    3단계 교육과정에서 미군 훈련생 2명이 사망했다. 적지에 침투해 상륙해안에 설치된 상륙저지시설(인공장애물)을 제거하는 훈련이었다. 훈련생들은 40파운드짜리 폭약을 메고 헤엄쳐 가서 수중장애물 주변 곳곳에 설치한 다음 전부 연결해 점화한 후 탈출해야 했다. 사고는 상륙저지시설에 접근하는 과정에 발생했다. 한 명은 장애물인 쇠창살에 찔려, 다른 한 명은 부표 줄에 몸이 감겨 죽었다. 구급차가 두 사람을 실어가는 와중에도 훈련은 중단되지 않았다. 조씨는 “그걸 보고 ‘참 독한 놈들’이라고 생각했다”며 “미국의 UDT/SEAL이 왜 강한지 알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150명이 입교했는데 수료증을 받은 사람은 절반인 7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심지어 졸업식 전날 퇴교당한 사람도 있었다. 훈련 후유증으로 머리(정신)가 정상적이지 않아 실전에 배치되면 위험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조씨가 귀국한 것은 1968년 1월21일. 밤에 김포공항에 도착하니 등화관제가 실시되고 삼엄한 경비가 펼쳐지고 있었다. 사정을 알아보니 북한 공작원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 침투를 기도한 날이었다.

    진해로 내려온 그는 곧바로 제9대 UDT대장으로 부임했다. 당시 UDT 교육과정은 ‘B-6’과정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미 해안학교(Beach School)의 첫 글자인 B에 숫자를 붙인 것이다. 조씨는 이를 해군특수전(UDT/SEAL) 과정으로 개칭하고 교육 프로그램에 SEAL 임무를 추가하는 등 훈련내용을 크게 바꾸었다. 미 해군의 SEAL 교육과정을 거의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다.

    베트남전 투입 실전훈련

    ‘UDT의 神’ 조광현 전 해군 대령

    1984년 조광현 UDT전대장은 TV에서 방영된 뻘훈련이 문제가 돼 직위해제당했다.

    그해 UDT 14기가 입교했다. 조씨는 교육훈련 전반을 직접 챙겼다. 이론을 가르치고 교관들과 함께 실습을 지도했다. 또한 육체적 훈련을 할 때도 앞장서 교관들과 함께 훈련생들을 이끌었다.

    “장비와 시설, 교관 수준이 미국에 비하면 매우 열악했다. 하지만 제대로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이전에 없던 강도 높은 훈련을 실시했다. 소수정예가 내 신념이었다. 엉성하게 훈련받은 100명보다 제대로 훈련받은 몇 명이 임무성공률이 높기 때문이다.”

    3단계 훈련과정에 한국 UDT 역사상 처음으로 생존훈련이 실시됐다. 훈련장소는 뒷날 대통령 별장이 자리 잡은 저도였다. 생존훈련 3일째 되는 날 교육생들의 동태를 살피러 접근하는데 고기 굽는 냄새가 났다. 교육생들이 바닷가 바위에 둘러앉아 고기를 굽고 있었던 것이다. 화가 난 그는 권총으로 조준사격을 해 반합을 맞추었다. 교육생들은 혼비백산해 달아났다. 사연을 알고 보니 허기를 못 참은 그들이 고무보트를 타고 거제도로 건너가 염소를 잡아왔던 것이다. 염소고기는 교관들 차지가 됐고 교육생들은 그걸 지켜봐야 하는 고통을 겪었다.

    14기 입교생은 육군과 해병을 포함해 120명이었다. 하지만 수료생은 7명에 그쳤다. 훈련교관보다도 적은 수였다. UDT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전까지는 대체로 한 기에 20명 이상씩 배출됐기 때문이다. 당시 UDT 대원은 많을 때가 100명 남짓 됐다.

    그가 훈련대장을 맡는 동안 폭발물처리 임무가 추가돼 관련자들은 육군 병기학교에서 위탁교육을 받았다. 공수강하 위탁훈련도 실시했고 한미합동기뢰전 훈련에도 참가했다. 박노식이 주연을 맡은 영화 ‘사나이 UDT’ 촬영도 지원했다.

    1970년 조씨는 EOD 교육을 이수하기 위해 다시 미국 유학을 떠났다. EOD 교육과정에 입교하려면 먼저 현지에서 4개월간의 영어학교 과정을 이수해야 했다. 하지만 그에겐 이 과정이 면제됐다. 유학 전 치른 영어시험에서 만점 가까운 성적을 받았기 때문이다.

    ‘UDT의 神’ 조광현 전 해군 대령

    국군의 날 행사에 참가한 UDT전우회 회원들.

    4개월의 공백이 생기자 그는 3년 전 UDT/SEAL 교육을 받은 샌디에이고로 가서 SBI(SEAL BASIC INDOCTRINATION·작전팀 전력화 훈련과정) 훈련을 자원해 비공식적으로 참여했다. SBI는 베트남전에서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요원을 길러내는 훈련이었다. 장교 2명, 부사관 12명으로 구성된 작전팀은 베트남과 비슷한 정글지대에서 3개월 동안 1대 1로 붙은 교관으로부터 다양한 전술훈련을 받았다.

    훈련 프로그램은 조씨가 1967년 이수한 UDT/SEAL 과정보다 한 단계 수준이 높고 실전성이 강화된 것이었다. 고도의 팀워크로 작전능력을 최고도로 끌어올리는 게 이 훈련의 목적이었다. 주요 훈련 내용은 폭파, 요인 납치, 기밀자료 탈취, 전화 도청 등이었고, 주야간 실탄이 사용됐다. SBI 교관 중 몇 명과는 안면이 있었다. 1967년 그에게 UDT/SEAL 교육을 실시했던 교관도 있었고 그 과정을 이수한 후 베트남전에 투입됐다가 돌아온 교육 동기생도 있었다.

    고소공포증을 극복하다

    그는 “퀵 킬(Quick Kill) 훈련을 집중적으로 하면서 적 1개 분대 정도는 혼자서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퀵 킬’이란 정글에서 적과 마주친 순간 곧바로 사살하는 것을 일컫는다. 실전에서는 당황해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거나 달아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교관들은 공중에 동전을 던져놓고 사격해 구멍을 낼 정도로 퀵 킬 능력이 뛰어났다.

    조씨는 여기서 공수낙하훈련도 했다. 사실 그는 그때까지 낙하훈련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어린 시절 고소공포증까지 있었다. 하지만 UDT/SEAL 훈련을 받은 그에게는 겁날 것이 없었다.

    “교관들은 당연히 내가 낙하훈련을 받은 줄 알고 훈련자 명단에 내 이름을 올렸다. 사전에 기능고장 대처법을 독학해 공중침투에 참가했다. 잘못되면 죽기밖에 더하겠느냐는 심정으로 뛰어내렸다. 고소공포증도 자연스레 극복됐다.”

    낙하훈련 고도는 보통 1250피트(375m)였다. 그보다 더 높은 곳에서 뛰면 강하시간이 길어지고 적 레이더에 잡힐 위험성이 있었다. 전술점프를 할 때는 600피트(180m)에서도 뛰어내린다. 이 높이에서는 위험 부담이 크다. 자칫 낙하산 기능이 고장 나면 예비낙하산을 펼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뒷날 귀국해 함상근무를 할 때도 UDT 대원들의 낙하훈련이 있는 날엔 만사를 제치고 달려가 참가했다.

    SBI 훈련 이수 후 그는 메릴랜드 주 인디언 헤드에 있는 EOD 학교에 들어갔다. 기뢰, 어뢰, 대잠병기 등 폭발물을 다루는 전문교육이었다. 교육기간 중 월드컵 경기가 열렸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브라질과 이탈리아의 결승전을 구경했다. 펠레가 활약한 브라질이 우승을 했다. 경기가 끝난 후 술집으로 몰려갔다. 새벽까지 마시고 다들 대취한 상태에서 부대로 돌아가기 위해 차에 올랐다. 조씨가 운전대를 잡고 뒷좌석에 베트남인 동료 2명이 앉았다. 도중에 길을 잘못 들어 강물에 차가 빠졌다. 그는 본능적으로 헤엄을 쳐서 차에서 빠져나왔다. 뒤돌아보니 동료들의 기척이 없었다. 정신이 번쩍 든 그는 다시 물속에 뛰어들어 차체를 찾아 뒷문을 열어 두 사람을 구해냈다.

    4개월간의 EOD 교육과정을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한 그는 1971년 2월 귀국 후 소령으로 진급한 후 다시 UDT대장을 맡았다. 11대 대장이었다. 2년 가까이 재임하면서 UDT 17, 18기를 교육시켰다. 이후 그는 경력 유지를 위해 배를 탔다. PC(연안경비함) 함장과 사관학교 체육과장을 지낸 뒤 1975년 중령으로 진급해 해군대학을 수료하고 구축함 부장을 맡는다.

    낙하 중 해병대 국솥에 빠질 뻔

    1976년 조씨는 UDU대장으로 임명됐다. 1954년 만들어진 UDU는 해군 첩보부대였지만 중앙정보부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주 임무는 북파공작이었다. 조씨는 미 해군에서 배워온 SEAL의 임무형 훈련을 강도 높게 실시했다. UDT와 UDU의 차이에 대해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UDT와 UDU의 훈련내용은 같았다. 구분하자면 UDT는 전시에, UDU는 평시에 활동하는 특수요원이었다. UDU는 대북첩보활동을 벌였다. 군은 1970년을 전후해 UDT 교육 이수자 중 절반을 UDU로 발령 내 북파공작에 활용했다. 교관도 UDT 출신이 맡았다. 북파공작대원들 중에는 전사자와 행방불명자가 많았다. UDU에 있다가 UDT로 되돌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내가 UDU대장으로 부임해서 보니 대원들 중에 나한테 훈련받은 UDT 출신들이 있었다. 당시엔 강한 훈련에 반발도 했지만 뒷날 만나서는 ‘힘들었지만 좋은 추억이 됐다’고 말하더라.”

    UDU대장을 마친 후 그는 PCEC(연안초계함) 함장을 지낸 후 한국함대 훈련과장을 맡았다. 훈련과장 재직시 특수전 발전 시나리오를 구상했다. 당시 해군 지휘부는 UDT와 같은 특수부대를 키우는 데 별 관심이 없었다. 그는 한미연합사를 활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지휘소연습(CPX)시 특수전(UDT)의 존재가치와 필요성을 부각시키는 전투시나리오를 작성했다. 현 체제로는 매번 작전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걸 보여주는 시나리오였다. 2년 연속 같은 결과가 나오자 연합사에서 국방부에 특수전부대의 증강을 권고했다.”

    1983년 1월 UDT는 해변단 예하 최하 말단제대에서 25특전전대로 승격됐다. 지휘관도 대령으로 격상됐다. 1955년 창설 이래 28년 만에 독립된 단위부대로 인정받은 것이다. 초대 전대장은 조씨가 맡았다. 전대장 부임 전 그는 1해역사 작전참모, 구축함 함장, 경비전대장 등 항해과 장교의 정통 코스를 밟았다.

    그는 ‘불가능은 없다’를 부대 표어로 제정하고 체제를 정비했다. 유사시 즉각 투입 가능한 특전부대를 목표로 중장기 부대발전계획을 수립하고 야외기동훈련을 강화했다. 또한 지휘관이지만 대원들과 똑같이 각종 훈련에 작전팀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포항 전지훈련 때는 강풍 속에 낙하를 강행하다 야영 중인 해병대의 대형 국솥에 빠질 뻔한 사건도 있었다. 바다에서 미식별 기뢰나 어뢰가 신고되면 직접 현장에 출동해 폭발물 종류와 제작국을 식별해 현장에서 분해했다.

    그 시절 UDT전대는 제주공항에서 인질을 구출하는 실전훈련으로 성가를 드높였다. 이 훈련은 이스라엘 특전부대의 엔테베 특공작전을 본뜬 것이었다. 해상으로 침투한 한미연합 UDT/SEAL 2개 팀(14명)이 공항을 기습해 인질을 구출한 다음 항공기(MC-130E)로 탈출하는 것이 훈련시나리오였다. 기습팀은 제주도 내 예비군으로 구성된 수백명의 방어부대 벽을 깨뜨리기 위해 공항터미널 안팎에 폭음탄을 투척했다. 폭음탄 충격으로 터미널 내 대형 유리창 수십 장이 깨져나갔다. 방어병력은 순식간에 허물어졌고 작전팀은 임무를 완벽하게 해냈다.

    실버원정대로 에베레스트 도전

    조씨는 1984년 7월 방송사건에 휘말려 직위해제당했다. KBS-TV ‘뉴스파노라마’에서 UDT 훈련과정을 소개했는데, 지옥주 훈련 중 개펄훈련 장면이 문제가 됐다. 얼굴과 손발을 비롯해 온몸이 시커먼 개흙으로 뒤덮인 훈련생들이 UDT 선배들이 던져주는 빵을 그대로 받아 먹는 광경이 국민에게 혐오감을 줬다는 것이다. 그런데 해군 주변에서는 이 사건의 속사정이 따로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육군 특전사 출신인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이 프로그램을 보다가 “왜 UDT가 오만가지 다 하느냐”고 불만스럽게 한마디한 게 단초가 됐다는 것이다.

    “UDT 홍보는 해군본부의 지시에 따른 것으로 이전에도 훈련 장면이 다른 언론에 여러 차례 소개된 적이 있었다. 해직에 대해 불만은 없었다. 그저 내 운명인가보다 싶었다.”

    UDT를 떠난 뒤에도 그의 UDT 사랑은 변함이 없었다. 1985년 해군본부 특전처장으로 근무하면서 특수전 장비 현대화를 중기계획에 반영하는 등 UDT 발전에 애쓰다가 1989년 31년의 군생활을 마감하고 전역했다.

    ‘UDT의 神’ 조광현 전 해군 대령

    조광현씨와 UDT동지회 회원들.

    전역 후엔 UDT전우회 중앙회를 조직해 전국에 있는 UDT 예비역들을 하나로 묶었다. 1989년 2월말 조씨의 전역을 축하하는 UDT 모임에서 UDT전우회를 전국조직으로 만들자는 의견이 나온 것이 계기였다. 이에 따라 전국의 기존 시·도지회가 중앙회 산하로 들어갔고 재향군인회 산하단체로도 등록됐다. 조씨는 부회장을 맡아 실질적으로 모든 업무를 관장했고 1997년부터 2004년까지는 회장으로 활동했다.

    UDT전우회는 모부대와의 친선행사, 설한지 훈련장 위문, 국군의 날 행사 참여, 수중자연보호활동(푸른 바다 가꾸기, 푸른 강물 가꾸기) 등을 벌여왔다. 특히 제1회 바다의 날인 1996년 5월31일엔 ‘헤엄쳐서 독도까지’라는 행사를 개최해 언론의 관심을 끌었다. UDT전우회는 올해 새 회장단이 꾸려진 후 UDT동지회로 이름이 바뀌었다.

    조씨는 전역 후 경남기업 비상기획관으로 6년간 근무했다. 퇴직 후엔 사단법인 한국수상레저안전연합회를 창립해 초대 및 2대 회장을 역임했다. 이 단체는 자동차 운전면허와 마찬가지로 보트 조종 면허시험을 실시하고 면허증을 관리하는 곳으로 보트 조종사와 수상인명구조원, 래프팅 가이드에 대한 교육과정을 개발했다.

    1997년 강철 같던 그의 육체에 시련이 찾아왔다. 설 연휴에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높다는 타이완의 옥산(4000m)에 올라갔다 내려온 후 술자리에서 배에 고통을 느낀 게 조짐이었다. 병원에 가보니 위암 초기였다. 위의 3분의 2를 잘라내는 수술을 받은 후 체중이 10㎏가량 빠졌다.

    국가에서 주는 연금 받으면서 편안한 일상을 보낼 때도 됐건만 그의 도전은 멈추지 않았다. 2004년 한국수상레저안전연합회장에서 물러난 뒤에는 강원도 화천에 있는 한옥학교에 등록해 황토로 집 짓는 법을 배웠다. 2006년엔 고산등반으로 눈을 돌렸다. 후배들과 더불어 백두대간을 종주한 데 이어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은 킬리만자로 정상인 우후루피크(5895m)를 밟았다. 2007년 3월엔 한국산악회가 주관한 실버원정대의 일원으로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등반길에 올랐다. 하지만 에베레스트는 UDT의 노병을 한 번에 품지 않았다. 베이스캠프에서 등정을 시도한 지 두 달 만에 8000m 지점인 사우스콜까지 진출했으나 고산병 증세로 정상을 밟는 데 실패한 것이다.

    UDT 스탠더드

    이뿐 아니다. 그는 “심심할 때 가끔 마라톤대회에 출전한다”고 말했다. 체력관리 차원이란다. 풀코스는 지금까지 두 번 뛰었다. 2006년 서울마라톤대회에서는 4시간4분26초의 기록으로 완주했다. 지지난해와 지난해엔 울트라산악마라톤대회에 참가했다. ‘불수사도북(불암산 수락산 사패산 도봉산 북한산) 5산 종주’로 불리는 이 대회는 매년 6월에 열린다. 새벽 4시 불암산에서 출발해 총 67㎞를 뛰거나 걷는다. 지난해엔 500명이 참가해 300명이 낙오했는데, 조씨가 최고령자였다고 한다. 기록은 11시간36분54초. 지난해 5월엔 대구광역시장배 철인3종경기(트라이애슬론)에도 출전해 완주증을 받았다(3시간23분4초). 이 모든 기록은 그가 보관하고 있는 대회 참가 증명서들을 통해 확인됐다.

    “삶은 곧 도전”

    도대체 그는 왜 이렇게 뛰는가. 그의 답은 간단했다. UDT 스탠더드(체력기준)를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도대체 그걸 왜 유지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에 따르면 각 종목의 측정기준은 이렇다. 턱걸이 20회, 윗몸일으키기 60회(1분), 팔굽혀펴기 100회, 달리기 7분(1마일), 잠영 50m…. 아직까지는 이 기준에 맞는 체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그는 “70대 중반까지 이 기준을 유지하는 게 목표”라고 밝혔다. 혹시 강박증이 있는지 물어봤다.

    “그건 아니다. 억지로 힘들게 하는 게 아니라 즐기면서 한다. 나이 들어 움직이지 않으면 자꾸 처지게 된다. 사는 재미도 없고. 목표를 설정하고 준비하면 처지지 않고 건강에도 좋다. 술도 자제하게 되고.”

    그에게 삶은 곧 도전이다. 그는 “늘 뭔가에 도전하면서 살아왔다”며 “지금도 나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고 있으며 그것을 해냈을 때 성취감을 맛본다”고 했다.

    그는 “한 준위 순직사건을 계기로 UDT가 어떤 임무를 수행하는 부대인지 국민에게 정확히 인식되길 바란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 UDT에 대한 그의 애정과 자부심은 종교적 신념에 가까웠다. 그는 “유사시 적 지역에 가장 확실하게 침투해 다양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특수전 부대는 해군 특수전여단이라고 확신한다”고 강조했다.

    “현대전은 대규모 전면전이 아닌 비대칭전, 저강도 분쟁, 국지전, 대테러전의 양상을 띤다. 전폭기, 이지스함, 각종 유도탄 등 최첨단 무기체제가 해결수단이 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국제법이나 민간인 희생, 안전, 기타 이유로 작전투입이나 공격이 제약을 받을 수 있다. 이러한 정규 작전요소의 틈을 메워주는 역할이 바로 특전부대의 임무다.”

    그는 또 “UDT 창설 초기에는 위험수당과 특식비가 공군 조종사와 동급이었지만 지금은 일반 함정의 항해수당에 버금가는 수준”이라며 군 당국에 UDT 부대원들에 대한 처우 개선을 요구했다. UDT 후배들에 대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작전을 수행하면서 조국을 위해서나 해군을 위해서라기보다는 UDT의 명예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칠 때 임무를 완수할 수 있다. 고 한주호 준위처럼 솔선수범하는 아름다운 전통을 지켜나간다면 최정예 특전부대로서의 위치는 확고부동할 것이다.”

    한평생 거친 파도처럼 살아온 이 무적의 사나이도 가정 얘기가 나오자 고개를 숙였다.

    “초급장교 시절부터 군인은 국가를 위해 언제 죽을지 모르니 가정은 아내가 지키는 것이라 말하고 집안일에는 무관심했다. 세 아이 학교 졸업식에도 가본 적이 없다. 지금 생각하면 후회스럽고 미안하다.”

    특수임무수행자 보상법과 UDT의 문제 제기

    현재 국회 국방위에는 UDT 북파공작원과 그 훈련자들에 대한 보상을 청원하는 법안이 계류돼 있다. 사연은 이렇다. 2006년 정부는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다. 이 법률은 특수임무수행자의 대상을 ‘군 첩보부대에 소속되어 특수임무를 하였거나 이와 관련된 교육훈련을 받은 자’로 규정하고 있다. 이 기준에 따르면 UDT는 해당이 되지 않는다. 첩보부대 소속이 아니기 때문이다.

    UDT동지회에서 이 법률을 문제 삼는 것은 UDU, HID(육군 첩보부대) 등 다른 첩보부대와 비교해 차별을 받는다고 여기기 때문. 애초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에 관한 법률이 제정될 당시 대상자는 1971년 5월 이전에 실제로 북파공작을 했던 사람들이었다. 1971년을 기준으로 삼은 것은 그해부터 UDU가 북파공작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그전까지 해군 첩보부대 소속이던 UDU가 별개의 부대로 탄생한 것도 그해다. 이때부터 UDU는 독자적인 훈련을 시작했으나 훈련내용은 UDT와 같았다. 1971년까지 북파공작을 한 UDU 대원들은 UDT 훈련(B-6 훈련)을 받은 자들이었다. UDT 훈련을 마친 군인들 중 일부가 북파공작 요원으로 차출됐던 것이다.

    갈등이 시작된 것은 2006년 법 개정으로 대상자 범위가 확대되면서. 북파공작 임무 수행과 관계없이 UDU에서 훈련받은 모든 사람이 보상을 받게 된 것이다. UDT 소속으로 UDU에 갔다가 돌아온 사람도 포함됐다. 그러자 UDT 측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그런 기준을 적용한다면 당연히 UDU의 모체이자 ‘대기 부대’였던 UDT 출신들에게도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군 관련기록에 따르면 1955년부터 1970년까지 총 395명이 UDT 훈련을 받았다(UDT 1~16기). 이 중엔 타군 소속도 포함돼 있는데 해군 소속으로 훈련을 마친 사람은 332명이다. 이 중 126명이 훈련 후 해군 첩보부대(UDU)로 전속돼 북파공작에 투입됐다. 나머지 206명은 훈련교관이나 직업군인으로 UDT 부대에 남거나 전역했다. UDT 측은 UDT 훈련이 북파공작을 위한 훈련이었으며 특수임무수행자 보상법의 취지가 북파공작훈련을 받은 사람들의 인권유린과 국가 공헌에 대한 보상이라는 점을 들어 1971년 이전의 모든 UDT 훈련 이수자에 대해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UDT 관계자들에 따르면 전역해 민간인 신분이 된 사람들 중 상당수가 행방이 묘연하다고 한다. 북파공작에 투입됐다가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그들의 판단이다. 최근 UDT동지회가 찾아낸 맹휘강(UDT 7기)씨는 “제대 후 정보부에서 찾아와 ‘큰일 하자’고 제안해 북한에 들어갔다 왔다”고 증언했다고 한다.

    UDT동지회는 나아가 1971년 이후 UDT 훈련 이수자들에 대한 보상도 요구하고 있다. UDU에서 비밀리에 북파공작요원을 양성하는 동안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UDT부대도 똑같은 훈련을 실시해온 것인데 누구에게는 보상하고 누구에게는 보상하지 않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조광현씨는 “과거 UDT에서 훈련시킨 사람들이 UDU 요원이 됐고 UDU에 결원이 생기면 UDT에서 채웠다는 점에서 보상법이 불공평한 게 아니냐는 논란이 있다”며 “양쪽이 똑같은 훈련을 받았다는 점을 입증하면 보상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Face to Face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