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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지도자와 술 ⑫

‘칵테일의 제왕’ 마티니에 빠진 제왕적 대통령

  • 김원곤| 서울대 의대 교수·흉부외과 wongon@plaza.snu.ac.kr

‘칵테일의 제왕’ 마티니에 빠진 제왕적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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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1921년 예기치 않은 불행이 찾아왔다. 그해 7월 캐나다의 캄포벨로 섬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소아마비 진단을 받아 갑자기 하반신을 움직이지 못하게 됐다. 당시 그의 병은 발병 나이와 제반 증상으로 보아 소아마비라기보다는 말초신경계에 급성 다발성 신경증상을 일으키는 ‘길란 바레 증후군(Guillan Barre·syndrome)’일 가능성이 높다는 게 현대의학의 분석이다. 정확한 원인이야 어떻든 간에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상상하기 힘든 역경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투지로 재기에 나섰다는 사실이다. 그는 남다른 고통 속에서도 꾸준한 재활 치료를 통해, 비록 평생 휠체어에 의존하는 생활을 했지만 주위의 놀라움 속에 정계로 복귀한다.

1928년 뉴욕 주지사 선거에서 당선된 그는 혁신적인 프로그램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이런 업적을 바탕으로 주지사 재선에 성공한 그는 재임기간(1929~1932) 중 최고의 주지사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마침내 1932년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지명된다.

대공황과 세계대전으로 연임 가도

1932년 선거에서 루스벨트의 상대는 미국 제31대 대통령으로 당시 현직에 있던 허버트 후버(Herbert Hoover·1874~1964, 재임기간 1929~1933)였다. 당시는 1929년 10월 24일 미국 뉴욕 주식시장을 덮친 주식 대폭락(검은 목요일)을 신호탄으로 시작된 대공황의 영향이 미국 경제를 지배하고 있을 때였다. 선거 유세 기간 내내 루스벨트는 후버 진영의 경제 실정(失政)을 신랄하게 공격했고, 결국 57%의 득표율로 당선된다. 1933년 3월 4일 대통령에 정식 취임한 루스벨트는 취임 후 즉시 대공황의 와중에서 허덕이는 미국 경제를 살리고자 ‘뉴딜(New Deal)’이라고 하는 적극적인 경제정책을 시행했다.

뉴딜 정책은 구제(Relief), 부흥(Recovery), 개혁(Reform)의 이른바 ‘3R 정책’을 슬로건으로 해 그 후 7년이라는 장기간에 걸쳐 진행됐다. 이 기간은 크게 경제 구제와 부흥에 역점을 둔 1기(1933~1934)와 사회개혁을 중시한 2기(1934~1937), 그리고 뉴딜정책이 정체기를 맞자 제2차 세계대전에 대비한 군사비 지출 증가로 경기 회복을 도모한 3기(1937~1939)로 나누어진다. 뉴딜정책으로 1935년 여름부터 경기가 조금씩 상승하자 루스벨트의 인기는 절정에 달한다. 이 여파로 그는 1936년 대통령선거에서 60.8%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한다.



대통령 재선 후인 1937년 미국 경기는 다시 악화되기 시작했지만, 1939년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에 미국이 참전(1941)하면서 미국 경제도 회복길에 들어선다. 이 때문에 오늘날 뉴딜 정책의 진정한 효과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만일 제2차 세계대전이 없었더라도 뉴딜정책으로 당시 침체된 경제를 제대로 극복할 수 있었을까’하고 반문한다.

한편 루스벨트의 두 번째 임기 당시 국제 정세는 히틀러의 등장으로 불안한 정국이 계속되다가 기어코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만다. 이런 가운데 루스벨트는 1940년, 그때까지 미국 정치계의 불문율을 깨고 대통령 3선에 도전한다. 그는 이 선거에서 위기 상황일수록 그와 같이 경륜이 있는 인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했고, 한편으로는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 당신들의 자식들을 보내 희생시키지 않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결국 55%의 득표율로 3선에 성공한다.

루스벨트의 세 번째 임기(1941~1945)는 제2차 세계대전과 궤를 같이했다. 재임 초기에는 여전히 참전 지지 세력과 반전 세력 사이의 갈등이 지속됐지만, 그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연합군에 대한 군수 지원과 군비 증강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던 중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자 미국은 공식적으로 세계대전에 뛰어든다.

심혈관질환의 백화점

‘칵테일의 제왕’ 마티니에 빠진 제왕적 대통령

‘칵테일의 제왕’으로 불리는 마티니.

1943년 연합군의 궁극적인 승리가 예상되자 루스벨트는 당시 그와 함께 국제정치의 ‘빅3’로 불리던 영국의 처칠, 소련의 스탈린과 회동을 하면서 향후 국제 정세를 긴밀히 논의했다. 이런 가운데 루스벨트의 건강은 눈에 띄게 나빠졌다. 1944년 3월 베세스다(Bethesda) 병원에서 받은 그의 건강 검진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고혈압, 동맥경화증, 협심증, 심근병증, 심부전증 등 그야말로 심혈관질환의 백화점이었다. 그렇지만 그의 정치적 야심은 끝이 없어 그해 말 훗날 후임 대통령이 되는 트루먼(Harry S. Truman·1884~1972, 재임기간 1945~1953)을 부통령후보로 해 네 번째 선거에 도전한다. 그리고 이번에도 53%의 득표율로 당선됨으로써, 또다시 대통령직을 수행하게 된다. 그러나 계속되는 전쟁의 여파와 루스벨트의 건강 문제로 그의 4번째 취임식은 백악관 뜰에서 조촐하게 열렸다.

루스벨트의 4번째 임기는 임박한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처리 문제로 긴박하게 진행됐다. 그는 1945년 2월 소련 흑해 연안에 위치한 얄타에 가서 독일 패전 후의 제반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미국, 영국, 소련 3개국 정상회담에 참석했다. 이때 “루스벨트의 병든 모습을 본 처칠의 주치의는 처칠에게 루스벨트는 이미 죽어가는 사람”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얄타회담 후 중동지역에서 지역 지도자들과 일련의 회담을 마친 후 미국으로 돌아온 루스벨트는 얄타회담에 관한 보고를 위해 3월 1일 의회에 출석했는데 그의 지치고 병약한 모습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1945년 3월 29일 루스벨트는 조지아 주 웜스프링 소재의 백악관 별장에 가서 유엔 창립회의에 참석할 준비 겸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4월 12일 오후 그는 갑자기 후두부에 심한 두통을 호소하면서 쓰러진다. 그리고 얼마 후인 오후 3시 35분 사망하고 만다. 사인은 대량의 뇌출혈이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당시 그의 건강 상태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던 대중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그의 장례식은 성대하게 거행됐으며 유해는 평소 그의 유언대로 하이드파크에 있는 가족 소유지에 묻혔다. 소원한 관계가 지속됐던 엘리너는 훗날 1962년 사망해 그의 곁에 묻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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