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호

‘천재’ 모차르트와 ‘악성’ 베토벤 그 빛과 그림자

  • 황승경│국제오페라단 단장·공연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입력2012-02-21 11: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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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재’ 모차르트와 ‘악성(樂聖)’ 베토벤. 14살 차이인 이 두 음악가는 최고의 작곡가로 명성을 얻었지만 둘의 삶은 완전히 달랐다. 음악교육가 아버지의 배려로 10년간 유럽을 돌며 견문을 넓힌 모차르트가 그의 밝은 음악 색채와 달리 감자 몇 알로 연명했다면, 아버지의 학대에 시달리며 혹독한 음악교육을 받은 베토벤은 알려진 것과 달리 부유하고 안정적인 음악가 생활을 했다. ‘천재’는 극심한 경제적 고통 속에 쓸쓸히 혼자 삶을 마감했지만, ‘악성’은 2만 명의 추모객이 애도하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 ‘천재’와 ‘악성’, 그 삶 속으로 들어가보자
    ‘천재’ 모차르트와 ‘악성’ 베토벤 그 빛과 그림자
    동네 피아노학원 이름 중 유독 ‘모차르트 피아노학원’ ‘베토벤 피아노학원’이 많은 것을 보면 아마도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와 루트비히 판 베토벤(1770~1827)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작곡가라는 생각이 든다.

    1993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는 재밌는 실험을 했다. 36명의 학생을 둘로 나눈 뒤, 한 그룹에는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려주고 지능지수(IQ) 테스트를 했고, 다른 그룹은 테스트만 했다. 그 결과 모차르트 음악을 들은 학생들의 IQ가 평균 9점 높게 나왔다. 캘리포니아 주립대는 이 결과를 네이처지(誌)에 게재하면서, 논문 제목을 ‘모차르트 효과’라고 했다. 사람들은 모차르트 음악을 들으면 머리가 좋아진다는 것을 정설로 받아들였다. ‘모차르트 태교음악’이 성행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베토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BBC방송국은 뉴스 시그널로 ‘적국’ 작곡가인 베토벤 음악을 사용했다. 제3번 교향곡 ‘운명’의 서두 부분을 뉴스 시작에 사용할 정도로 대중에게 미친 베토벤의 영향력은 컸다. 전쟁과 학살에 대한 원한 때문에 독일이라면 치를 떠는 사람들도, 베토벤의 제9번 교향곡 ‘합창’을 들을 때에는 희망의 메시지를 떠올리며 베토벤이 독일인이라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였다.

    사실, 베토벤의 생애는 한 편의 드라마였다. 자신의 육체적 한계를 넘어서며 억새풀 같은 인생을 살다간 인물이었다. 그에 관한 이야기는 청력상실, 괴팍한 성격, 유서 집필, 조카에 대한 집착, 연인에게 보낸 편지 등으로 전설이 됐다. 여기에 헝클어진 머리카락, 무언가 만족스럽지 못한 표정, 따뜻함이라고는 전혀 찾을 수 없는 날카로운 눈빛을 보여주는 초상화가 그 전설에 신뢰성을 보태고 있다.

    최초의 프리랜서 작곡가 베토벤



    ‘천재’ 모차르트와 ‘악성’ 베토벤 그 빛과 그림자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의 한 장면.

    그런데 베토벤의 생애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그다지 불행하지 않았다. 베토벤은 프리랜서 작곡가로 활동한 최초의 작곡가로 비교적 행운이 따른 인물이었다. 베토벤은 윗세대인 모차르트와 달리 황실이나 귀족에게 소속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친 작곡가였고, 그럼에도 경제적으로 비교적 안정된 삶을 살았다.

    베토벤 시대에는 귀족뿐 아니라 부유한 평민도 피아노와 바이올린 같은 악기를 배울 수 있었기 때문에 그의 휘하에는 레슨을 받으려는 제자들로 넘쳐났다. 게다가 일반대중을 위한 기악 악보출판이 호황이었고, 작곡가에게 주어지는 인세도 정착되는 시기여서 베토벤은 인세를 벌어들인 최초의 세대이기도 했다. 귀족들의 입맛에 벗어난 주제를 선택해 빈곤에 시달렸던 모차르트와 달리 베토벤이 비교적 편안하게 작품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같은 시기에 활동했으나, 베토벤보다 나이가 어리고 자신이 작곡한 곡을 직접 연주하지 않았던 프란츠 슈베르트(1797~1928)는 ‘자장가’의 작곡 보수로 겨우 삶은 감자 몇 알과 음식 한 접시를 받았을 뿐이다. 반면 베토벤은 당시 작곡가들 중 대중의 인지도가 높았고 후원하는 귀족도 끊이지 않아 세상 이치에 밝았고, 자신의 곡을 직접 연주해 안정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베토벤의 삶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모차르트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아버지가 ‘신동’ 모차르트를 모델 삼아 아들을 세계적인 천재 음악가 반열에 올리고 싶어한 것이다. 아버지의 집착은 대단했다. 할아버지 때부터 음악가 집안이었던 베토벤의 아버지는 아들보다 14세 많은 모차르트 연주를 기억하며, 자신의 아들을 천재로 만들기 위해 혹독하게 교육했다. 베토벤의 데뷔 무대는 이런 왜곡된 아버지의 욕심이 만들어낸 참담한 실패였다. 신동으로 보이기 위해 아들 나이를 두 살 적게 속이고 데뷔 무대에 세웠지만, 베토벤은 손가락이 떨려서 제대로 연주하지 못했다. 어린 베토벤은 모차르트가 가진 그런 천재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또 베토벤의 아버지는 모차르트의 아버지처럼 교육자로서의 능력도 없었다.

    단조의 어둡고 슬픈 멜로디를 사용해도 따뜻하고 긍정적인 요소를 가졌던 모차르트 음악과 달리 베토벤의 음악은 아무리 장조의 밝은 멜로디를 사용해도 구슬프고 암울하다. 많은 사람은 그 이유를 베토벤이 유년기에 겪은 아픔에서 찾는다.

    모차르트의 아버지는 아들을 칭찬과 함께 금이야 옥이야 조심스럽게 교육했다. 반면에 베토벤의 아버지는 잦은 체벌과 학대를 일삼았다. 그 결과 유년기의 공포가 내면에 깊이 각인됐고, 베토벤은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연약한 어머니에 대한 연민을 갖게 된다.

    유년기 공포가 만든 암울한 멜로디

    모차르트는 음악사에서 전무후무한 천재다. 서양음악사에서 베토벤은 ‘악성(樂聖)’이라며 성인(聖人)에 비유하지만 그를 두고 천재라고는 하지 않는다. 불후의 천재 작곡가로 꼽는 사람은 모차르트 단 한 사람뿐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그를 최고의 작곡가로 꼽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오페라, 교향곡, 협주곡, 실내악곡, 종교음악, 가곡에 이르기까지 성악과 기악 거의 모든 분야에서 천재적인 음악성을 발휘해 수많은 명작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의 음악은 시대를 초월한 진한 감동을 준다. 그래서인지 한국의 많은 임신부는 지금도 자궁 속 아이의 지능지수(IQ)를 높이고 천재성을 일깨울 목적으로 모차르트 음악을 듣는다.

    필자가 이탈리아음악원에서 배운 서양음악사 책의 목차를 보면, 모차르트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작곡가에게도 한 챕터 전체를 할애하지 않는다. 35개 챕터 중 유일하게 모차르트에게만 한 챕터를 할애했는데, 시험을 위해서는 그의 모든 작품을 암기해야 했다. 그의 방대한 음악을 외우고 들을 때마다 ‘모차르트가 35세로 단명하지 않았다면 후세 음악가들은 더욱 괴로웠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756년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난 모차르트는 음악교육자인 아버지 레오폴트조차 감당하기 버거운 천재성을 보였다. 4세 때는 한 번 들은 음악은 그대로 따라 연주했고, 5세 때 작곡을 시작했으며, 12세 때는 오페라를 작곡했다. 레오폴트는 천재아들을 데리고 6세 때부터 연주여행을 떠나 유럽 각 도시를 돌아다녔고, 덕분에 사람들은 어린 소년의 기가 막힌 ‘음악묘기’를 감상할 수 있었다. 키가 작아서 의자에 쿠션을 깔아야 겨우 건반과 위치를 맞출 수 있었던 이 어린아이는 눈을 가리고도 완벽하게 하프시코드(harpsichord·피아노 전신인 건반악기)를 연주했고, 천으로 건반을 가리고도 유창하게 클라비어(klavier·건반이 있는 모든 현악기)를 연주했다. 즉흥적으로 분위기에 맞추어 작곡까지 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프랑스에서는 루이 15세의 총애를 받던, 차갑고 도도한 퐁파두르 후작부인(1721~1764)이 자신이 작곡한 곡을 능수능란하게 연주하는 신동의 재주에 감탄해 볼에 키스를 해주었고,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는 궁정극장으로 여섯 살 신동을 초대해 직접 의상을 하사했다. 이곳에서 모차르트는 넘어진 자신을 일으켜 세워준 공주를 향해 “이 공주와 결혼할 거야”라고 큰 소리로 외친 일화도 전해진다. 이 공주가 바로 테레지아 여제의 막내딸이자 훗날 프랑스 루이 16세의 왕비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비극의 주인공 마리 앙투아네트(1755~1793)다.

    “이 공주와 결혼할 거야”

    이렇듯 모차르트는 비록 평민이었지만, 당시 유럽의 중심에 선 인물들과 직접 교류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넓혀나갈 수 있었다. 동시에 10여 년간의 유럽 연주여행을 통해 각 도시 최고의 음악가들과 교분을 쌓으면서 그들의 음악을 흡수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 결과 이 조숙한 천재는 영국에서 얻은 헨델의 장대함, 독일에서 얻은 바흐의 경건함, 프랑스에서 익힌 로코코 양식의 화려함과 우아함, 이탈리아에서 접한 오페라라는 새로운 형태를 모두 흡수했다. 이미 15세가 되기 전에 각 분야의 곡을 100여 곡 작곡할 정도였으니.

    그러나 이후의 인생은 달랐다. 모차르트는 연주여행으로 인해 자기 또래 사람들과 사귈 기회를 제대로 갖지 못해 사회성이 부족했고, 세상물정에도 어두웠다. 성격은 순수했지만 고집이 세고 괴팍했기 때문에 도처에서 그를 공격하는 사람들에게 시달려야 했다.

    베토벤과 모차르트는 1787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조우한다. 17세의 젊은 음악도 베토벤은 음악의 절정에 도달해 있던 31세의 모차르트와 빈에서 만난다. 베토벤의 피아노 연주 실력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던 모차르트는, 오페라 ‘돈 조반니’의 한 부분을 베토벤이 변주곡으로 작곡하자 깜짝 놀라며 그에게 “곧 세상을 향해 천둥을 울릴 날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들이 만난 합스부르크왕가의 수도 빈은 당시 인구 25만 명의 대도시로, 런던(70만 명), 파리(50만 명), 나폴리(40만 명)와 더불어 유럽 중심도시였다. 빈에는 음악을 소비하는 많은 부르주아와 귀족이 있었고, 주교의 취향에 의해 모든 곡을 결정하는, 모차르트의 고향(잘츠부르크)과는 다른 면모의 도시였다. 이 시기 빈은 다양성을 추구하면서 새로운 음악을 맞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모차르트는 빈에서 오페라 ‘후궁으로부터의 도주’(1782년 초연)를 시작으로 왕성한 작곡활동을 했지만, 자신에 대한 인정과 찬사가 점차 줄어들고 경제적으로 극심한 고통을 받으면서 결국 1791년 빈에서 사망했다.

    그렇게 모차르트가 떠난 1년 후 베토벤은 빈으로 이주했다. 베토벤은 빈에서 러시아의 문호 알렉산드르 푸슈킨(1779~1837)의 희곡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와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의 숙적으로 묘사된 안토니오 살리에리(1750~1825)를 사사했다. 또 모차르트와 쌍벽을 이루던 고전주의의 대가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1732~1809)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자신의 색채를 확립하며 빈 최고의 촉망받는 작곡가 반열에 오르려는 순간, 베토벤은 청력상실이라는 청천벽력과 같은 선고를 받는다. 베토벤은 1798년부터 서서히 청력을 잃었다. 작곡가에게 귀가 안 들린다는 것은 곧 죽음을 뜻한다. 베토벤은 1801년 요양차 간 빈 근교의 하일리겐슈타트에서 두 동생 앞으로 유서를 작성했다. 이 유서는 베토벤 사망 후 26년 만에 세상에 알려졌는데, 그 속에는 그의 절망적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천재’ 모차르트와 ‘악성’ 베토벤 그 빛과 그림자

    베토벤의 유일한 오페라 ‘피델리오’.



    “주색에 빠진 아버지와 (베토벤이) 17세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해 청소년기부터 가장 노릇을 하던 내가 이제 안정적인 생활에 접어들자마자 불운에 당면했다.”

    그러나 세상과 치열하게 싸우며 살아온 베토벤은 자신을 다그치면서 더욱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다. 유서를 작성한 때가 제2번 교향곡을 작곡하던 시점이었으니, 청력을 잃은 후 제9번 교향곡까지 8개의 교향곡을 작곡했다. 또 베토벤의 전 작품을 볼 때, 작품번호 31번부터 135번까지 거의 100여 곡의 독주곡, 협주곡, 실내악곡, 오페라, 교향곡을 귀머거리 상태로 작곡하는 괴력을 보여주었다.

    베토벤은 평생 독신으로 사는 동안 수많은 뮤즈로부터 음악적 영감을 받았다. 1994년 버나드 로즈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게리 올드만과 이사벨라 로셀리니가 주연한 영화 ‘불멸의 연인’은 베토벤의 그런 면모를 잘 보여준다.

    베토벤이 죽은 후 유품을 정리하던 중 수신인을 밝히지 않은 편지 3통이 발견되었는데, 이 편지들은 ‘나의 불멸의 여인에게’로 시작하고 있었다. 구구절절 그의 음악처럼 정열적이고 뜨거운 구애의 말로 가득 차 있다. 예컨대 그 편지에는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고 나를 사랑해주시오. 오늘도, 내일도, 그대, 그대 그대를 향한 눈물겨운 그리움, 내 생명, 내 모든 것이여, 안녕! 내 진심을 잊지 말아주오!”와 같은 구절이 들어 있다.

    평생 신경질적이고 무뚝뚝하게 대하고 남을 위한 배려는 찾아볼 수 없었던 ‘독불장군’ 베토벤의 연서가 알려지자 많은 사람이 그의 연인이 누구인지 추적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1811~12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연서가 발견된 그의 사물함에는 그의 재산에 관한 문서와 각종 중요 서류들이 들어 있었다. 평상시 자주 사용하던 사물함의 용도로 추측해볼 때, 그는 15년간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를 자주 읽어보며 애절한 사랑의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베토벤을 연구한 사람들은 그 애틋한 연서의 수신인이 베토벤이 피아노 소나타 ‘월광(14번)’을 헌정한 줄리에타 기차르디(1784~1856)일 것이라고 조심스러운 결론을 내린다.

    ‘연인’ 줄리에타 기차르디

    기차르디는 빈으로 이주한 이탈리아 귀족으로, 17세 때 30세의 베토벤을 만났다. 당시 베토벤은 촉망받는 작곡자이자 연주자였지만 평민이었기에 두 사람 사이에는 신분이라는 큰 장애물이 있었다. 사람들은 베토벤의 이름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에서 ‘판(van)’을 보고 귀족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 ‘판(van)’은 독일 귀족을 칭하는 ‘폰(von)’과는 다르다. 베토벤의 선조는 네덜란드에서 이주했는데, 네덜란드어 ‘반(van)’은 영어 ‘오브(of)’를 의미한다.

    영화 ‘불멸의 연인’에서 줄리에타는 결혼을 반대한 아버지와 베토벤의 청력을 실험하는 내기를 한다. 당대 최고의 피아노를 주문한 뒤 베토벤을 혼자 남겨 연주하게 함으로써 그의 청력을 알아보려 하는 것이다. 그런데 베토벤은 피아노에 귀를 대고서 그 울림의 차이로 월광을 연주한다. 아름다운 월광의 화성을 찾아가며, 한 박자 한 박자 피아노를 연주하는 베토벤의 모습은 운명의 한계를 극복하는 영웅의 이미지로 다가오면서 영화를 보는 이들의 눈망울을 젖게 만들었다. 물론 이 장면은 감독의 상상력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러나 줄리에타 기차르디가 ‘백작부인’의 삶을 택하자, 베토벤은 암흑의 세상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죽을 결심으로 유서도 썼다. 베토벤은 이후 그와의 사랑을 잊으려는 듯 많은 여인을 만나 각기 다른 여인에게 많은 곡을 헌정했다. 물론 줄리에타 기차르디의 초상화가 베토벤이 고이 간직한 유품의 하나였고, 결혼까지 생각한 사람인 만큼 ‘불멸의 여인’에 가장 유력하지만 엄격히 말하자면 추측일 뿐이다.

    베토벤의 유일한 오페라로 1805년 초연 이후에 10년 동안 세 번 개작하는 열의를 보인 오페라 ‘피델리오’가 있다. 모함을 받아 갇힌 남편을 구하기 위해 남장을 하고 감옥에 들어간 적극적이고 강인한 ‘레오노라’가 ‘불멸의 여인’일지도 모른다.

    자식이 없던 베토벤은 막냇동생 아들인 카를에게 맹목적인 사랑을 퍼부었다. 제수인 요한나와 법정투쟁 끝에 양육권을 얻은 그는 조카에게 최고의 교육을 시키려 했다. 그렇지만 베토벤은 자식교육에서는 알코올중독자였던 그의 아버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자애로운 모습을 보이다가도 윽박지르곤 하는 등 조울증 증세는 흡사 ‘지킬박사와 하이드’ 같았다. 이런 성격 때문에 집안 가사도우미는 한 달이 멀다 하고 그만 뒀고, 조카는 과도한 관심과 기대에 따른 부담 때문에 권총 자살까지 시도했다. 영화에서는 감독이 황당한 상상력을 발동해 요한나를 ‘불멸의 연인’으로 만들고 조카 카를을 베토벤의 아이로 설정하지만 사실과 다르다.

    어쨌든, 모차르트와 베토벤은 고전주의(classicism) 작곡기법으로 소나타 형식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조화롭고 전형적인 구조를 확립한 인물이다. 엄숙장엄하고 화려한 바로크 양식에 반발해 나온 고전주의는 계몽주의 영향으로 합리성을 추구했다. 모차르트는 빈에 머무는 동안 하이든과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빈고전악파’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활발한 창작활동을 펼쳤고, 베토벤은 이러한 고전주의의 정점을 이루었다.

    매서운 칼바람이 부는 날, 묘지 관리인만 지켜보는 가운데 묻힌 모차르트와 2만여 명의 추모객이 애도하는 가운데 장례식을 치른 베토벤. 이 두 사람은 모두 최고의 작곡가였지만 마지막까지 그 삶은 너무나 달랐다. 하지만 두 사람이 남긴 음악은 우리의 가슴에 영원히 남을 거라는 점에서는 어쩌면 같은 삶을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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