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호

SNS 지적으로 퇴화된 정치선전장

초강대 개인의 지령과 온라인 군중의 맹신

  • 정해윤|시사평론가 kinstinct1@naver.com

    입력2012-02-21 16: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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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과 수년 전에는 상상도 못한 거대한 사회 현상. 2030세대 삶의 아이콘. 올해 총선과 대선의 중대 변수. 편견과 왜곡과 소외의 온상. 한국의 SNS는 이렇게 우리 곁에 넓고 깊게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제 SNS를 논하지 않고는 한국 사회를 이해하기 힘들게 됐다. 그러나 지금껏 언론의 접근은 너무 단편적이었다. 연원에서부터 현재의 양상에 이르기까지 SNS 현상의 함의를 비판적으로 규명해봤다.
    SNS 지적으로 퇴화된 정치선전장
    새로운 미디어 기술의 발명은 정치적 격동을 동반한다. 종교개혁이라는 역사적 사건 뒤에는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이 있었다. 독일어 성서의 대중적 보급은 프로테스탄트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1930년대 독일 나치의 등장에는 라디오가 있었다. 선전의 귀재 괴벨스는 라디오 보급에 적극적이었고, 이를 통해 독일인의 사고를 통제했다.

    TV 시대의 정치적 승자로는 단연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을 꼽을 수 있다. 그는 TV 토론에서 늙고 노회한 닉슨을 상대로 젊음과 잘생긴 외모를 과시하며 승리를 낚아챘다. 이후 미국에서대통령이 되려면 키가 크고 잘생겨야 한다는 통념이 생겼다. 21세기엔 인터넷이라는 뉴미디어가 등장했다. 인터넷 시대 최초의 정치적 승자는 한국에서 탄생했다. 젊은 세대는 인터넷으로 결집해 노무현이라는 변방의 인물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정치적인, 너무나 정치적인

    현재 전 세계가 주목하는 뉴미디어는 SNS(Social Network Service)다. SNS는 2008년 미국 대선에서 최초의 흑인 대통령을 탄생시키는 데 일조한 바 있다. 당시 오바마 민주당 후보는 페이스북, 트위터, 유튜브를 통해 선거자금을 모으고 온라인 유세를 성공적으로 펼쳤다. SNS는 지난해 아랍에서 재스민 혁명을 촉발시키는 데 기여함으로써 또다시 위력을 발휘했다.

    금융위기와 양극화로 전 세계적 분노가 폭발 직전에 이른 지금 SNS는 서구 사회마저 뒤집을 도화선이 될지도 모른다. 특히 신기술 수용에 앞서가는 한국에선 이미 2030세대가 현실과 괴리된 또 다른 세계를 웹상에 구축해놓았다. 최근 치러진 선거에서 여론조사를 기반으로 한 예측이 번번이 빗나가는 것은 유선전화로 연결되지 않는 고립된 지역이 생겼음을 보여준다. 이제 정치인들은 유권자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 SNS의 세계로 뛰어들지 않으면 안 된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SNS는 페이스북이다. 처음엔 미국 하버드대 학생들 간 인맥관리 용도로 개발됐으나 아이비리그 대학생과 고등학생을 거쳐 전 세계로 개방됐다.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가 최근 주식 상장을 위해 제출한 서류에 따르면 기업 가치를 스스로 1000억 달러로 평가했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전 세계 8억4500만 명이 가입돼 있다.

    또 다른 SNS인 트위터는 한 번에 쓸 수 있는 글자가 140자에 불과하지만 강한 전파력이 특징이다. 재스민 혁명에서도 트위터가 큰 역할을 했다. 과거 절대 권력자를 위협했던 입소문의 힘은 현재 트위터로 전이됐다.

    한국은 SNS문화에서 상당히 앞선 나라다. 10여 년 전 동창 찾기 붐을 일으킨 아이러브스쿨도 SNS의 일종이었다. 미니 홈페이지를 표방하는 싸이월드는 그 기능에 있어 페이스북과 별 차이가 없다. 페이스북이 생기기 전 국내에서 열풍을 일으켰지만 해외진출에는 실패했다. 포털사이트를 비롯해 국내 IT기업이 해외에 성공적으로 진출하지 못하는 이유는 연구할 과제다.

    수년 전부터 블로그도 인기를 얻고 있다. 카카오톡은 주로 휴대전화상에서 메신저와 채팅 서비스를 제공한다. 2010년 시작됐지만 스마트폰의 보급과 함께 점유율이 급속히 높아지고 있다. 이 외 네이버가 제공하는 미투데이와 다음이 제공하는 요즘(yozm)도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기준으로 우리나라에서 인구 10명당 1명 이상이 SNS를 사용하고 있다. SNS 사용자는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SNS 현상은 국가마다 달리 나타난다. 미국에서는 페이스북이 인기 있는 반면 유럽에서는 트위터가 더 유행이다. 한국에서는 트위터의 열기가 압도적이다. 특유의 세(勢) 과시 성향과 궁합이 맞는 까닭이다. 또 익명의 시민은 유명인과 직접 연결되는 데서 만족을 얻는다.

    트위터가 페이스북과 다른 점이 바로 이것이다. 페이스북은 동등하게 친구 맺기를 한 사람에게만 정보가 공개된다. 반면 트위터는 한 사람이 거대한 팔로어 집단을 이끄는 일 방향 관계 맺기가 가능하다. 국내 최초로 팔로어 100만을 돌파한 진보성향 소설가 이외수의 경우 자신이 팔로잉 하는 숫자는 100분의 1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보수논객 변희재는 이를 ‘다단계 지령 시스템’이라고 표현한다.

    SNS 지적으로 퇴화된 정치선전장

    ‘나꼼수’는 최근 ‘비키니’ ‘코피’ 논란에 휩싸였다.

    이런 트위터 방식의 관계 맺기는 정보 편향을 가중시킨다. 처음부터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고 그 집단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정보만 받기 때문이다. SNS가 사회적 소통의 창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분열을 심화시키는 장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루터가 2011년 트위터 사용자를 분석한 결과 가입자의 1%가 전체 트위터 정보의 60.7%를 작성했고, 가입자의 10%가 전체 트위터 정보의 95%를 작성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현상을 정의하는 것이 ‘90대 9대 1의 법칙’이다. 90%는 관망만 하고, 9%는 리트위트의 형태로 소극적으로 참여하며, 1%만이 능동적으로 콘텐츠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결국 SNS의 세계에서 극소수의 떠벌이는 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개인 간의 불균형을 심화시킨다.

    SNS 지적으로 퇴화된 정치선전장

    소설가 공지영(왼쪽)과 이외수.

    SNS에서 유통되는 정보가 정치 일색이라는 점도 한국적 현상이다. 닐슨코리안클릭에 의하면 SNS, 블로그, 게시판은 포털뉴스와 방송사 웹사이트에 비해 정치인을 언급한 횟수가 6배, 정당 이름을 언급한 횟수가 2.3배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흥미로운 점은 현실세계의 여대야소가 SNS 세상에서는 정반대라는 사실이다. 2011년 트위트 생성과 리트위트 비율에서 당시 소수야당인 민노당이 1위, 거대야당 민주당이 2위, 거대여당인 한나라당이 꼴찌를 차지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여당에서는 총선 공천에 SNS역량지수를 반영한다는 계획이다. 이로 인해 트위터 계정을 거래하는 행위까지 생겨나고 있다.

    사고(思考) 감염

    지난해 12월 헌법재판소는 인터넷을 통해 특정후보나 정당을 지지하는 행위를 금지한 공직선거법 조항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다. 2012년 19대 총선부터 SNS를 이용한 선거운동을 허용한 것이다. 이미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조국, 이외수, 공지영, 김제동 등 유명 트위터리안들이 박원순 후보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나꼼수’에서 선거 말미 터뜨린 ‘1억 피부과’ 괴담 역시 트위터를 통해 유포되며 선거의 분수령을 이루었다. 이런 사례는 올해 12월 19일 치러질 대통령선거에서도 투표일 며칠 전 터뜨리는 폭로 한방으로 선거승부가 결정날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과거 이회창 후보가 수개월~수년에 걸친 병풍(兵風)괴담으로 침몰한 것과 비교해 정보의 유통속도와 예측 불가능성은 현저히 높아졌다.

    SNS는 이미 검증된 파괴력으로 인해 세계 독재정권의 통제대상이 됐다. 그러나 민주주의 국가인 한국에서는 발생하지도 않은 사태를 염려해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SNS의 세계를 주시할 수밖에 없는 것은 사고(思考) 감염의 위험성 때문이다. 중세 유럽에서 흑사병의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된 것은 긴밀한 네트워크가 원인이었다. 당시 유럽은 해상무역의 증가로 도시 간 연결이 조밀해졌는데 페스트 병균은 이 연결망을 타고 급속히 퍼져나갔다. SNS의 세계에서도 이런 사회적 매몰비용이 발생할 것이다. 기술의 발전에 반해 제어할 방법은 뒤따르지 못하고 있다. 표현의 자유에 대한 권리는 갈수록 증대되고 있다.

    금융시장에서 사용되는 ‘버블’이나 ‘패닉’같은 용어는 사고감염의 또 다른 표현이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가 과거와 다른 점이 이것이다. 금융위기나 공황은 역사적으로 늘 존재했다. 그런 면에서 2008년 금융위기는 인터넷이 아니어도 발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터넷이 위험을 증폭시킨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개인이 데이 트레이딩을 한다는 것은 인터넷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한국의 파생상품 거래량이 세계 1위라는 점은 한국이 세계 최고속도의 인터넷을 보유한 것과 직접적으로 관련돼 있다. 개인이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며 투기대열에 합류하면서 불안정성은 한층 증폭됐다. 이렇게 촘촘히 짜인 네트워크는 특정 집단이 조작된 정보를 퍼트리기에 안성맞춤이다.

    한국은 실제로 이런 일을 겪은 적이 있다. 2008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미네르바 사건이 그것이다. 검찰에 따르면 미네르바는 현실세계에서 전문대 졸업학력에 직업도 없는 30대 루저였다. 그러나 인터넷 세계에서는 지혜로운 노인이자 경제대통령의 지위에 올라 있었다. 그가 인터넷 공간에서 상반된 아바타를 가질 수 있었던 데는 지식인들의 대중영합이 큰 역할을 했다.

    강용석의 ‘전투력’ 이외수의 ‘민주투사 코스프레’

    SNS 지적으로 퇴화된 정치선전장

    강용석 의원.

    광우병 촛불시위 이후 ‘집단지성’ 따위의 논리로 대중에게 아부하는 지식인이 급속히 늘어났다. 한 경제학자는 미네르바를 경제스승으로 극찬하며 가뜩이나 금융위기로 궁지에 몰린 경제학자의 값어치를 더욱 떨어뜨렸다. 지식인들이 자정 역할을 포기함으로써 인터넷 세계의 편향은 한층 심각해졌다.

    그렇다면 보수진영은 왜 SNS에 취약할까? 단순히 노령층이 주축이라는 이유만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 최근 무소속 강용석 의원은 진보진영을 상대로 발군의 전투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 한 사람이 거대 여당 전체 의원보다 돋보일 정도다. 물론 이런 전투력의 비밀에는 성희롱 파문으로 그 자신 정치적 궁지에 몰린 것도 관련이 있다.

    다소 막가는 형태로 보이겠지만 SNS의 바다에 떠다니기 위해서는 필히 그렇게 선정적으로, 필사적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꼼수의 인기가 이를 증명해준다. 김어준은 스스로를 ‘잡놈’으로 정의한다. 현재 진보라는 미명하에 SNS를 떠돌아다니는 정보가 대체로 이 수준이다. 그런데도 보수진영은 전통문법을 고수함으로써 젊은 세대와의 단절을 불렀다.

    이외수, 공지영 같은 통속작가가 SNS세계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도 주목할 부분이다. 문학을 통속과 순수의 이분법으로 나누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일이다. 그럼에도 그들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데 통속작가라는 표현만큼 정확한 것은 없다. 통속은 말 그대로 속된 것과 통한다는 의미다. 이들의 공통점은 늘 작품 외적인 요인으로 독자의 관심을 끈다는 점이다.

    이외수는 김근태가 고문당하던 1980년대에 중광, 천상병 등과 어울려 다니며 기인(奇人) 코스프레를 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 그는 뜬금없이 철 지난 민주투사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 하지만 전후과정을 알지 못하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그는 가장 쿨한 노인으로 평가받는다.

    소설가는 소설을 쓴다

    공지영은 또 어떤가. 그는 소설 못지않게 사생활로 대중의 관심을 받았다. 한 여성 문학평론가는 공지영의 작품에 대해 “운동권 경력을 활자로 남기고 싶어하는 욕망이 배면에 깔려 있다는 의혹을 떨치기 힘들다”고 평했다. 의식 있어 보이는 행동으로 평단의 인색한 평가를 뒤집고자 하는 공지영의 노력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최근에는 후쿠오카-서울행 비행기에서 한미FTA 비준에 찬성하는 대화를 나누던 부인들이 일등석으로 가더라는 글을 올려 입방아에 올랐다. 네티즌들의 확인 결과 한국과 일본을 오가는 비행기 어디에도 일등석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를 통해 공지영은 ‘소설가는 트위터에서도 소설을 쓴다’는 교훈을 남겼다.

    2011년 정가를 뒤흔든 안철수 신드롬도 근원을 추적하면 예능 프로그램에서 출발한다. 과거 노회한 정치인들이 맡던 킹메이커의 역할을 이제 강호동 같은 예능 프로 MC가 대신한다. 위력을 실감한 잠룡들은 너도나도 예능 프로로 달려가 젊은이들 앞에서 ‘소통’이라는 이름의 재롱을 떨기에 바쁘다.

    폴리테이너들의 득세도 주목할 만하다. 웃길 줄 모르는 개그맨, 존재감 없는 배우, 표절 여가수는 트위터에 쓴 글 한 줄로 하루아침에 개념 인사로 둔갑한다. 주류 언론은 이를 다시 기사화해 논란을 증폭시킨다. 이들은 대중적 관심이 시들해지지 않도록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탄압받는 모양새를 취한다.

    이런 배경에는 진보진영이 만들어낸 ‘소통의 신화’가 존재한다. 그들은 이명박 정권 출범 후 소통 부재를 내세우며 공격에 나섰다. ‘불통’의 비난에 시달리는 이명박 대통령은 시민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여지없이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거나 하트 모양을 만드는 행동을 한다. 이렇게 여중생이나 할 법한 보디랭귀지를 일국의 대통령이, 그것도 70대 노인이 눈물겹도록 반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이 소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마치 소통의 달인이었던 듯 조작된다. 그의 임기 말 지지율은 IMF 외환위기 이후 김영삼 전 대통령의 지지율보다 낮았다. 그만큼 민심이반이 심각했다. 그의 소통방식은 야인 시절에는 소탈함으로 평가받았지만 권좌에 있을 때는 지지자들도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아마 노인들이 웹상에 젊은이들이 써놓은 글들을 꼼꼼히 확인한다면 기가 막힐 것이다. 인터넷 세상이 현실과 분리된 또 다른 세계라고 하는 것은 현실세계의 상식과 비상식이 뒤집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보수와 진보의 시각 차이와는 다르다. 사실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아니라 사실 자체가 왜곡되어 있다.

    구술문명과 문자문명

    보수 세력이 IMF 외환위기를 일으켜 경제를 망쳤다는 명제가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정사(正史)로 인정받는다. 마치 이전까지 대한민국이 서유럽처럼 조상을 잘 만나 원래 잘 먹고 잘살던 나라인 줄 안다. 박정희의 경제개발 업적에 대해서는 그 시절 피땀 흘려 일한 국민의 몫이라고 주장하면서도 IMF 외환위기 극복은 철썩같이 김대중 대통령의 공이라고 우긴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양립이 불가능한 명제임을 알 수 있지만 그것이 모범답안처럼 떠돌아다닌다.

    아무리 젊은 학생일지라도 바로 지난 정권의 일은 기억할 법도 한데 그 또한 어림없다. 대학생들의 등록금이 가파르게 상승했던 노무현 정권 시절은 태평성대였던 듯이 말하고, 정책적으로 별 차이 없는 이명박 정권을 향해서는 저주를 퍼붓는다. 덕분에 지난 정권에서 한미FTA와 제주도 해군기지 건설에 앞장섰던 세력이 고스란히 말을 뒤집어도 박수를 받는다.

    현재 한국의 대학 진학률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통계상으로만 본다면 고등교육을 받은 지금의 젊은이들이 선배 세대보다 더 똑똑해야 옳다. 하지만 현실은 젊은이들의 지적 퇴화가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다. 일본의 논픽션 작가 다치바나 다카시는 1990년대 후반 도쿄대학 강연에서 이미 일본 젊은이들의 지적 퇴화 현상을 경고했다. 이런 우려는 인터넷 시대가 만개한 현재 전 세계적으로 제기된다.

    한국 젊은이들의 지적 퇴화 현상을 의외로 잘 설명해주는 인물은 좌파논객 진중권이다. 그는 월터 J옹의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이론으로 이를 설명한다. 서구사회가 인쇄술의 발명 이후 문자문화 시대로 이행한 것과 달리 한국은 광복 직후까지 문맹률이 90%에 달하는 구술문화시대에 머물러 있었다. 광복 후 의무교육이 실시되면서 문맹률은 세계 최저 수준으로 낮아졌지만 문자문화가 채 정착되기도 전에 인터넷 시대가 열리면서 다시 구술문화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는 것이다. 덕분에 인터넷에 익숙한 대학생들의 과제물은 틀린 철자법으로 가득하다고 한다. 영어나 한문이 아니라 그들의 모국어인 한글 철자법 말이다.

    최근 뇌 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인터넷이 사용자의 뇌구조 자체를 변화시킨다고 한다. 게임중독이 뇌에 미치는 영향은 마약중독과 유사하다. 대부분의 인터넷 독자는 심한 집중력 저하를 경험한다.

    여기에는 구글과 같은 인터넷 업체의 상업적인 목적도 결부되어 있다. 오프라인 매장이 회전율을 높여야 하듯이 구글의 수익은 사용자들을 이 페이지에서 저 페이지로 가능한 한 빨리 이동시키는 데서 나온다. 구글의 디자인은 이런 용도로 최적화되어 있다.

    장문 혐오 현상

    이런 시스템에 익숙해진 독자들은 장문을 혐오하게 된다. 이는 긴 글에 적합한 블로그의 인기 하락과 짧은 글 위주의 트위터의 인기 상승으로 나타나고 있다. 최근 젊은이들이 사용하는 게시판에서는 세 줄 요약이 유행이다. 장문의 정보를 올리면 욕설과 불만이 폭주하기 때문에 기껏 공들여 써놓고도 다시 친절하게 세 줄로 요약해줘야 한다.

    종이신문이라면 앉은 자리에서 한 부를 정독할 수 있는 사람도 온라인 신문에서는 기사 하나를 차분히 읽기가 쉽지 않다. 이는 본질적으로 종이책과 전자책이 전혀 다른 매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종이책 읽기는 선형적인 독서과정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을 통해 정보를 얻는다.

    진화론으로 볼 때 인간의 두뇌는 주변의 포식자들을 경계하게끔 주의력이 바깥을 향한다. 사내아이들에게서 주로 발견되는 ADHD는 과거라면 훌륭한 사냥꾼이자 전사의 자질이다. 반면 주변의식을 내면으로 거둬들여 장시간 하나의 주제를 따라가는 전통적 독서는 인류가 도달한 최고의 집중행위였다.

    인터넷 글 읽기는 비선형적 방식이다. 인터넷으로 글 읽는 사람의 시선을 추적하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스크린상의 문자를 이미지화해서 스캐닝하는 방식의 독서를 한다. 그 과정에서 정보에 대한 선호도가 뚜렷이 작동한다. 조금만 지루하면 곧장 건너뛰고 자신이 원하는 정보만 편향적으로 습득한다.

    최근 트위터 세상에서 좌파진영과 전투를 시작한 변희재는 트위터가 지적 수준을 퇴화시킨다고 단호히 주장한다. 지난 서울시장 보궐선거 당시 트위터로 진보진영의 전투를 지휘했던 조국은 현재 트위터 활동을 중단했다. 생업과 트위터 활동의 병행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스마트폰과 SNS의 폭발적 보급은 트위터와 같은 온라인에 상시 접속하는 환경을 만들고 있다. 자연히 젊은이들의 집중력과 인내력을 앗아간다.

    식민지 된 20대

    젊은 세대의 지적 퇴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군이 진보진영의 30대 기자들이다. 나꼼수의 일원이자 ‘시사IN’ 기자 주진우를 포함해 또 다른 시사IN의 고재열, 한겨레의 허재현 기자 등이다. 이들의 이름은 노년층에겐 낯설겠지만 젊은 세대 사이에선 공중파 방송의 메인뉴스 앵커만큼이나 유명하다. 그도 그럴 것이 거대 포털사이트가 이들의 트위터를 실시간으로 띄워주고 있다. 하지만 큰 목소리에 비해 콘텐츠의 독창성, 사실의 엄밀함은 언론인이나 지식인이라고 불러주기에 민망할 정도다. 이들이 주목받는 것은 오히려 사실을 무시한 막가파식 폭로와 맹목적 진영 이기주의에 있다.

    주진우는 ‘아니면 말고’ 식 정보를 유통시키는 대표적 예다. 그는 지난해 10월 박정희 관련 출판기념회에서 박정희가 1964년 독일 방문 당시 뤼브케 대통령을 만나지도 못했다는 황당한 주장을 했다. 비록 그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긴 하지만 팩트를 확인하는 기자의 기본조차 갖추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서울시장 보궐선거 때는 나경원 1억 피부과 괴담을 퍼뜨리며 아예 진보진영의 칼잡이로 나섰다. 이들에게 사실을 바탕으로 하는 전통적인 기자정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을 왜곡해서라도 자기 진영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

    SNS 지적으로 퇴화된 정치선전장

    SNS는 젊은 층의 지적 수준을 B급으로 떨어뜨릴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웹상의 팔로어들은 현실세계에서도 추종자 신세를 면치 못한다는 점이다. 지난 2월 5일 민주통합당 1970년대생 후보자들은 4월 총선에서 후보직 10% 할당과 당내 경선 시 20% 가산점, 전략공천 50% 배정을 요구했다. 소수자 우대원칙을 적용하지 않으면 당내의 1970년대생이 도태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장면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현상이다. 최근 치러진 몇 번의 선거에서 반(反)정부여당, 친(親)야당 성향의 몰표를 던진 것이 이 세대 유권자들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의 표심은 도대체 어디로 향한 것일까?

    10여 년 전 30대 정치인들의 정치권 진입이 활기를 띠었다. 386세대는 2000년 총선을 시작으로 2004년 총선에서 원내에 진입, 집권세력의 요직을 차지했다. 현재 젊은 정치인들의 진입을 가로막는 세력은 바로 이들이다. 3김 세대가 젊어서는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다 80대에 들어서야 자신의 시대를 접었듯 현재의 386세대도 장기집권할 확률이 높다.

    문제는 386세대와 ×세대로 불리는 1970년대생 간의 이해관계가 다르다는 것이다. 직장 내에서 386세대와 X세대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관계로 만난다. IT업계에서는 독점기업과 하도급업체로 대립한다. 그런데도 X세대 유권자들은 부지런히 386세대의 정치인들에게 표를 던지고 있다. 이 두 세대의 운명을 가른 것은 지적 역량의 차이다.

    386세대가 한국 사회에서 파워집단이 된 것은 한편으로 당연한 일이다. 이들은 학창시절 치열하게 독서했던 마지막 세대이자 현 정보통신산업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세대다. 거대 IT기업의 창업자가 전부 386세대라는 것은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언뜻 자본가의 물이 배었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자세히 보면 그렇지도 않다.

    학창시절 겁이 나서 데모 한번 못해봤다는 안철수가 지난 서울시장 출마소동 당시 드러냈던 역사인식을 떠올려보라. 거대 포털사이트들은 진보언론을 눈에 띄게 편집한다. 학생운동을 안 했으면 안 한 대로 죄책감 때문에, 선두에 섰던 자들은 보상심리 때문에 끊임없이 그 시대의 주장을 확대재생산한다. 결과적으로 이들이 오프라인에서 획득한 역사관은 고스란히 온라인 세계의 정설로 이어진다.

    나꼼수 팬이 깨어 있는 시민?

    이런 현실은 참으로 걱정스럽지 않을 수 없다. 학원가에서 편향된 생각을 전파하는 386강사들을 보면 기성세대는 혀를 찬다. 그런데 386세대의 영향권에 든 것은 10대 청소년이나 20대 대학생만이 아니다. 30대도 이들의 지적 식민지로 전락한 것이다. 이들이 지나온 과거를 보면 1990년대부터 한국 사회에 지적 퇴조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의 30대들이 대학생활을 할 때는 인터넷 문화의 원형이라 할 PC통신이 등장했다. 출판시장에서는 사회과학 서적과 대하소설이 퇴조하고 하루키, 신경숙, 공지영 소설이 유행했다. 더 이상 진지한 주제는 자리를 잡을 수 없었다. 이 시기를 가리켜 ‘근대문학의 종언’의 시대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지적 전통의 종언’ 시대였다. 나꼼수와 같은 B급 콘텐츠에 가장 열광하는 것도 바로 이들이다.

    진보진영은 보수진영을 향해 수구꼴통이라고 비난한다. 이런 도식은 과거 군사정권 시절 지식인들이 민주화투쟁에 나서고 촌로들이 여당에 몰표를 던지던 시절 얘기다. 냉정히 지적 수준으로 평가하자면 오늘날 진보진영이 그렇게 비난할 자격이 있을지 모르겠다. 수구라는 비난은 몰라도 꼴통이라는 호칭은 진보진영에 돌려줘야 할지 모른다.

    나꼼수의 팬들은 스스로를 깨어 있는 시민이라고 자처한다. 하지만 최근 나꼼수 진행자들의 성희롱 문제가 제기되고 성인용품을 판매한 김어준의 과거가 구설에 오르자 패닉 상태에 빠져드는 모습이다. 하지만 김어준은 일관되게 B급 문화를 옹호했다. 자가당착에 빠져든 것은 나꼼수의 팬 자신들이다. 이들은 황색언론과 사실을 구분하지 못했고, ‘부러진 화살’ 같은 영화를 다큐멘터리와 구분하지 못했다. B급 콘텐츠의 난무는 무지하고 오만한 대중을 탄생시키며 사회 전체를 하향 평준화하고 있다.

    토머스 프리드먼은 10여 년 전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에서 ‘초강대 개인’의 등장을 예고했다. 이는 SNS의 등장으로 실현되고 있다. 거대 팔로어를 이끄는 트위터리안은 그 자체로 하나의 언론이고 권력이다. 지적으로 퇴화된 B급 시민의 탄생으로 가장 이득을 얻는 것이 바로 이들이다.

    그런데 만일 주식시장의 작전세력처럼 이들이 연대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2008년의 광우병 사태는 바로 그런 시나리오가 현실화된 순간이었다. 대한민국 정도 되는 나라에서 광우병 같은 거짓 정보로 수도(首都)가 한 달 이상 마비된 사례는 없다. 지금 우리 사회는 과잉 네트워크의 시대에 사고감염의 실험실이 되고 있다.

    ‘피리 부는 사나이’ 우화

    과거 한 주한 미국대사는 한쪽으로 쏠림이 심한 한국인의 성향을 들쥐 근성에 비유해 파문을 일으켰다. 당시 미국대사가 언급한 동물은 레밍이라는 설치류로 알려져 있다. 레밍은 집단자살을 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동화 ‘피리 부는 사나이’의 소재로 사용됐다. 과거에는 레밍의 집단자살을 개체수 조절을 위한 자발적 행동으로 보았다. 현대 동물학자들은 군중심리에 의한 자기파괴 행동으로 본다. 한 마리가 떠밀려 물에 빠지면 뒤에 오던 집단이 함께 투신하는 것이다. 무척이나 어리석은 행동 같지만 레밍효과는 인간세상에서도 고스란히 발견된다. 주식시장에서 번번이 손실을 보는 개미들이야말로 그 전형이다.

    유달리 쏠림현상이 심한 한국 사회에서 우리는 지금 피리 부는 사나이들의 출현을 지켜보고 있다. 도대체 그들이 젊은이들을 이끌고 가는 곳은 어디일까? 이미 한국 사회는 박원순 서울시장의 탄생으로 또 다른 차원으로 진입하고 있다. 그동안 권력의 감시자 역할을 했던 시민단체가 스스로 권력집단이 되고 있다.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부패한다는 점에서 이제 그들에 대한 감시가 필요하다. 하지만 강용석 의원이 제기하는 숱한 의혹에 대해 박원순은 침묵으로 대신하고 있다. 과연 그들은 비판과 감시의 치외법권 지역에 존재하는 자들인가, 아니면 순결한 무오류의 존재들인가?

    과잉 네트워크의 시대에 이 사회는 새로운 시민의 역할을 요구하고 있다. 감시자를 감시하고, 비판적 지식인을 비판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 깨어 있는 시민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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