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호

“우리는 의사다 환자를 돕고자 탈레반과도 손잡는다”

분쟁지역의 의료봉사자

  • 김영미| 분쟁지역 전문 저널리스트

    입력2012-02-22 11: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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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사들의 고귀한 노력, 희생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사람을 살려내고 있다. 의료진은 반군의 공격을 받아 목숨을 잃기도 한다. 의사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납치다. 고수입 직업군이라는 인식 탓에 표적이 된다. 일부 무지한 부모는 아이가 주사를 맞으면 기독교 신도가 된다고 믿는다. 종교, 이념을 초월해 병자를 돌보는 하얀 가운을 입은 천사들의 이야기.
    “우리는 의사다 환자를 돕고자 탈레반과도 손잡는다”

    2010년 4월 22일 아프가니스탄에서 화상을 입고 병원을 찾은 생후 6개월 된 여아를 한국 의료진이 정성스럽게 치료하고 있다.

    2008년 12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이스라엘군의 폭격으로 사방이 아수라장이다. 전장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시파병원으로 부상자가 밀려든다. 머리와 팔을 다친 채 피를 뚝뚝 흘리는 어린아이, 하반신이 사라진 젊은 청년이 병원 복도에 널브러진다. 환자가 이 병원으로 밀려든 건 외국인 의사들이 일하는 터라 전쟁 통에도 치료를 받을 수 있어서다. 노르웨이 출신 의사 한 명이 복도에서 피를 흘리는 아이의 머리를 치료한다. 밖에선 포성이 요란하다. 의사를 찾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린다. 중상 환자가 시간이 흐를수록 많아진다. 의사들 얼굴에 피로가 가득하다. 이스라엘 전투기가 병원과 구급차를 폭격한다. 구급차 4대가 부서진다. 의사, 자원봉사자가 각각 3명 숨졌으며 폭격으로 인해 응급실이 무너졌다. 그래도 의사들은 흔들리지 않고 단 한 명이라도 더 치료하려는 듯 동분서주한다. 노르웨이에서 온 에릭 포쉬의 가운은 피로 얼룩져 있다. 그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면서 말한다.

    “며칠째 폭격이 멈추지 않아요. 이대로 가단 의약품이 동날 텐데 외국으로 가는 국경마다 전투가 벌어져 약품 수송이 원활치 않아요. 의약품 수급이 걱정입니다.”

    “이보다 더 나쁠 수 없다”

    이 병원에는 10명 넘는 외국인 의사가 일한다. 어느 나라건 의사는 먹고사는 걱정을 별로 하지 않는 안정된 직업이다. 보장된 길, 편한 인생을 마다하고 전쟁터에서 목숨 걸고 환자를 돌보는 의사가 적지 않다. 전쟁 지역은 의사가 절실히 필요하게 마련이다. 2000년대 들어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두 곳에서 충돌이 동시에 일어나 의사 수요가 폭발했다. 아프가니스탄은 전쟁 전부터 의료 환경이 좋지 않았던 데다 전쟁 중 부상자가 늘면서 의료 환경이 최악인 곳이 됐다. 구호단체를 통해 입국한 의사들의 노력으로 수도 카불에는 의료시설이 늘어났으나 의약품, 의사는 지금도 부족하다. “아프가니스탄의 의료와 교육 서비스는 여전히 이보다 더 나쁠 수 없다”고 구호단체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아프가니스탄 구호조정기구(ACBAR)에서 일하는 안네 가렐라는 지난해 인터뷰에서 “의사와 의약품은 부족한데 병원을 찾는 사람은 많다”고 말했다.

    구호단체의 전설 탐 리틀



    카불 같은 대도시는 사정이 그나마 낫다. 지방은 눈뜨고 보지 못할 만큼 참혹하다. 아프가니스탄 14개 주에서 실시한 면접조사는 병원에서 출산을 위해 필요한 비용 5달러를 지불할 능력이 없어 집에서 아기를 낳다 죽은 산모와 신생아가 적지 않다고 밝힌다. 아프가니스탄 산모사망률(MMR)은 10만 명당 1600명(이하 2010년 기준). 카불은 산모 10만 명당 400명이 사망하지만 바닥샨 주 같은 곳은 10만당 6500명이 죽어 지금껏 통계로 기록된 산모사망률 중 세계 최악이다. 아프가니스탄 보건복지부 국장급 간부 하미온 사피르의 설명이다.

    “의사와 의약품, 의료 장비 부족 탓이다. 숙련된 산부인과 전문의와 초음파 장비가 필요하다. 카불에서조차 산모를 돌보는 의사가 부족하다. 산부인과 전문의가 있긴 하지만 밀려드는 총상 환자, 폭탄테러 환자를 돌봐야 하는 처지여서 산모, 신생아는 뒷전으로 밀려난다.”

    미국인 안과의사 탐 리틀(61)은 40여 년간 아프가니스탄에서 의료 봉사를 해온 베테랑. 그는 IAM(International Assistant Mission) 소속 의사인데, 이 단체는 1966년부터 아프가니스탄에서 의료와 교육 봉사 활동을 해왔다. 탐은 40년 넘게 아프가니스탄에서 온갖 험한 일을 겪으며 환자를 돌봤다. 아프가니스탄 구호단체의 전설이자 대부로 통한다. 현지어도 능통하다. 100여 발의 로켓포가 떨어질 때도 그는 진료를 멈추지 않았다. 2007년 초 카불에서 만난 그는 “나는 거의 아프가니스탄 사람이다. 가족 모두가 이곳에 살고 있다. 환자를 돌보면서 우리 아이들을 키웠다”면서 이렇게 청했다.

    “누구라도 좋아요.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없는 이들에게 도움을 준다면 어떤 것이라도 감사히 받겠습니다. 진통제 한 알이 귀해요. 이곳에 오고 싶은 의사가 있다면 꼭 소개해주세요.”

    그는 아프가니스탄 오지에 살면서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이들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카불에 사는 사람들은 병원이 가까이 있지만 산간이나 오지의 가난한 이는 진료를 받으러 카불까지 올 수도 없거니와 오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병에 걸리면 그저 알라가 하시는 일로 받아들이고 맙니다.”

    그는 가난한 환자를 돌보려 왕진 가방을 들고 지방으로 간다. 동료 의사와 함께 시골 지역을 방문해 진료를 해왔다. 2010년 8월 6일의 일.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시골 진료를 마치고 카불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아프가니스탄 북부 산악 지역에서 2주간 병자를 치료했다. 동료 의사 아홉 명과 함께였다. 의료진이 바닥샨주-누리스탄 주 경계에 이르렀을 때 두건을 쓰고 총을 든 괴한들이 탄 차량이 나타났다. 그들은 탐 일행의 차를 세우고 모두 내리라고 지시했다. 이윽고 의료진을 숲으로 끌고 가 한 줄로 서게 했다. AP에 따르면 총을 겨눈 괴한에게 탐은 현지어로 침착하게 말했다.

    “우리는 의사예요. 진료하고 오는 길입니다.”

    탐의 설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괴한은 즉결 처형을 시작했다. 여성 3명을 비롯한 의료진은 모두 사망했다. 미국인(6명)·영국인(1명)·독일인(1명)·아프가니스탄인(2명)이 죽었다. 여느 나라 분쟁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최악의 의사 사망 사건이다. 의사를 죽인 괴한들은 탈레반. 사건 발생 직후 탈레반 대변인 자비훌라 무자헤드는 “어제 오전 8시쯤 우리 순찰대가 스파이로 활동하던 외국인 선교사를 발견해 모두 사살했다”고 발표했다. 탈레반은 탐과 그 일행을 성경을 들고 다닌 스파이라고 규정했다. 의료진이 성경책을 가진 건 사실이지만 기독교인이 대체로 그렇듯 고통스러운 환경에서 위안을 얻고자 성서를 소지한 것으로 보인다. 탐이 속한 IAM의 더크 프랜스 사무국장은 “봉사단은 진료를 했지 스파이 활동은 하지 않았다”고 강변했다. 탈레반은 탐 일행이 스파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탈레반은 왜 아프가니스탄에서 꼭 필요한 의사를 살해했을까. 배경에는 9·11테러 직전 카불에서 벌어진 한 사건이 있다. 2001년 여름 탈레반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을 때 SNI 연합이라는 구호단체가 아프가니스탄에서 활약했다. 이 단체 소속 독일 선교사가 사람들에게 예수 일대기를 다룬 영화를 보여주다 당국에 적발됐다. 아프가니스탄 언론은 이들이 선교를 위해 들어온 기독교인이라고 보도했다. 이윽고 탈레반 정부는 모든 외국인 구호단체를 추방했다. 이 사건 이후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외국 구호단체는 모두 기독교 선교 집단이라는 선입관이 생겼다.

    알라가 주는 고통

    탐과 함께 희생된 의사 중에는 영국인 외과의사 캐런 우(36)도 있다. 그는 22세 때 의과대학에 진학해 호주, 파푸아뉴기니, 남아프리카공화국, 트리니다드 토바고에서 의료 봉사를 한 훌륭한 의사다. 그는 결혼 날짜를 받아놓은 상황에서 연봉 15만 달러의 의사 직을 버리고 2010년 카불로 날아왔다. 또 다른 희생자 토머스 그램스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통증을 멈추는 의사’로 소문난 치과의. 치과장비를 야크에 매달고 히말라야 산맥 중턱까지 올라가 치료 활동을 하기도 했다. 여성이 외간 남성 앞에 나설 수 없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부르카를 입은 여성의 충치를 치료하려면 남편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그는 남자들을 설득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가 의료 봉사에 나서게 된 것은 글로벌치과구제(GDR) 설립자 로리 매튜를 만나면서다.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에게 치통은 알라가 주는 치료할 수 없는 고통이다. 치과 치료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치통에 시달리며 살아야 한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치통을 잊게 하는 묘약은 아편이다. 그램스는 이곳에서 놀라운 의사였다. 카불프레스에서 일하는 라힘이라는 이름의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램스가 진료 가방을 내려놓으면 이 아픈 사람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상당수의 아프가니스탄인은 이를 치료하는 의사가 세상에 있다는 사실을 그를 통해 처음 알았다. 예전엔 치통을 신의 영역으로 여겼다. 그램스에게 진료받은 이들은 인간이 이를 아프지 않게 할 수 있다는 걸 신기해한다. 그램스는 주민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알게 해준 훌륭한 치과의사다.”

    ‘닥터 서’의 살신성인

    “우리는 의사다 환자를 돕고자 탈레반과도 손잡는다”

    2010년 12월 25일 파키스탄 북부 페샤와르 지역의 한 병원에서 자살폭탄 테러로 다친 환자가 치료를 받고 있다.

    그램스 같은 의사들이 불귀의 객이 된 것은 아프가니스탄에 손실이다. 카불대 파쉬르 교수의 견해는 이렇다.

    “아프가니스탄은 기독교로 종교를 바꾸면 사형을 선고하는 근본주의 이슬람교 국가다. 외국인은 ‘탈레반이 무도하더라도 설마 생명을 지키는 의사까지 죽이기야 하겠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아프가니스탄을 잘 모르는 서구의 시각이다. 생명을 다루는 의사일지라도 기독교인이면 탈레반에게 스파이이자 적이다.”

    한국인 서기용(54) 씨도 IAM 소속으로 1997년부터 아프가니스탄에서 탐과 함께 아픈 이를 치료했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에 위내시경을 처음 도입한 의사로 유명하다.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위내시경을 하려면 파키스탄까지 가야 했다. 필자는 그를 기억하는 이를 여럿 만났다. 직접 치료를 받았거나 소문을 들어 명성을 아는 사람이었다. 스핀자르호텔 지배인 굴 아하마드는 내가 한국인임을 알자 “닥터 서를 아느냐”고 물었다. 그는 “나의 친척은 차로 15시간이나 걸려 여기까지 와서 닥터 서에게 진료를 받고 위장병을 완치했다. 아직도 우리 가족은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고 말했다. 서 씨는 9·11 이후 아프가니스탄 남부로 이동해 우르즈간 주의 키사오라는 지역에서 작은 병원을 세웠다. 우르즈간 주는 산악 오지다. 그런 곳에서 변변한 지원금도 없이 진료하는 한국 의사가 있다는 게 믿기 힘들었다. 더구나 그곳은 탈레반의 본거지로 외국인이 거의 없는 곳이다.

    그가 병원을 열자 탈레반은 병원에서 진료받는 것을 거부했다고 한다. 2002년 초 그는 탈레반 지역사령관을 직접 만나 병원에 대한 협조를 요청했다. 사령관은 “우리는 지금 카르자이(대통령)와 미군 때문에 일시적으로 머리를 숙이고 있지만 구호단체를 거부한다. 구호단체가 오면 뒤를 이어 미국 놈들이 들어오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탈레반이 협조하지 않는 상황에서 한국에선 더 이상 쓰지 않는 낡은 의료 장비를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여왔다. 한국에서 파키스탄으로 장비를 보내 육로로 국경을 통과한 후 카불로, 다시 남부 칸다하르로 이송하고 그것을 키사오로 옮겼다. 이렇게 도착한 장비는 엑스레이 기계, 피검사 장비, 위내시경 및 초음파 기구다. 복잡하지 않은 수술이라도 할 수 있어야겠단 생각에 병원을 개원했다고 한다. “월 3000달러를 가지고 병원을 운영했을 만큼 어려웠어요. 의사로서 참으로 보람 있는 일이었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가 병원을 개원한 것은 의사로서의 사명 없이는 불가능했던 일이다.

    위험한 상황도 있었다. 2005년 그는 병원에서 차로 두 시간 떨어진 어느 시장에서 반군의 총격을 받았다. 그는 무차별로 총질하는 반군을 피해 차 밑바닥으로 기어들어갔다고 한다. 운전기사가 차를 세우라는 정지명령을 듣지 못해 벌어진 사소한 오해였다. 그는 운전기사를 죽이겠다는 반군 지휘관에게 한 번만 봐달라고 사정했다고 한다. 그의 회고다.

    “상대방의 수염을 만져주면서 용서를 비는 것이 아프가니스탄 문화예요. 탈레반의 수염을 만지며 빌고 또 빌었습니다. 그래서 잘 해결됐지만 아찔했던 순간입니다.”

    그는 이동 진료도 나섰는데 병원으로 되돌아가는 ‘피의 고개’(아프간 남부의 헬만 주와 우르즈간 주 경계에 있는 고개이름)를 넘을 때마다 무섭고 긴장했다고 한다. 목숨을 걸고 의료 봉사를 하는 까닭이 뭐냐고 우문을 던졌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언젠가 병원에 콜레라를 앓는 아주머니 한 분이 오셨는데 그분을 살리고자 수액 30병을 하루 종일 투여했습니다. 모두가 죽으리라고 생각하던 그 아주머니가 살아나서 무척 기뻤어요. 의술을 가진 사람으로 행복을 느꼈지요.”

    그는 지금 아프가니스탄을 떠나 있다. 2007년 샘물교회 신도 납치 사건 탓에 정부가 철수를 요청하면서 진료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큰 병원을 새로 지었고 병원 장비도 보완했는데 그것을 다 놔두고 떠나야 했습니다. 다시 돌아가 사람들을 진료하고 싶어요.”

    의약품과의 전쟁

    필자는 우르즈간 주 탈레반 사령관 중 하나인 물라 하미르 하카니에게 서 씨의 활동과 관련해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는 서 씨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우르즈간을 통틀어 외국인 의사는 그가 유일했다.

    “우리는 그를 해칠 생각이 없었다. 한국 닥터가 떠난 후 사람들은 그에 대해 많이 이야기한다. 다시 그가 돌아온다면 우리는 우리의 규칙 안에서 그를 보호할 것이다.”

    서 씨는 언제쯤 아프가니스탄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

    2003년 이라크 전쟁이 발발한 뒤 바그다드의 병원은 중상 환자로 가득했다. 구호단체들이 몰려왔지만 지원의 손길은 턱없이 부족했다. 10년 넘는 경제 제재 탓에 이라크 의사들이 해외로 빠져나간 상황이었다. 아랍어권인 리비아나 예멘, 운이 좋은 이들은 가족 전체가 캐나다나 호주, 영국 등지로 이민을 떠났다. 이 판국에 전쟁까지 벌어지니 의사가 절대 부족했다. 바그다드 야르무크병원 피부과 전공의 모피트 함다니(42)는 하루 24시간 중 20시간을 진료해도 환자 수는 매일 늘어갔다며 “나는 피부과 의사지만 정형외과에 더 능통하다. 나를 비롯해 거의 모든 의사가 폭격이나 총상을 입은 환자들을 셀 수 없이 접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미국 정부가 이라크 재건을 위해 기초 진단장비, 사무기기, 실험기기, 약품 등 60여 종류의 헬스케어 키트를 공급했으나 막상 환자를 볼 의사가 부족했다.

    바그다드 외곽으로 나가면 지금도 의사는 물론이고 의약품도 부족하다. 이라크 북부 키르쿠크의 내과 병원에서는 마취제가 없어 의사들이 환자의 환부를 수술하지 못한다. 이 병원에서 12년째 진료하는 심장 전문의 알리 주베디(53)의 증언은 충격적이다.

    “나는 의사라는 직업에 회의를 느낍니다. 시장에서 폭탄이 터져 실려온 20대 여성 환자가 있었습니다. 배 속에 파편이 깊숙이 박혔어요. 출혈을 계속해 파편을 꺼내고 봉합해야 하는데 마취제가 없었습니다. 환자에게 살고 싶으면 어쩔 수 없으니 참으라고 말하고 입에 수건을 물렸어요. 그리고 수술 칼로 배를 갈랐습니다. 환자는 고통이 심해 기절을 반복했습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병원까지 침입하는 무장세력

    주베디가 일하는 병원은 지금도 의약품과의 전쟁을 치른다. 항생제가 모자라 병상마다 악취가 진동하고 소독약이 부족해 자르지 않아도 되는 손발을 절단하는 환자가 생긴다. 주베디를 비롯한 의사들이 외국인 구호단체를 찾아가 약품을 구해왔지만 2011년 미군이 철수한 후에는 구호단체 수가 크게 줄었다. 이라크 치안 상황이 아직 위험한 터라 미군이 떠나자 외국 의료진도 철수한 것이다. 우리 돈으로 불과 몇 백 원, 몇 천 원짜리 의료기구가 없어 죽어가는 환자도 많다. 지난해 수인성 전염병이 유행해 어린아이들의 피해가 컸다. 쉽게 치료할 수 있는 병을 앓는 아이들이 살균 처리된 주삿바늘이 없어 치료 중 감염돼 죽어나가고 산소마스크가 부족해 의사가 플라스틱 튜브를 통해 입으로 산소를 공급하는 경우도 있다.

    이라크 의사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납치다. 고수입 직업군이라는 인식 탓에 몸값을 노리는 납치범의 표적이 된다. 바그다드의대 학장을 비롯해 명망 있는 의사가 납치돼 거액의 몸값을 치르고 풀려나거나 살해당했다. 키르쿠크에서 개인 병원을 은영하던 사메르 고르지스 유시프(55)는 재작년 응급환자를 치료하고자 왕진을 다녀오다 납치범에게 끌려갔다. 납치범은 그의 가족에게 50만 달러를 요구했다. 29일간의 협상 끝에 10만 달러를 지불하고 풀려났다. 그는 억류기간에 구타를 당해 심한 부상을 입었다. 가족들이 경찰에 이 사실을 알리지 않은 것은 납치범 중 경찰도 끼여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 시스템이 무너져 벌어지는 일이다. 북부의 모술에서는 납치범들이 범죄를 저지를 때 경찰 순찰차를 동원하는 일도 일어났다. 한 종합병원 의사가 납치됐는데, 황당하게도 납치범들은 현지 경찰이었다. 이 의사 역시 해외에 있는 친척의 도움으로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다.

    이런 상황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라크를 떠나는 것이다. 유시프는 요르단으로 옮겨갔다. 이라크 의사협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약 3만2000명에 달하는 의사 중 전쟁 발발 이후 지난해까지 1만3500명가량이 이라크를 떠났다. 이라크 병원에서 지위가 높던 의사들은 영국, 미국으로 갈 수 있었다. 한 이라크 의사는 2007년 BBC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의사들은 떠나고 약품은 없다. 무장세력이 병원에까지 침입하고 있다.”

    이라크 북부 사마라에 위치한 알 만수르 병원은 의사 20여 명이 근무하는 준(準) 종합병원이었다. 2008년 필자는 당시 발생한 폭탄 테러를 취재하고자 이 병원을 방문했다. 그런데 병원에는 의사가 단 한 명도 없고 환자 수십 명이 신음하고 있었다. 팔다리가 잘린 환자가 있는가 하면 머리에 구멍이 나 피를 흘리는 환자도 있었다. 의사는 어디 갔느냐고 물으니 한 환자가 “내가 당신에게 물어보고 싶은 말이다. 폭탄 사고가 난 지 다섯 시간이 흘렀는데 아무도 안 나타난다. 그 사이 내 옆에서 두 명이 죽었다. 빨리 의사를 불러오지 않으면 여기 있는 모두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우여곡절 끝에 환자들은 바그다드로 이송됐지만 바그다드라고 상황이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의료 공백이 계속되자 이라크 의사들은 진료할 때만이라도 총기를 소지하게 해달라고 정부에 요청했다. 2008년 이라크 정부는 의사 납치 등을 막고 의료진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총기 소지를 허용하기로 했다.

    국제적십자위원회(ICRC)는 지난해 ‘위험에 빠진 의료활동’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내놓았다. 이라크뿐 아니라 리비아와 소말리아, 스리랑카 등 분쟁지역에서 병원과 의료진, 구급차를 대상으로 한 공격이 증가하면서 의료 공백이 일어나고 있다고 보고서는 밝혔다. 또한 16개 나라에서 의료지원 활동이 방해받았고, 이 중 상당수는 국제 인도주의 법규를 위반한 의도적 공격행위였다고 지적했다. 이브 다코르 ICRC 사무총장은 성명을 통해 “스리랑카와 소말리아에 있는 병원이 포격을 당하고 리비아의 구급차와 콜롬비아의 의료 요원이 총격을 받았으며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부상자들이 검문소에서 몇 시간 동안 차량에 방치되는 일도 있었다”면서 “의료진과 시설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보고서를 작성한 로빈 쿠플랜드 박사는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많은 수의 사람이 도로변에 매설된 폭탄과 총격에 직접적인 피해를 당해서가 아니라 구급차가 제때 도착하지 못하거나 의료진의 활동이 방해를 받아서 목숨을 잃고 있다는 점”이라며 “병원이 공격받는 등 진료 환경이 위험한 것도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폭력과 약탈 행위로 인해 의사, 간호사가 진료활동을 포기하거나 병원에서 필요한 연료가 고갈되는 일도 자주 발생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원조금 빼돌리기 횡행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이 일어난 후 국제사회는 막대한 원조금을 지원했다. 그럼에도 의료진과 약품이 부족한 까닭은 뭘까. 원조금 중 상당 부분이 빼돌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관료들의 비리와 횡령으로 엉뚱한 사람의 주머니로 돈이 들어가는 것이다. 미국의 재정지원으로 운영되는 아프가니스탄 대우드 국립 군 병원은 부패 종합 선물세트로 불린다. 이 병원에서는 환자가 뇌물을 주지 않으면 치료에 나서지 않고 음식도 주지 않는다. 뇌물로 줄 돈이 없어 영양실조로 사망하거나 사소한 감염으로 목숨을 잃기도 한다.

    이 같은 사실은 2010년 자문단으로 이 병원에 파견된 미 정부 관리들이 비리 사실을 적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자문단이 적발한 사례 중 하나를 소개한다. 경찰관인 알리 누르 하즈랏은 비리 탓에 죽지 않아도 될 사람이 목숨을 잃은 경우다. 그는 호송대에서 근무하던 중 탈레반의 로켓 공격을 받아 대우드 군병원으로 후송됐다. 입원 뒤 의사들이 상처를 대충 봉합해주었다. 이후 가난한 농민이던 그의 가족이 병원 의료진에게 뇌물을 주지 않자 아무도 그를 돌보지 않았다. 결국 그는 사망했는데 자문단은 “사망 원인이 영양실조에 따른 아사”라고 밝혔다.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의 아프가니스탄 교육훈련단 보고서에 따르면 2008년 이 병원 의사들은 환자한테 사용하는 모르핀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약효가 없는 가짜였던 것이다. 장부에 있는 미국산 의약품은 증발된 상황이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손꼽히는 병원이 이랬으니 다른 곳의 사정은 더 나빴을 것이다. 당황한 미국 정부는 약품 도난과 관련한 수사를 아프가니스탄 출신 외과의사인 아흐메드 지아 야프탈리 장군에게 맡겼다. 하지만 이것도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이었다. 야프탈리 장군조차 뇌물을 수수한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빼돌린 약품은 어디로 갔을까? 카불의 병원 주변에는 약국이 즐비하다. 카불 사람들은 약국에서 질 좋은 미국산 의약품을 살 수 있다. 필자도 약국을 카메라 렌즈에 담았는데 각종 구호단체 마크가 적힌 약품 키트를 비롯한 의료 물품이 가득했다. 약사들은 돈만 주면 뭐든 구해준다고 말했다. 약품의 획득 경로를 묻자 한 약사는 거리낌 없이 인근의 병원을 가리켰다.

    “물건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어요. 나는 의사들과 친분이 두텁습니다.”

    카불의 약사들은 의약품 도매상 구실도 한다. 지방에서 온 중간상에게 의약품을 넘긴다. 지방에는 약국이 따로 있지 않고 식료품점에서 약을 판다. 병원 의료진이 공짜로 받은 약품을 약사에게 팔고 약사는 다시 시골 상인에게 파는 카르텔이 형성돼 있는 것이다. 구호단체가 기부한 고가의 의료장비는 국경을 넘어 수출되기도 한다.

    이라크 상황도 비슷하다. 바그다드의 알 사다르 거리에는 의약품 암시장이 서 있다. 이곳에선 항생제, 진통제는 물론이고 스테로이드 약제나 향정신성 의약품, 환각제도 구할 수 있다. 미군 병사들이 이 거리에서 현지인을 통해 의료용으로 사용하는 환각제를 구입하기도 한다. 바그다드의 한 약사는 “전쟁 전에는 정부의 약 보급소에서 약을 공급받았으나 지금은 빼돌려진 약을 구입해 사람들에게 판다”고 털어놨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사설 병원의 의료비는 국공립 병원의 20∼30배까지 치솟았다. 보건부 장·차관은 관료 중에서도 인기가 많다고 한다. 상당한 액수의 뇌물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평생 쓸 돈을 한 달 만에 번다는 얘기가 나돌 정도다. 그래선지 이라크에선 수시로 보건부 관리들이 교체되곤 한다. 보건부 장관의 재임 기간은 평균 1년 미만이다. 미국이나 국제사회가 막대한 돈을 들였으나 일반 시민은 혜택을 보지 못한 배경에는 이렇듯 비리가 똬리를 틀고 있다.

    봉사 위해 탈레반과도 협력

    지난해 북아프리카와 중동을 들불처럼 휩쓴 ‘아랍의 봄’ 혁명 때도 의료진이 위기에 처하는 일이 잦았다. 바레인 정부는 반정부 시위 과정에서 다친 시민을 돌본 의료진 32명을 체포했다. 의사뿐 아니라 간호사와 구급차 요원 등도 시위대를 치료했다는 이유로 구금됐다. 이는 분쟁지역에서 의료진의 권리를 규정한 제네바협정을 위반한 것이다. 국경없는의사회(MSF)는 “시위현장에서 다친 부상자를 치료한 바레인 의사들이 보안당국의 타깃이 되고 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환자들마저 시위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체포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면서 의료진을 기소한 바레인 당국을 맹비난했다.

    이 같은 비난에 대해 바레인 정부는 국경없는의사회에 대한 압박으로 맞섰다. 지난해 8월 경찰이 마나마의 국경없는의사회 사무실에 들이닥쳐 관계자를 연행하고 집기를 압수한 것. 바레인 정부는 국경없는의사회가 일반 주택에서 무허가 의료센터를 운영한다는 제보를 받고 영장을 발부받아 정식으로 경찰이 압수수색에 나선 것이라고 밝혔다.

    국경없는의사회는 인종과 종교, 정치 성향과 상관없이 인도주의 차원에서 모든 환자에게 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의무로 하는 구호단체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일제히 바레인을 비난했다. 국제앰네스티도 “의료인 사법처리는 ‘정의를 빙자한 졸렬한 모방이며, 생명을 살리려 애쓴 민간 전문가에 대한 터무니없는 기소”라고 맹비난했다. 도처에서 비난이 쏟아지자 바레인 정부는 의사들을 보석으로 석방했다. 재판은 아직 진행 중이다.

    전쟁 지역에서 진료활동을 하려면 용기는 물론이고 협상력, 정치력도 필요하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활동하는 외국인 의사들은 IAM의 탐이 탈레반에 의해 사망한 이후 충격에 빠졌다. 탐을 비롯해 아프가니스탄에 들어온 외국 구호단체 의사들이 의료봉사활동을 하면서 주로 협의한 곳은 지방 정부와 지역 원로다. 그 채널이 당시엔 가장 공식적인 것이었다. 지방 정부는 썩을 대로 썩어 있다. 탈레반의 영향력이 지방정부보다 강해지는 상황에 IAM이 올바르게 대처하지 못했다. 아프가니스탄 구호단체 의사들 사이에선 IAM이 탈레반과의 유대를 소홀히 해서 비극이 벌어졌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나왔다.

    이 사건 이후 아프가니스탄에서 활동하는 구호 단체들은 안정적 활동을 보장받고자 지방정부 대신 탈레반과 손을 잡고 있다.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는 “옳고 그름을 떠나 구호단체들이 신변 안전을 도모하면서 활동을 지속하려면 탈레반과 일정한 협력 관계를 맺는 것이 필수”라고 보도했다. 구호단체들은 앞 다퉈 탈레반과의 소통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한 의사는 “우리는 의사다. 환자를 도우려면 탈레반과도 손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유니세프와 세계보건기구(WHO)도 탈레반의 협조하에 의료행위를 한다. 유니세프는 탈레반 도움을 받아 소아마비 백신 접종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일부 무지한 아프가니스탄 부모들은 아이들이 주사를 맞으면 기독교 신도가 된다고 믿었다. 의사들은 ‘소아마비 백신 접종 활동을 허락한다’는 탈레반 최고 지도자 뮬라 오마르의 편지를 갖고 다니며 백신 접종을 하고 이다.

    이렇듯 의사들은 상황과 현실에 적응하면서 아픈 이를 돌보고 있다. 국경, 종교를 초월한 그들의 인도주의 활동은 어떤 역경에서도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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