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12월 11일,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는 북한 인권에 관한 종합적인 입장을 발표했다. 기자회견 형식이었다. 전원위원회 의결을 거친 의견서 전문을 위원장이 읽고 질문에 답했다. 1년 전인 2005년 12월, 전원위원회 의결로 북한인권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상임위원을 포함한 5명의 인권위원이 참여했다. 북한인권특위는 무려 21차에 걸친 회의를 거듭하며 격론을 벌였다. 각종 단체의 증언과 의견, 전문가의 의견도 청취했다. 외국 기관의 보고서도 충실히 검토했다. 그 결과를 바탕으로 5장의 의견서 초안을 작성했다. 그 초안을 전원위원회 심의와 의결을 거쳐 확정했다.
나는 내심 완곡하게나마 초안보다 약간 ‘전향적인’ 문구를 넣고 싶었다. 위원장으로서의 정무적인 판단이었다. 외교적인 표현을 써서라도 뻔히 예상되는 보수언론의 공세를 다소마나 둔화시킬 해석의 여지를 남기고 싶었다. 어차피 문구에 따라 활동 내용이 달라지지는 않을 터이니. 그러나 새로 부임한 위원장이 개입할 틈이 전혀 없었다. 초안 작성에 관여한 동료들의 태도가 너무나 단호했다. 자칫 잘못하면 나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마저 흔들릴지 모를 상황이었다. 잠자코 초안을 전원위원회 토론에 부쳤다. 위원 두 사람이 약간의 이견을 제기하다 이내 물러났다. 원안대로 통과됐다. 중견 언론인 출신의 한 상임위원은 내가 부임하기 전에는 소외감이 컸다고 고백했다. 나도 그분에 대한 뒷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일부 위원들은 그가 북한 인권 문제에 관한 한 자신을 선출한 정당의 입장을 충실하게 대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의 포로가 된 듯하다고 귀띔했다. 비공개로 진행한 회의 내용이 때때로 언론에 누출된 배경에 그가 있다고 의심하기도 했다. 나는 그럴 리 없다고 했다. 그분의 양식을 믿었다. 이번에는 그분도 쉽게 넘어가주어 만장일치의 의견서를 만들 수 있었다. 전원위원회 의결이 끝나고 언론에 발표되기 직전, 사본을 청와대에 전달했다. 기관 간의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다.
북한 내 인권침해 관할권
언론의 관심은 오로지 한 가지 쟁점에 집중됐다. 북한 내 인권침해행위에 대해 위원회가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인권위가 이 문제를 직접 다룰 법적 근거가 박약하다는 것은 매우 잘 알고 있었을 터인데도 막무가내였다. 업무관할권 같은 기술적인 문제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김대중 좌파정부’가 만든 인권위가 햇볕정책을 지원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북한 인권 문제를 외면한다는 비난을 확대 재생산하는 데 열중했다.
인권위의 의견은 북한 내 인권문제를 조사대상에서 제외한다는 것이었다. 법리적으로 상식적이고 정직한 의견이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실효적 관할권을 행사할 수도 없는, 그야말로 다분히 명분상의 문제였다. 그 문제를 제외한 나머지 의제들은 당연히 위원회의 관할사항이고, 더욱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밝혔다. 국군포로, 납북피해자, 이산가족, 새터민 등의 문제는 인권위 관할사항이다. 또한 제3국에 체류하는 탈북자도 우리 정부의 보호를 요청하는 경우에는 인권위가 나설 수 있다. 이렇게 개념적 범주를 정리한 후에 몇 가지 대원칙을 정립했다. 즉 국제사회가 발전시켜온 인권의 보편성을 존중할 것, 평화적 방법으로 북한주민의 인권을 실질적으로 개선할 것, 그리고 정부 차원의 활동과 시민사회 차원의 활동이 비판적 조언과 협력 속에서 이뤄지도록 할 것 등의 원칙을 세웠다. 이런 대원칙에 근거해 정부에 대해 다섯 가지 항목을 촉구했다. △국제사회와 보조를 맞출 것 △인도적 차원의 지원을 계속하고 모니터링을 강화할 것 △재외 탈북자와 새터민의 인권 증진을 위해 적극 노력할 것 △이산가족, 국군포로, 납북자 문제를 담당할 전담인력을 확충해줄 것 △객관적인 정보수집 및 평가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 업무체제를 구축할 것 등이다. 그리고 향후 위원회의 업무방향을 이렇게 밝혔다.
“정부의 북한 인권 관련 정책을 검토하고 그에 관한 권고 또는 의견표명 등의 정책적 활동을 행하고, 국제인권기구 및 국내외 NGO 등과의 교류·협력을 강화할 것입니다. 또한 위원회는 북한 내 인권 상황, 재외 탈북자의 인권 실태, 국군포로·납북자·이산가족의 인권 문제, 새터민의 인권 증진 등에 관한 실태조사 또는 정책연구 등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등 북한 인권을 개선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지속적으로 하고자 합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실태조사나 정책연구를 통해 북한 내 인권문제에 ‘간접적으로’ 접근하겠다는 뜻이었다. 직접적인 조사권이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다. 설령 권한이 있다고 하더라도 현실적인 방법이 없다.
북한인권포럼
인권위 설립 초기부터 북한 인권에 관련된 진정이 접수됐다. 그러나 모두 각하로 종결됐고, 당사자들도 인권위의 업무적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구제를 받겠다는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언론의 주목을 받고 여론을 환기시키려는 목적이었을 것이다. 대한민국 ‘국가’ 의 인권위니까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성의를 보이라는 원론적인 주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2003년 6월 3일, 북한의 국방위원장 김정일을 피진정인으로 하는 진정이 접수됐다. 요지인즉 “300만 아사자(餓死者)와 20만 해외탈북자가 생긴 데서 알 수 있듯 노예보다 못한 인간 이하의 삶을 강요당하고 있는 전체 북한 인민의 생존권과 인권문제에 대해 대한민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고, 북한 인권 문제 개선을 남북회담의 최우선 의제로 채택하라”는 것이었다. 북한 정부 수반을 피진정인으로 지정하면서 대한민국 정부에 구제를 요청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게다가 인권위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속된 말로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다. 각하할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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