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호

매뉴얼 사회의 한계

제1장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상상하라

  • 이정훈 전문기자 hoon@donga.com

    입력2012-02-29 14: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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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뉴얼 사회의 한계

    도카이 2발전소에서 해수펌프를 넣어둔 방파벽(왼쪽)과 방파벽에 있던 구멍으로 물이 들어와 침수됐던 해수펌프.

    일본은 아시아 최고의 선진국이다. 아시아 나라 가운데에서는 가장 먼저 개화했고, 앞서 과학을 받아들였다. 일본은 태풍과 지진 등 자연재해가 자주 발생하기에 기상 관측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외항선을 모는 선장들은 설사 한국인일지라도, 한국 근해를 지날 때도 하나같이 일본 기상청 자료를 참고한다. 일본 기상청 자료가 한국 기상청 자료보다 정확하기 때문이다.

    일본 기상청은 150여 년 전부터 기상관측을 해왔다. 일본 산업계는 이러한 기상 자료를 토대로 안전한 곳을 골라 산업체를 지어왔다. 기상이변에 대비한 안전시설도 해왔다. 일본은 과학을 믿은 것이다.

    그러나 일본이 과학을 받아들인 역사는 200년을 넘지 못한다. 지구의 나이는 45억 년이 넘는다. 45억 년의 역사 속에는 조족지혈(鳥足之血)에 불과한 200년 사이에는 도저히 감지할 수 없는 숱한 사건이 숨어 있다.

    과학을 믿은 일본

    일본은 좀 더 현명했어야 한다. 일본 최고(最古)의 역사서는 지금으로부터 1300년 전인 712년에 나왔다는 ‘고사기(古事記)’다. 고사기는 한국 최고의 역사서인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년 편찬)’보다 먼저 나왔다. 이러한 옛 사서들은 나름의 방법으로 천재지변을 기록해놓았다. 차이는 150여 년 전 일본이 받아들인 것처럼 과학적인 측정이 아니라는 것뿐이었다.



    일본이 역사서를 뒤적였다면 1000여 년간의 자연재해 데이터를 갖고 원전을 지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일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역사에서 배운다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을 하지 않은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상술한다. 3·11대지진이 일어난 날 일본 기상청이 예상 쓰나미 높이를 세 번이나 수정 발표한 것은 현대 과학의 한계를 보여주는 한 예다. 일본은 현대 과학뿐만 아니라 역사 과학도 살폈어야 한다.

    은 도후쿠 지역의 5개 원자력발전소를 지을 때 그곳으로 닥칠 것으로 예상했던 최대 쓰나미 높이와 그 높이를 고려해 원전을 지은 해발고도, 그리고 2011년 3월 11일 그곳으로 몰려온 쓰나미의 최고 높이를 정리한 것이다. 이 표를 보면 원전 설계 시 상정한 쓰나미 높이가 2011년 3월 11일 발생한 쓰나미 높이보다 훨씬 낮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고를 당한 후쿠시마 제1발전소를 운영하는 도쿄전력은 그곳에서 일어날 수 있는 쓰나미의 최고 높이를 5.7m로 보고, 1~4호기는 해발 10m에, 5~6호기는 해발 13m 위치에 건설했다. 그런데 2011년 3월 11일 그곳으로 몰아친 쓰나미의 최고 높이는 15m 위치였다. 1~4호기 부지는 5m 두께의 물에 덮이고, 5~6호기는 2m 깊이의 물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도쿄전력이 운영하는 후쿠시마 제2발전소는 아슬아슬하게 사고를 피했다. 도쿄전력은 후쿠시마 제2발전소로 올 수 있는 최고 쓰나미의 높이를 5.2m로 보고 해발 12m에 원전을 건설했다. 후쿠시마 제2발전소에 몰아친 쓰나미의 높이는 6.7m였는데 부분적으로 15m의 쓰나미가 덮쳤다. 15m의 쓰나미를 맞은 곳은 3m 정도 침수되었다. 하지만 비상발전기가 작동해 사고를 피할 수 있었다.

    80㎝ 차이로 쓰나미 모면한 오나가와 발전소

    도호쿠전력은 오나가와 발전소로 밀려올 수 있는 최고 쓰나미 높이를 9.1m로 예상하고 해발 13.8m 위치에 원전을 건설했는데, 2011년 3월 11일 13m의 쓰나미가 몰려왔다. 오나가와발전소는 80㎝의 차이로 ‘물폭탄’을 맞지 않은 것이다. 히가시도리 발전소는 원전이 정지해 있었던데다 비상발전기가 가동됐기에 피해를 당하지 않았다.

    일본원자력발전(약칭 일본원연)은 도카이(東海) 제2발전소를 짓는 곳에 최고 5.7m의 쓰나미가 올 수 있다고 보고 해발 8m 위치에 원전을 지었다. 그리고 복수를 위해 해수를 퍼 올리는 해수펌프는 방파제가 앞에 있는 바닷가에 설치했다 그리고 5.7m의 쓰나미가 와도 해수펌프가 잠기지 않도록 주위에 높이 6.1m의 방파벽을 설치했다.

    그날 도카이 제2발전소로 몰려온 쓰나미의 최고 높이는 방파제는 물론이고 방파벽보다 낮은 5.4m였다. 따라서 어느 곳도 바닷물에 잠기지 않았는데, 뜻밖의 곳에서 문제가 일어났다. 해수펌프가 침수된 것이다. 해수펌프에 이상이 있다는 경보는 쓰나미가 몰려간 다음인 오후 7시 26분에 울렸다. 그제야 일본원전은 해수펌프실 안의 공사를 위해 방파벽에 구멍을 내놓았다는 것을 알았다.

    일본원연은 해수펌프실 안에서 공사를 하기 위해 방파벽에 구멍을 내놓은 것을 잊고 있었는데, 그 구멍으로 물이 들어가 몇 시간 후 해수펌프를 멈추게 한 것이다. 해수펌프가 멈추면 복수가 되지 않아 원자로가 과열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방파벽에 내놓은 공사용 구멍을 통해 상당히 많은 양의 바닷물이 들어갔다. 물은 방파벽 안에서 해발 4.9m까지 차올라 있었다.

    그로 인해 1.8m 높이의 해수펌프 한 대가 정지됐다. 그러나 두 대는 계속 가동됐다. 다행인 것은 도카이 제2발전소의 비상발전기는 침수되지 않아 계속 가동됐다는 사실이다. 일본원전은 도카이 제2발전소에 3대의 비상발전기를 설치해놓았는데, 한 대만 가동을 멈추고 두 대는 정상 가동했다. 전기가 있으면 양수기를 돌려 방파벽 안의 물을 퍼 올릴 수 있다.

    예상 쓰나미 높이 수정한 적있는 후쿠시마 제1발전소

    비상발전기가 온전한 덕분에 도카이 제2발전소는 해수펌프실 안에 4.9m까지 차오른 물을 빼내고 고장 난 한 대의 해수펌프도 고쳐 정상가동시켰다. 도카이 제2발전소는 비상발전기가 온전했기에 침수된 한 대의 해수펌프도 고칠 수 있었고 그 결과 어떠한 피해도 당하지 않았다. 도카이 제2발전소는 대지진 발생 나흘째인 3월 15일 오전 0시 40분 차단된 외부전원을 복구함으로써 정상으로 돌아갔다.

    ‘지질히도 운이 없었던 것’이 후쿠시마 제1발전소였다. 후쿠시마 제1발전소의 불운은 기상청 자료를 너무 믿었던 데서 비롯된다. 후쿠시마 제1발전소의 1호기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원전인 고리 1호기보다 7년 앞선 1971년 가동에 들어갔다. 후쿠시마 제1발전소 1호기는 일본의 과학이 덜 발전한 1960년대 초 설계된 것이다.

    그 시기 설계자들은 후쿠시마 제1발전소 지역으로 밀려올 수 있는 최고 쓰나미 높이를 3.1m로 상정했다. 그러나 원전은 안전한 기반에 지어야 하니 해발 10m 위치에 짓기로 했다. 도쿄전력은 이러한 원칙에 따라 설계해 관계 기관의 허가를 받고 공사를 했다. 1호기를 해발 10m 지점에 지은 다음 연이어 2,3,4호기도 같은 높이에 건설했다. 그러나 5,6호기는 해발 13m 위치에 지었다.

    그런데 2002년 일본공학협회(JSCE)가 일본에서 일어날 수 있는 쓰나미를 다시 분석해야 한다며 ‘일본 원전의 쓰나미 평가방법’을 발표했다. 이 평가에 따르면 후쿠시마 제1발전소에는 5.7m의 쓰나미가 발생할 수 있었다. 최고 쓰나미의 높이가 달라졌다고 해서 원전의 위치를 옮길 수는 없다. 5.7m의 쓰나미가 올 경우 침수될 수 있는 시설에 대한 방비를 하는 것이 거의 유일한 방책이다. 도쿄전력은 후쿠시마 제1발전소 앞에 있는 방파제를 5.7m로 높이고, 5.7m보다 아래에 있는 6호기 해수펌프의 위치를 높였다.

    그런데 2011년 3월 11일 후쿠시마 제1발전소 쪽으로, 과학의 대가들이 모인 일본공학협회의 분석이 무색하게 최고 15m의 쓰나미가 몰아쳤다. 후쿠시마 제1발전소가 들어선 일대는 순식간에 물바다가 됐다.

    매뉴얼 사회의 한계
    매뉴얼 사회의 한계

    원전은 24시간 돌아가야 하기에 근무조를 짜서 운영한다. 대지진이 일어난 시각, 1·2호기에서는 A조가 근무하고 있었다. A조 직원들이 대지진과 쓰나미를 겪은 당시 상황을 정리해놓은 것을 보면 흥미롭다.

    2시 46분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나 건물이 크게 흔들렸을 때 A조 직원들은 지진 규모가 사상 최대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발전소에서는 거대한 쇠뭉치인 터빈이 고장 나면 충격이 발생한다. A조 직원들은 터빈 등이 고장 났기에 강력한 진동이 일어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여진이 이어졌다. 그제야 큰 지진이라고 판단해 매뉴얼대로 건물을 빠져나와 언덕으로 피신했다.

    언덕으로 피신한 다음에도 여진은 계속됐다. 일본은 자연재해에 대한 훈련이 아주 잘 돼 있는 나라다. 일본은 한마디로 ‘매뉴얼 사회’다. 매뉴얼 때문에 자연재해에 잘 대처한다. 그러나 매뉴얼이 없는 사건이 일어나면 어떻게 해야 할 줄 모르고 우두커니 있다가 큰 피해를 당한다. SBO는 매뉴얼이 없는 상황이다.

    반면 한국은 임기응변의 사회다. 한국에서는 매뉴얼대로 하면 자기만 손해를 본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 따라서 큰 사건이 일어나면 혼자 살길을 모색한다. 모두가 살길을 모색하니 아비규환에 빠진다. 3·11대지진 후 시민들이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걸어서 귀가하는 도쿄 시가지의 풍경은 우리에겐 낯선 것이다. 매뉴얼 사회는 일본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권철현 전 주일대사는 회고록에서 유학생 시절 겪은 일을 이렇게 적어놓았다.

    ‘일본 유학 시절의 일이다.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는 아이들의 등하교 통학로를 지정해놓고 있었다. 아이들은 항상 그 통학로로 다녀야 했다. 한번은 애가 감기에 걸려 늦게 일어나 지각을 할 처지였기에 내가 자전거에 태우고 다른 길로 바삐 달려갔다. 그때 어떤 학부형이 나를 불러 세우더니 통학로로 가라고 했다.

    나는 애가 감기에 걸려 몸도 아프고 늦었으니 이 길로 빨리 가야겠다고 했지만 그 학부형은 요지부동이었다.

    “아버지 아이를 직접 데리고 가는 게 아닙니까? 그러니 이번만 양해해주십시오.”

    “물론 아버지와 같이 가기 때문에 안전하다는 것은 압니다만, 혹시라도 아이 혼자 갈 때도 이 길로 갈까봐 그럽니다. 그러니 보호자와 함께라도 통학로로 가야 합니다.”

    나는 결국 길을 되돌아와 통학로로 가야 했다.’

    매뉴얼 사회는 매뉴얼에 있는 사고가 일어나면 잘 대처한다. 그러나 매뉴얼에 없는 사건이 일어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큰 피해를 당한다. 임기응변의 사회는 모두가 임기응변을 발휘할 때는 아수라장이 된다. 그러나 워낙 큰 사건이 일어나 창조적인 소수만 임기응변을 발휘하면 훌륭하게 대처할 수 있다.

    보통의 일에는 매뉴얼대로 대처하고, 매뉴얼이 없는 사건이 일어나면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는 사회를 만들면 좋은데, 그러한 사회는 이루기 쉽지 않다. 언덕에 있던 A조 직원들은 후쿠시마 제1발전소 앞의 바다가 뒤로 쑥 물러났다가 잠시 후 확 몰려오는 것을 목격했다. 그렇게 몰려온 1차 쓰나미의 높이는 4m였다.

    쓰나미로 인한 후쿠시마 제1발전소 사망자는 단 두 명

    도쿄전력은 후쿠시마 제1발전소로 올 수 있는 쓰나미의 최고 높이는 5.7m라는 2002년의 일본공학협회(JSCE) 분석을 수용해 후쿠시마 제1발전소 앞의 방파제 높이를 5.7m로 높여놓았기에 1차 쓰나미는 방파제에 부딪혀 물러났다. 쓰나미를 본 직원들은 근무지로 돌아갈 수 없었다.

    1차 쓰나미가 있고 8분 뒤 훨씬 큰 2차 쓰나미가 몰려왔다. 2차 쓰나미의 높이는 무려 15m였다. 따라서 간단히 방파제를 넘어 해발 10m와 13m인 후쿠시마 제1발전소 부지 위로 몰려왔다. 순식간에 물바다가 된 것이다. 원전은 워낙 단단하게 짓는 건물이기에 지진이 났다고 모두가 대피하지 않는다. 원전 안전에 관여하는 사람들은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1호기 조종실에 있던 직원들은 두 번째 쓰나미가 덮치고 2분 뒤인 오후 3시 37분, 1호기에서 비상발전기 전원이 나갔다는 신호가 켜진 것을 보았다. 그리고 4분 뒤 2호기에서도 비상발전기 전원이 나갔다는 신호가 켜졌다. 그러나 조종실에 있던 사람들은 현장 요원이 아니었기에 어디에서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몰랐다. 이러한 일에는 지진에 놀라 언덕으로 대피한 현장 요원들이 능숙하다.

    지진에 놀라 언덕으로 피신했던 현장 요원들은 쓰나미가 잠잠해진 3시 52분부터 다시 근무지로 돌아왔다. 그때 그들은 몰랐지만 1·2호기의 터빈건물에 직원 두 명이 숨져 있었다. 이들은 쓰나미가 몰려올 때 건물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지진이 일어났을 때 떨어지거나 쓰러진 무엇인가에 맞아 숨졌거나 정신을 잃고 있다가, 쓰나미를 맞아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것으로 보였다.

    이 두 사람이 후쿠시마 제1발전소에서 숨진 유이(唯二)한 사람이다. 후쿠시마 제1발전소는 전 세계를 놀라게 하는 폭발을 일으켰지만 대지진과 쓰나미가 일어난 시각에 숨진 것이 확인된 이 두 사람을 제외하곤 추가 사망자가 없었다. 이는 방사선에 과대 피폭돼 숨진 사람이 전무하다는 뜻이다. 후쿠시마 제1발전소 사고 당시 방사선으로 인한 사망자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우리는 후쿠시마 제1발전소 사고를 분석해 들어가야 한다.

    근무처로 돌아온 도쿄전력 직원들은 곧 비상발전기들이 멈춰 선 이유 파악에 나섰다. 이유는 간단했다. 원전에서 사용하는 비상발전기는 20피트 컨테이너만큼이나 크다. 도쿄전력은 이러한 비상발전기를 터빈건물 지하에 설치해놓았다.

    물에 잠긴 비상발전기

    비상발전기가 나갔으니 전기가 없어 창이 적은 터빈건물 안은 암흑천지였다. 그러한 어둠을 뚫고 비상발전기를 찾아간 도쿄전력 직원들은 비상발전기가 있는 지하실이 원전 부지를 덮친 바닷물에 완전 침수돼 있음을 발견했다. 넓은 지하실은 쓰나미의 기운이 남아서인지 아직도 물이 출렁대고 있었다.

    비상발전기를 가동하려면 바닷물부터 뽑아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양수기(揚水機)를 돌려야 한다. 양수기를 돌리려면 전기가 있어야 하는데, 전기를 생산할 비상발전기가 물에 잠겨 있으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후쿠시마 제1발전소는 원전 운영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원자력발전소의 완전 전원 상실(SBO·Station Black Out)’에 직면한 것이다. 아뿔싸!

    도쿄전력은 후쿠시마 제1발전소의 비상발전기 14대를 모두 지하에 설치해놓았다. 쓰나미는 육지를 무섭게 습격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바다로 돌아간다. 그러나 움푹 파인 곳의 물은 그대로 고여있다.

    도쿄전력이 비상발전기를 터빈건물 1층에 설치해놓았다면, 비상발전기는 쓰나미에 잠겼다가 물이 빠진 뒤 모습을 드러냈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 지하실에 설치해놓았으니 모든 전원이 끊길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세계 최고의 기술 대국이다. 따라서 물에 잠긴 비상발전기를 복구하는 것은 일도 아니다. 1층에 비상발전기가 있었더라면 후쿠시마 제1발전소는 엄청난 사고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물에 잠긴 비상발전기는 물을 빼내지 않는 한 복구할 방법이 없다. 모두가 SBO라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으니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해발 15m의 쓰나미가 몰려왔다는 점에서 후쿠시마 제1발전소 사고는 천재(天災)다. 과학적인 관측의 한계 때문에 피해를 보았으니 천재가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15m의 쓰나미가 덮치는 것은 누구도 예측하기 어렵다. 그러나 후쿠시마 제1발전소가 물바다가 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설계한 것은 인재(人災)다.

    1호기 건설 때 비상발전기를 지하에 설치했기에 나머지도 모두 지하에 설치했다. 누구도 왜 비상발전기를 지하에 놓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의심해보지 않았다. 앞에서 한 것을 매뉴얼로 보고 따라하는 매뉴얼 사회의 비극이다.

    매뉴얼 사회의 한계

    후쿠시마 제1발전소로 쓰나미가 밀려오는 모습과 바닷물에 침수된 터빈건물의 지하실(CCTV에 찍힌 모습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떨까. 아직 한국은 일본처럼 큰 쓰나미 피해를 당한 적이 없다. 하지만 한국의 동해안은 평균 수심이 2000m가 넘는 ‘큰 물통’이기에 해저 지진이나 해저 화산 폭발 등이 일어나면 쓰나미 피해를 당할 수 있다. 천만다행으로 한국에 있는 21기의 원전은 모두 비상발전기를 1층에 설치해놓았다. 따라서 쓰나미가 덮쳐도 물이 빠져나간 다음 수리해서 대처할 수가 있다.

    후쿠시마 제1발전소 사고 이후 세계의 원자력발전회사들은 대지진과 쓰나미가 겹쳤을 때 원전이 SBO 상황에 빠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많은 아이디어를 짜냈다. 그 결과 많이 채택한 것 중의 하나가 트레일러를 이용하는 것이다. 트레일러는 큰 컨테이너를 끌고 다니거나 블도저나 전차 같은 중장비를 싣고 가는 바퀴가 아주 많은 트럭이다.

    디젤엔진을 토대로 만드는 비상발전기의 크기는 20피트 컨테이너만하니 트레일러에 달아 끌고 다닐 수 있다. 원전에는 사고 시에 대비한 긴급 차량을 배치한 곳이 있다. 그곳에는 소방차 등이 있는데, 그러한 곳에 비상발전기를 달아놓은 트레일러도 배치해놓는다. 그러다 큰 지진이 일어나면 트레일러를 지진과 쓰나미 피해를 보지 않는 높은 개활지로 이동한다. 그리고 지진과 쓰나미가 끝난 뒤 원전으로 돌아와 전기를 생산해 대처하는 것이다.

    테러와 전쟁, 자연재해에 대처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을 상상하고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을 생각하라는 ‘Imagine the Unimaginable. Think the Unthinkable’이라는 말이 회자된다. 현재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장차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상상해 대비책을 세워놓는 것이 지도자가 할 일이다.

    Thik the unthinkable

    창의력이 없는 사회와 조직은 죽은 사회, 죽은 조직이다. 창의력은 사고 피해를 줄이고 이익을 극대화하는 길이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할 수는 없지만, 창의력을 가진 몇몇에 대해서는 마음대로 상상하고 이를 현실화하는 방법을 찾아내게 하는 사회와 조직이 발전한다. 이러한 일을 하지 못하고 시킨 것만 하는 조직은 죽은 조직이고 죽은 사회다. 관료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이다.

    한 지인은 러시아 군대를 소재로 이러한 일화를 말해준 적이 있다.

    “모스크바 크렘린궁 근처 휘황찬란한 길거리의 모퉁이에 벤치가 하나 있는데, 늘 병사 한 명이 교대로 나와 보초를 서고 있었다. 관광객들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서 있는 러시아 병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모두들 관광객을 위한 배려로 병사를 내보내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왜 번화한 거리에 러시아 병사를 내보낼까 하는 의문을 품고 추적에 들어갔다. 그 결과 그는 제정 러시아 시절 그곳에 벤치를 설치하고 새로 페인트를 칠한 적이 있음을 알게 됐다. 크렘린궁에서는 매일같이 크고 작은 행사가 벌어지니 신사숙녀들이 그곳을 지난다. 성장을 한 그들이 무심코 벤치에 앉으면 낭패를 볼 것이기에 러시아 왕실은 페인트가 마를 때까지 사람들이 벤치에 앉지 못하게 하려고 그곳으로 병사를 파견했다.

    그런데 잦은 인사이동으로 그 명령을 내린 사람은 떠나고 새 사람이 연속해서 왔다. 그들은 시키는 것에 충실한 시종(侍從)업무 전문가들이었으니 전임자가 한 일에 대해서는 전혀 의문을 품지 않고 이어나갔다. 그 결과 러시아 병사 한 명이 아무 할 일도 없이 벤치로 나가 한 시간 서 있으면서 명물이 되는 일이 일어났다.”

    이 이야기를 해준 지인은 전례(前例)라는 이유로 도처에서 이러한 일이 반복되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전쟁과 테러, 범죄를 도모하는 이들은 상투적으로 반복되는 일의 허점을 이용한다. 자연재해 역시 인간이 반복적으로 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일어나 허를 찌른다. 그런데도 관료주의에 눌려 전례의 문제점을 극복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후쿠시마 제1발전소 사고 피해가 커진 데는 이러한 관료주의가 한몫을 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상술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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