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호

온고지신(溫故知新)으로 재해를 극복한다

제3장 전원 복구로 사고 수습에 성공하다

  • 이정훈 전문기자 hoon@donga.com

    입력2012-03-02 14: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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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고지신(溫故知新)으로 재해를 극복한다

    이 비석 밑으로는 ‘집을 짓지 마라’는 글귀가 새겨진 아네요시 마을 앞의 쓰나미 경고 비석(작은사진). 오른쪽은 쓰나미 피해를 잊지 말라는 뜻에서 큰 비석을 세운 경우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은 누구나 다 아는 말이지만 이를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사람은 시련을 겪은 후 한결 똑똑해진다. 반면 평온함이 이어지면 항상 평온할 줄 알고 편하게 지내면서 어리석어진다. 그러다 엄청난 시련을 당한 후 다시 똑똑해지는 과정으로 들어간다.

    시련을 겪고 그에 대응하면서 역사는 발전한다. 시련이라는 도전에 응전하는 사람과 사회와 국가는 발전한다.

    후쿠시마 제1발전소 사고를 일으킨 제1 원인은 거대한 쓰나미였다. 쓰나미 피해와 후쿠시마 제1발전소 사고를 당한 후 사람들은 일본 기상청의 통계를 의심했다. 과연 이번 쓰나미가 전례가 없는 천재지변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쓰나미 발생 9일째 3월 20일자 ‘뉴욕타임스’에는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쓰나미 피해를 크게 당한 이와테현 등 일본 동북부 해안에는 쓰나미에 대한 위험을 적어놓은 비석이 수백 기가 있다고 보도한 것이다.

    “이 비석 아래로는 집을 짓지 마라”



    대지진 당일 이와테현 미야코(宮古)시의 아네요시(姉吉) 마을은 지형 조건 때문에 무려 38.9m까지 치솟은 쓰나미가 덮쳐 주목을 끌었다. 그런데도 아네요시 마을은 큰 인명 피해를 당하지 않았다. 뉴욕타임스는 ‘아네요시 마을 어귀에 이 비석 아래로는 집을 짓지 말라는 내용의 글귀가 새겨진 비석이 서 있는데, 3월 11일 몰려온 쓰나미는 이 비석에서 40m 떨어진 지점까지 물을 몰고 왔다. 이 마을의 다미시게 기무라 촌장은 “선조들이 쓰나미의 공포를 알았기에 후손에게 경고하기 위해 이 비석을 세웠다”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뉴욕타임스의 보도에 따르면 쓰나미를 경고한 일본의 비석 중에는 600년이 넘은 것이 있다. 경고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서인지 높이가 3m에 달하는 거대한 것도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비석들 가운데 하나인 아네요시 마을의 비석은 ‘집을 어느 높이에 지어야 할지’를 적시한 거의 유일한 경우라고 했다.

    아네요시 마을의 주민들은 바다를 무대로 생업을 이어가야 하니 해안을 떠나 살 수가 없다. 따라서 쓰나미 피해를 누구보다도 심하게 당했다. 1896년 대지진 후의 쓰나미 때는 이 마을에서 두 명의 주민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그런데도 생계를 위해 다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또 불행을 맞았다.

    1930년 쓰나미로 네 명만 살아남은 것이다. 이 사고를 겪은 후 주민들은 비로소 해안이 아닌 언덕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비석이 있는 곳 아래로는 집을 짓지 말라’는 내용의 쓰나미 경고 비석을 세운 것은 그 직후였다.

    1.2m 높이의 이 경고 비석 덕분에 1960년 쓰나미에서는 피해가 없었다. 그러나 2011년 3월 11일 일어난 쓰나미 때는 학교로 세 명의 자녀를 데리고 간 어머니가 자녀들과 함께 희생되었다. 하지만 경고 비석보다 높은 곳에 동네를 형성했기에 마을에 있던 주민들과 집은 피해를 보지 않았다.

    뉴욕타임스는 흥미로운 충고를 했다. 쓰나미 경고 비석이 있는 마을들도, 제2차 세계대전 후 인구가 늘어나고 마을 규모가 커지자 선조들의 경고를 무시하고 해안으로 거주지를 넓혀가는 바람에 피해가 컸다고 지적한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해안가 사람들은 쓰나미 피해를 영원히 잊지 말자며 ‘히로시마 원폭돔(Dome)’처럼 쓰나미 피해 현장 일부를 영구히 보존해야 한다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고 보도했다.

    일본 기상청이 지진과 쓰나미 등을 과학적으로 관측한 지는 150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전래되는 일본의 역사는 아네요시 마을의 비석처럼 더 많은 관측 자료를 품고 있다.

    일본의 교도(共同)통신은 후쿠시마 제1발전소 사고 후 ‘문화재 기획-유적으로부터 경고, 지진고고학’시리즈를 연재했다. 이 시리즈에는 자연과 역사 속에서 살필 수 있는 자연재해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이 정리돼 있다. 이것과 기타 자료를 엮어 역사 속의 일본 자연재해를 살펴본다.

    일본 역사에서 헤이안(平安) 시대는 우리의 통일신라와 고려 초기에 해당한다. 헤이안 시대에는 교토(京都)를 수도로 삼았다. 그때의 일본인들은 ‘속일본후기(續日本後紀, 서기 869년 간행)’라는 역사서를 남겼다.

    이 책에는 서기 841년 2월 시나노(信濃)국을 담당하는 ‘시나노구니시’란 관리가 ‘천둥 번개가 떨어진 것 같은 격진(激震)과 진동소리가 들리고 하룻밤새 14차례나 흔들렸다. 건물과 돌담이 무너졌다’고 조정에 보고했다는 내용이 있다.

    서기 841년 2월 지진을 당했다는 지역은 어디일까? 시나노국 지역은 지금의 나가노(長野)현이다. 1989년 나가노(長野)현 연구팀은 나가노 시를 가로지르는 지쿠마(千曲) 강의 자연제방 위에 있는 시노노이(篠ノ井) 유적지를 발굴했다.

    그리고 이 유적지가 841년 시나노구니시가 큰 지진을 당했다고 조정에 보고한 지역으로 판단했다. 이 유적지에는 땅바닥이 갈라지면서 땅속에 있던 물과 모래가 순간 분수처럼 솟아오른 ‘액상화(液狀化) 현상’흔적이 발견됐다.

    현장 조사에 참가했던 나가노 현립박물관의 니시야마 가쓰미(西山克己) 씨는 “지진을 당한 그 유적지는 서기 888년에 일어난 닌나(仁和) 대홍수로 파묻힌 것으로 보인다. 그 유적지를 발굴해보니 움집이 다수 나왔는데, 움집 바닥이 갈라져 있었다. 액상화 현상으로 땅속에서 솟구친 것이 분명한 모래에 덮여 있었다”고 말했다.

    움집 터 중의 한 곳에서는 지진이 일어난 시대가 언제였는지 증명해주려는 듯 서기 835년에 주조된 조와쇼호(承和昌寶)가 발견됐다. 조와쇼호는 구리로 만든 동전인데, 한국은행 화폐금융박물관에도 이 돈이 전시돼 있다.

    일본 역사서 속의 지진 기록

    이런 식으로 일본 역사에서는 도처에 지진이 일어난 흔적이 발견된다. 그러나 일본 기상청은 과학적으로 관측한 것이 아니에서 주목하지 않았다. 또 건설을 하는 사람들은 일본 기상청 자료를 인용하는 것이 유리하기에 역사 기록물을 외면했다.

    후쿠시마 제1발전소를 지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도쿄전력은 후쿠시마 제1발전소를 지을 때 발전소 부지 남쪽인 미야기(宮城)현의 와타리(亘理) 정(町)에서부터 후쿠시마(福島)현 미나미소마(南相馬) 시 사이의 40㎞ 지역에 ‘후타바 단층’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단층이 2000년 전에 움직였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원자력발전소를 지었다.

    그러나 후쿠시마 제1발전소 북쪽에도 유사한 단층이 있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 북쪽에 있는 단층은 1990년 우연히 발견됐다. 1990년 가을 후쿠시마현 문화진흥사업단의 요시다 히데유키(吉田秀亨) 부주간은 후쿠시마현 소마(相馬)시에 있는 ‘단노하라(段ノ原) B’란 이름의 유적을 조사했다. 일본 역사에서 ‘조몬(繩文)시대’라고 하는, 6000여 년 전 신석기 사람들이 살았던 움집(‘竪穴’이라고도 한다) 100여 채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유적지를 발굴하던 그는 이 주거지 동쪽 끝에 있는 언덕 꼭대기 부근에서부터 꾸불꾸불하게 이어져 내려오는 기묘한 도랑을 발견했다. 구불구불한 이 도랑의 길이는 약 90m였고, 폭은 4~5m, 깊이는 2m 남짓했다. 도랑의 바닥에서는 불에 탄 나무와 신석기 시대 토기가 대량 발견됐다.

    신석기 시대의 지진

    도랑 바닥이라면 물이 흐른 흔적이 발견돼야 하는데, 불에 탄 나무와 신석기인이 사용하던 토기 파편이 다량으로 발견되었다. 그는 ‘왜 도랑에서 이러한 것이 나오지’ 하는 의문을 품은 것이다. 도랑이라면 계속 이어져야 하는데, 이 도랑은 90m쯤 가다 사라지는 모양새였다. 마치 땅에 있는‘입’같은 느낌을 주었다.

    “지면에 열려 있는 커다란 입 같아. 그런데 도대체 나는 이곳에서 뭐를 발굴하고 있는 것이지? 왜 도랑에서 토기가 나오는 것일까?”

    이 도랑의 정체를 풀어준 것은 그 지역의 돌을 조사하기 위해 찾아온 지질학자였다. 지질학자는 단번에 “땅이 갈라졌네”라는 말로 이 도랑의 정체를 확인해주었다. 땅이 갈라졌다는 것은 지진이 일어났다는 뜻이다.

    지질학자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 주거지 좌우 지역에도 산사태가 일어났을 정도로 지층이 크게 어긋나 있다는 것을 확인해주었다. 그렇다면 큰 지진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제야 요시다 부주간은 이 주거지가 한창 번성하던 시기에 지진을 만나 한순간에 폐허가 됐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지진으로 땅이 갈라지면서 도랑 같은 구불구불한 틈이 생겼는데 그 틈으로 주거지에 있던 토기와 불에 탄 나무들이 대량으로 굴러들어간 것이다. 그는 지질학을 몰랐으니 그러한 사실을 파악할 수 없었다. 땅이 갈라진 것을 물이 흐르던 도랑으로 보고 ‘왜 도랑에 토기와 불에 탄 나무가 있지’라는 의문을 품었던 것이다.

    산업기술종합연구소에 초청연구원으로 있는 지질고고학자 산가와 아키라(寒川旭) 씨는 이 단층 흔적을 보고 “규모 7 정도의 지진이 일어났을 것이다. 규모 7의 지진이 일어나면 움집은 거의 다 파괴된다”라고 추정했다.

    규모 7의 지진은 1995년 고베(神戶)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한신(阪神) 대지진과 비슷한 강도다. 이 단층은 후쿠시마 제1발전소 남쪽에 있는 후타바 단층과 연결돼 있었다. 이로써 후쿠시마 제1발전소 북쪽에도 단층대가 있다는 사실이 공식 확인됐다.

    일본 지진조사위원회는 2011년 3월 11일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으로 후타바 단층도 다시 지진을 일으킬 수 있는 활(活)단층이 되었다고 분석했다. 동일본 대지진 후 후타바 단층에서는 약진이 연이어 발생했다.

    그렇다면 후쿠시마 제1발전소는 지진에 취약한 지역에 놓인 게 된다. 후쿠시마 제1발전소가 일본 기상청의 예측과 달리 큰 쓰나미를 맞은 것은 이 지역의 땅도 함께 흔들렸기 때문일 수 있다. 땅이 흔들리면 쓰나미의 높이는 점점 올라간다.

    6000여 년 전 평화롭게 살다가 규모 7의 지진을 만나 초토화된 단노하라 B 유적지의 생존 신석기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 해답도 고고학적 발굴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에 대한 연구도 요시다 부주간이 했다.

    그는 “그 지진이 있은 후 생존자들은 잔해를 정리하고 다시 마을을 세워 반세기 이상 거주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재앙을 만나도 그 지역을 떠나지는 못하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지진을 당해도 잔해를 치우고 살아야 하는 것은 일본인의 숙명인 모양이다.

    300~500년마다 오는 큰 쓰나미와 지진

    1998년, 지형학을 전공한 홋카이도(北海道)대학의 히라카와 가즈오미(平川一臣) 특명교수는 태평양에 면해 있는 홋카이도 도카치(十勝) 평야의 깎아지른 해안단구 벼랑 위에서 깜짝 놀랄 만한 사실을 발견했다. 해발 15m쯤 되는 이 단구 위에 해저에 있어야 할 모래와 둥근 돌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지형학 전문가인 그는 단번에 ‘20m 높이의 거대한 쓰나미가 덮쳐 해저의 돌과 모래가 15m 높이의 단구에 올라갈 수 있었다’고 판단했다.

    20m 높이의 쓰나미가 몰려오려면 얼마나 큰 지진이 일어나야 하는가. 홋카이도 동쪽에는 치시마(千島)해구가 있다. 이 해구는 바다 쪽 땅(플레이트)이 육지 쪽 땅(플레이트) 밑으로 파고들어가 생겨났다. 해저지진은 바다 쪽 플레이트가 육지 쪽 플레이트 밑으로 파고들어 육지 쪽 플레이트를 위로 들어 올리면서 일어난다.

    홋카이도에서 발생한 지진 역사를 알려면 오래된 문헌을 뒤져야 하는데, 홋카이도는 변방이기에 그런 기록을 남긴 문헌이 거의 없다.

    도쿠가와(德川) 막부 시절 권력 1인자는 쇼군(將軍)이었다. 쇼군을 보필하는 막부의 고위 직책 중의 하나가 ‘로주(老中)’다. 1786년 일본 역사에서 탐험가로 유명한 모가미 도쿠나이(最上德內)는 다나무 오키쓰구(田沼意次) 로주의 명령을 받아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치시마 열도(러시아 이름은 쿠릴 열도)에 있는 우룻푸(得撫島)로 갔다(지금 우룻푸 섬은 러시아 영토다).

    우룻푸 섬에 상륙한 그는 ‘쓰나미에 떠밀려 섬 언덕에 난파해 있는 러시아 대형선을 봤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는 일본 역사서에 기록돼 있지 않은 쓰나미 흔적이다.

    고대에 태평양에 면해 있는 일본 동쪽에서는 여러 차례 초대형 쓰나미가 발생했음이 분명하다. 쓰나미를 기록한 문헌이 너무 적기에 제대로 추적할 수가 없을 뿐이다. 따라서 학자들은 육지에 올라와 있는 바다 퇴적물에 주목한다.

    그 결과 모가미는 지난 6500여 년 동안 거대한 쓰나미를 동반한 큰 지진이 수십 차례 있었다는 것을 알아냈다. 거대한 쓰나미를 일으킨 지진은 300~500년마다 반복해서 일어난 것으로 추정됐다. 가장 가까운 시기에 큰 쓰나미를 일으킨 해저지진은 17세기 초에 있었던 것 같다. 이 지진과 쓰나미는 과거에 있었던 어떤 ‘지진+쓰나미’보다 훨씬 강력한, 사상 최대의 ‘지진+쓰나미’인 것으로 판단됐다.

    해저지진 중에서도 무서운 것은 지진 발생 지역이 이동하면서 넓어지는 ‘연동지진’이다. 바다와 육지에 있는 플레이트가 만나, 어느 쪽(대개는 바다 쪽) 플레이트가 다른 쪽(대개는 육지 쪽) 플레이트 밑으로 들어가면 지진이 일어나는데, 이 지진으로 이웃에 있는 단층도 영향을 받아 그곳에서도 지진이 일어나는 것이 연동지진이다. 해저에서 연동지진이 일어나면서 발생하는 쓰나미는 더욱 높아진다.

    도쿄(東京)대학 지진연구소의 후루무라 다카시(古村孝志) 교수는 “수십 분 차이로 연동지진이 일어나면 각각의 지진으로 발생한 쓰나미가 1.5~2배 정도 더 높아질 수 있다”고 추정했다.

    3연동 지진에 대한 공포

    시즈오카(靜岡)현에는 ‘하마나(浜名)’란 이름의 호수가 있는데, 이 호수는 일본 지리사(地理史)와 지진사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 호수의 면적은 68.8㎢이고, 둘레는 103㎞, 최대수심은 12.2m이다. 이 호수는 육지의 한 부분이 꺼지면서 생긴 함몰지로, 가까이 있던 바닷물이 밀려들어와 만들어졌다. 그리고 바다와 접한 곳에 모래톱이 생겨 바다와 분리된 호수가 되었다.

    이러한 하마나 호수가 1498년 일어난 대지진과 해일로 바다와 경계를 짓는 모래톱이 씻겨 나가 다시 바다와 연결됐다. 지금도 바다와 연결된 모습으로 있다. 이 하마나 호수 서쪽에 ‘나가야모토야시키(長谷元屋敷)’란 유적이 있는데, 이 유적지는 과거 이 지역에서 발생한 쓰나미의 흔적을 담고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이곳은 지진과 쓰나미로 재해를 입었지만 물산이 풍부해서 다시 사람들이 들어와 살다가 또다시 재해를 당한 재해 다발지역이다.

    앞에서 언급했듯 160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기후(岐阜)현의 세키가하라(關ケ原)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아들 세력과 싸워 승리함으로써 일본의 패권을 잡고 일본 역사의 무대를 에도(지금의 도쿄)로 옮겼다. 세키가하라 전투 5년이 지난 1605년 2월 3일 저녁 8시쯤 시즈오카현 스루가(駿河)항에서부터 규슈(九州)까지 태평양에 접해 있는 일본 동쪽 전 해안으로 거대한 쓰나미가 밀려왔다. 하나미 호수는 바다와 연결돼 있는데다 호수 자체도 지진에 의해 흔들렸기에 호수 에서도 쓰나미가 발생했다.

    이 쓰나미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을 통일한 다음에 일어났기에 일본 역사서에 많이 기록돼 있다. 이 쓰나미는 지진에 비해 매우 규모가 컸다고 한다. 문제는 쓰나미의 규모를 유추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학자들은 나가야모토야시키 유적에서 1605년에 발생한 거대한 쓰나미 흔적을 찾아냈다. 호수 바닥에 있어야 할 돌과 모래가 육지로 올라와 있는 것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큰 쓰나미가 일어났기에 호수도 쓰나미를 일으켰을까?

    1605년의 쓰나미는 다른 곳에서도 큰 피해를 일으켰다. 당시 사람들은 하마나에서 멀리 떨어진 시코쿠(四國) 섬의 도쿠시마(德島)현 동쪽에 있는 시시쿠이우라에서 ‘달이 뜰 무렵 큰 쓰나미가 밀려와 땅이 갈라지고 물이 솟아올라 사람들이 놀라 산으로 도망쳤다’는 기록을 남겼다.

    도쿠시마 사람들은 1605년 시시쿠이우라에서 지진으로 인해 해안가 땅속에 있던 물과 모래가 솟구치는 액상화 현상이 일어났다고 기록해놓은 것이다. 사람들이 놀라 산으로 도망쳤음은 쓰나미가 몰려왔다는 뜻이다.

    시즈오카는 동쪽으로 태평양을 바라본다(1부 1절 1장의 그림1 일본 지도 참조). 도쿠시마는 남쪽으로 태평양에 면해 있다. 따라서 일본 동쪽에서 지진이 일어나 쓰나미가 밀려왔다면, 이 쓰나미는 시즈오카를 덮칠 수는 있어도 도쿠시마는 덮치기 어렵다. 도쿠시마의 오른쪽에는 와가야마(和歌山)현 등이 있는 기이(紀伊)반도가 있어 동쪽에 몰려온 쓰나미를 막아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1605년의 기록은, 동시에 쓰나미를 맞기 어려운 시즈오카 지역과 도쿠시마가 같은 날 쓰나미를 맞았다고 적어놓았다. 일본인들은 도호쿠 지방이 면해 있는 동북쪽 태평양은 ‘동해’, 도쿠시마가 있는 시코쿠 섬 등이 접해 있는 태평양은 ‘남해’로 부른다. 학자들은 여기서 남해와 동해에서 동시에 지진이 일어났을 것으로 추정한다.

    일본 발음으로는 ‘난카이(南海)·도카이(東海) 지진’이다. ‘도·난카이 지진’으로 부르기도 한다. 두 개의 지진이 연동해서 일어난 것이라 ‘연동(聯動)지진’이라고도 한다. 동쪽 바다에서 지진이 일어나자, 그 영향을 받아 남쪽바다에서도 지진이 발생한 것이다.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연동지진이 일어나면 쓰나미는 더욱 커진다. 지진에 비해 아주 큰 쓰나미가 발생하는 것이다.

    “동일본 대지진도 연동지진이다”

    후루무라 다카시(古村孝志) 일본 도쿄대 지진연구소 교수는 2011년 3월 11일 일어난 동일본 대지진을 연동지진으로 보고 있다.

    “일반적으로 플레이트 지진은 육지 부근의 지하 10~40㎞ 깊이에서 플레이트가 급격히 이동함으로써 발생한다. 쓰나미를 일으키는 ‘쓰나미 지진’은 육지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 있는 해구에서 발생한다. 해저 10㎞ 쯤에 있는 얕은 지각이 다른 지각 밑으로 천천히 들어감으로써 발생한다. 동일본 대지진은 쓰나미 지진을 일으키는 플레이트가 통상적으로 발생하는 지진의 영향을 받아 크게 이동했기에 큰 지진과 함께 초대형 쓰나미를 일으킨 것이다. 전형적인 혼합형 연동지진인데 이러한 지진은 예상조차 할 수가 없다.”

    일본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남해와 동해 동남해에서 연속해서 해저지진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름하여 난카이(南海)·도카이(東海)·도난카이(東南海) 3연동 지진이다. 태평양에서 3연동 지진이 일어나면 지진 규모는 9 정도로 강력해지고, 쓰나미는 더욱 커진다. 태평양 쪽 해구에서 3연동 지진이 일어나면 일본 동해안은 또 한 번 초토화된다고 학자들은 걱정한다.

    일본인들은 일년에 수십 차례 지진을 겪으며 수십~수백 년에 한 번씩 격렬한 지진과 큰 쓰나미를 당하고 있다. 그런데도 일본은 명맥을 유지한다. 최후의 날을 맞은 것 같지만 항상 재기한 것이다. 1945년 8월 6일 미국이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했을 때도 일본인들은 최후의 날이 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살아남았고 최강의 경제대국으로 부흥했다.

    계속 운전하다 사고당한 후쿠시마 원전

    그렇다면 동일본 대지진도 일본인이 겪은 숱한 환난 중의 하나일 뿐이다. 이 지진과 쓰나미를 통해 일본인은 보다 현명해질 것이다.

    2세대 원전의 법정수명을 30년으로 볼 경우 후쿠시마 제1발전소의 원전 6기는 모두 법정수명을 넘겼다. 정년을 맞았다고 해서 평생 해오던 기술을 다 잃는 것은 아니다.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사람은 정년에 관계없이 훌륭히 일을 해낼 수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원전도 잘 관리해왔다면 법정수명을 넘겨도 계속 사용할 수 있다. 미국을 필두로 원전 선진국들은 법정수명이 다가온 원전들을 정밀 조사해 안전성에 문제가 없다면 계속운전을 허가했다. 후쿠시마 제1발전소의 원전도 상당수가 안전성 검사에 통과돼 계속운전을 하다 사고를 당한 경우다. 이 사고를 계기로 일본은 후쿠시마 제1발전소 원전을 모두 폐쇄하기로 했다.

    후쿠시마 제1발전소 사고를 계기로 2011년 일본은 역사 속의 자연재해를 살피며 모든 원전에 대한 안전성 검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조금이라도 이상한 것이 있으면 바로 가동을 멈췄다. 2011년 여름에는 54기의 원전 가운데 정상 가동된 것이 10여 기에 불과했다. 덕분에 일본은 극심한 전력난을 겪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기에 대비책을 하나씩 세워나갔다.

    동일본 대지진 후 일어난 쓰나미로 일본 소방대는 역사상 가장 많은 226명의 소방 관련 인사가 순직했다. 소방단원 196명, 소방직원 26명, 소방 활동에 협력한 일반인 4명이 숨진 것이다. 이전에는 1991년 나가사키(長崎)현의 운젠(雲仙)·후겐다케(普賢岳) 화산 분출 때 출동한 소방대원 12명 등 24명이 숨진 것이 최다 기록이었다.

    일본 정부는 이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2011년 11월 29일 도쿄 미나도(港)구에서 일왕 부부가 참석한 가운데 소방 순직자 위령제를 열었다. 그리고 소방대원이 많이 희생된 원인을 분석해 방지책을 마련했다.

    쓰나미 피해가 컸던 이와테(岩手), 미야자키(宮城), 후쿠시마(福島)현에는 쓰나미를 막기 위한 각종 수문이 바다로 이어지는 하천 등에 설치돼 있었다. 평상시 이 수문은 방파제와 방조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수문 사이로 어선이 나가야 하기에 수문은 항상 열어놓는다. 평소에는 수문을 열어놓고 있다가 쓰나미가 온다는 경보가 있으면 닫아 항구와 해안 마을의 피해를 줄이는 것이다. 3개 현에는 이러한 수문이 1450군데 설치돼 있었다. 동일본 대지진 후 쓰나미가 온다는 경보를 받은 세 현의 소방대원들은 수문 쪽으로 내려가 수문을 닫는 조작을 했다.

    그런데 쓰나미가 워낙 커서 수문을 넘고, 수문을 조작하던 소방대원들까지 삼켜버렸다. 이렇게 해서 숨지거나 실종된 소방대원이 무려 72명이다.

    타산지석

    이 때문에 일본은 사람이 바다로 내려가지 않고도 수문을 닫을 수 있도록 수문을 원격 통제하는 시스템을 개발하기로 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지만 앞으로 있을 유사 사례에서 소방대원의 희생을 줄이기 위한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쓰나미와 후쿠시마 제1발전소 사고라는 혹독한 희생을 치른 일본은 보다 강한 방재 시스템을 갖춘 나라로 거듭난다. 한국은 이러한 일본을 보면서 배울 것은 빨리 배워야 한다. 한국도 온고지신하며 방재 대책을 세워야 한다. 한국은 안보대책도 세워야 하는 나라다. 천안함-연평도 사건은 한국이 자연재해와 더불어 북한 도발 앞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줬다.

    이상하게도 이상주의자들은 북한을 따뜻한 눈으로 보려고 한다. 매번 북한한테 얻어맞으면서도…. 이는 온고지신하지 않고 감성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일본의 사례에서 한국이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은 너무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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