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호

신치용 삼성화재 감독

지독한 승부근성으로 배구 코트 평정한 ‘제갈공명’

  • 하정민│동아일보 경제부 기자 dew@donga.com

    입력2012-03-20 11: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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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프로배구는 7개 팀이 싸우고 삼성화재가 우승하는 스포츠’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프로배구가 출범한 2005년 이후 7년 동안 5번 우승했고, 실업배구 시절에는 8번 연속 우승하며 77전승을 기록한 삼성화재의 전력이 워낙 막강하기 때문이다. 이 삼성화재를 17년간 이끌고 있는 신치용 감독은 배구는 물론 전 종목을 통틀어 현역 프로감독 중 최장수 감독으로 군림하는 지도자다. 화려한 성적으로 신인 드래프트에서는 오히려 유망주를 뽑지 못하고 노장 선수로만 다음 시즌을 치러야 하는 사정을 몇 년째 겪고 있지만 신 감독은 그만의 비결로 위기를 극복하고, 노장 선수로도 얼마든지 우승을 계속할 수 있다는 점을 입증했다. 겉으로는 ‘곰’에 가까운 전형적인 무뚝뚝한 경상도 사나이지만 치밀한 계략과 철저한 준비로 ‘코트 위의 여우’라 불리는 그가 쌓아올린 금자탑은 한층 높이를 더해가고 있다. 사람들이 그를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조조의 대군을 적벽대전에서 대파한 제갈공명에 비유하는 이유다.

    신치용 삼성화재 감독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지만 운동선수에게 나이는 넘기 힘든 벽이다. 골프, 야구, 마라톤과 같은 운동은 선수가 몸 관리만 잘하면 서른은 물론 마흔에도 얼마든지 현역 선수로 뛸 수 있다. 하지만 이 소수의 종목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스포츠에서 서른 넘은 선수는 일반인의 나이로 환갑을 지났다는 평가를 받는다. 극심한 경쟁이 펼쳐지는 프로스포츠에서 선수의 신체 반응 속도가 느려진다는 것은 곧 사형선고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특히 배구 선수의 생명은 유난히 짧다. 구기 종목 중 공중에서 움직이는 볼을 도구가 아니라 인체로 타격하는 유일한 운동이 배구이기 때문이다. 신체에 큰 부담을 주는 수직 상승 동작, 움직이는 볼을 때리기 위해 다양한 각도에서 힘을 주는 몸 동작, 관절에 무리가 가는 점프 후 착지 동작이 필수적이다 보니 다른 종목보다 신체에 미치는 부하가 클 수밖에 없다. 배구에서 노장 선수를 찾아보기 쉽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평균 연령이 만 30세가 훌쩍 넘고, 다른 팀 선수보다 평균 신장도 작은 주전 선수들을 이끌고 17년간 한국 배구의 정상을 지키는 사람이 있다. 바로 삼성화재블루팡스의 신치용(57) 감독이다. 삼성화재의 핵심 선수인 석진욱(36), 여오현(34)은 서른이 아니라 아예 삼십대 중반이다. 지난 1월 은퇴한 손재홍(36)과 신선호(34)도 마찬가지다. “환갑이 넘은 어르신이 많아 내가 조석으로 문안을 드려야 할 정도”라는 신 감독의 말은 단순한 농담이 아니다.

    이런 노장 선수들을 이끌고 신 감독은 엄청난 성적을 냈다. 삼성화재배구단이 창단된 1995년부터 지금까지 17년간 감독을 맡고 있는 그는 1997년부터 2004년까지 무려 배구 슈퍼리그 8연패라는 어마어마한 기록을 냈다. 프로배구가 출범한 2005년 이후에는 V리그 7번 시즌 가운데 5회를 우승했다. 17년간 무려 13회를 우승한 셈이다. 삼성화재는 2011~12년 시즌에도 정규리그 우승을 눈앞에 두고 있다. 오랜 기간 단 한 팀을 맡았고, 그 팀을 이끌며 압도적인 성적을 냈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은 그를 한국의 ‘알렉스 퍼거슨’으로 부르기도 한다. ‘신동아’ 3월호 ‘Leadership in Sports 11’에 소개한 대로 퍼거슨 감독은 26년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이끌며 맨유를 세계 축구계의 정상 팀으로 만들었다.



    신 감독에게는 많은 비판도 따라다닌다. 그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은 ‘선수들 덕으로 우승한다’는 것이다. 삼성화재는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에는 김세진, 신진식이라는 한국 배구계의 걸출한 스타들을 보유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2009년 8월 영입한 외국인 선수 가빈 슈미트는 ‘삼성화재 배구는 가빈 몰빵 배구’라는 평까지 낳을 정도로 현재 한국 배구계의 최고 스타다. 물론 우승을 위해서는 좋은 선수가 필요하다. 하지만 좋은 선수만 있다고 누구나 우승을 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선수단이 진정한 하나가 되었을 때만 우승이 가능하다. 당연히 이 부분은 감독의 몫이다.

    신치용 감독은 “가빈이 절대로 홀로 잘해서 우승을 한 것이 아니다. 그동안 몰빵 배구를 했다고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팀원들의 신뢰와 믿음이 없었다면 결코 가빈이 지금과 같은 활약을 펼치지 못했을 것이다. 동료 중 누구도 가빈의 활약을 시기하지 않고 지원해준 점이 좋은 결과로 나타났다”고 강조한다. 삼성화재의 독주와 외국인에게 의존하는 현상이 한국 프로배구의 재미를 반감시키고 국내 선수들의 실력 저하로 이어진다는 지적도 나오지만 승부를 내야 하는 프로스포츠에서 감독과 선수가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가빈에게 의존하는 삼성화재의 공격 루트를 뻔히 알고도 막지 못하는 상대팀이 더 문제라는 반박이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신치용 삼성화재 감독
    17년간 최고를 유지한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실제 신치용 감독은 과음하거나, 몸이 아프거나, 심지어 우승을 한 뒤에도 오전 7시에 정확히 체육관으로 출근한다. 퇴근할 때 선수들의 승용차 바퀴에 돌멩이를 괴어놓거나 출근 시에는 쓰레기통을 살피는 일도 다반사다. 선수들이 밤사이 운동을 게을리하고 외출했는지, 컵라면이나 인스턴트식품을 먹었는지 샅샅이 점검하기 위해서다. 훈련도 선수들의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시킨다. 스타라고 봐주는 법도 없다. 자연히 선수들은 이 지독한 ‘성실맨’ 신 감독을 따르고 존경할 수밖에 없다.

    신 감독은 1955년 경남 거제 장승포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공부를 위해 부산 아미초등학교로 전학을 간 그는 특활시간에 배구공을 처음 접했다. 어린 시절 고향 거제도에서 넓은 바다를 보며 바다목장 경영을 꿈꿨던 그는 부산에 오기 전까지 배구가 뭔지도 잘 몰랐다. 하지만 큰 키와 좋은 신체조건을 지닌 그는 곧 두각을 나타냈고 부산 지역의 ‘배구 명문’ 성지공고로 진학했다.

    신치용은 누구인가

    언뜻 가빈, 김세진, 신진식 등 공격수의 비중이 높은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물 수비, 탄탄한 조직력 등 수비수와 세터의 비중이 큰 ‘신치용식 배구’의 밑그림은 성지공고 시절 완성됐다. 신치용 감독은 아시아 최고 거포 강만수 전 KEPCO45(한국전력공사) 감독의 성지공고 1년 후배다. 당시 세터 신치용은 공격수 강만수가 전위에 있건 후위에 있건 무조건 강만수에게만 토스를 줬다. 강만수에게 볼을 줘야 확실하게 점수가 났기 때문이다. 그러자 다른 공격수 선배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참지 못한 선배들은 경기 후 선수 신치용을 불러 심한 기합을 줬다.

    삼성화재와의 운명적 만남

    신치용 삼성화재 감독

    2010~2011 NH농협 V리그 남자부 준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삼성화재 신치용 감독이 선수들의 플레이에 박수를 치고 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신 감독은 “그때는 후위공격이란 개념조차 생소했다. 전위에 있던 선배들은 자기를 무시하고 강만수에게 볼을 주는 나를 크게 혼냈다. 그러나 나는 이후에도 똑같이 했다. 확률이 높은 쪽을 선택하는 게 세터의 첫 번째 임무이기 때문”이라고 회상한 바 있다. 삼성화재가 경기의 주요 승부처에서 무조건 가빈에게만 공을 몰아주는 이른바 ‘가빈 타임’으로 승리하는 방정식이 어디서 탄생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신 감독은 고교 시절에는 레프트 공격수, 대학에서는 세터와 센터를 맡았다. 대학 졸업 후 한국전력에서 뛸 때는 세터, 남자배구 대표팀에서는 세터와 레프트 공격수를 오갔다. 선수 시절 ‘컴퓨터 세터’로 이름을 날린 김호철 전 현대캐피탈 감독이 있을 때는 그가 레프트 공격수로 나섰고, 김 전 감독이 없을 때는 세터를 맡는 식이었다. 그 자신은 “어느 포지션도 제대로 한 게 없어서인지, 아니면 다재다능해서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여러 포지션을 뛰었다”고 웃지만 선수 시절 다양한 포지션을 섭렵한 경험은 오히려 나중에 지도자 신치용의 성공에 큰 도움을 줬다.

    신 감독은 삼성화재를 맡기 전까지 15년간 한국전력에서 코치로 활동했다. 한전 코치 시절 그는 스카우트 파문으로 갈 곳 없던 신영철 세터(현 대한항공 감독)를 영입해 명 세터로 조련했다. 신영철 세터가 활약했던 한전은 무명 팀에서 일약 상위권 팀으로 도약했고 신 감독 역시 남다른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1995년 삼성화재는 배구단을 창단하고 그에게 감독직을 제의했다. 하지만 그는 팀을 옮기기까지 많이 고민했다. 1998년 외환위기 여파로 고려증권 등 여러 배구팀이 해체되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탄탄한 공기업 부장 자리를 내놓고 신생 팀으로 가는 모험을 감행한 이유는 단 하나. 이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전 시절 현대자동차서비스(현 현대캐피탈)·고려증권(해체) 등에 종종 지곤 했던 그는 “지겹게 져봤기 때문에 새로운 팀에서 과거의 강팀을 이기는 배구를 펼치고 싶다”고 말하고 삼성 행을 택했다.

    결과적으로 이 선택은 대성공이었다. 그는 창단 2년 만에 팀을 우승시켰고 이후에도 밥 먹듯 우승을 거듭했다. 여기에는 삼성 구단의 전폭적인 지원도 한몫했다. 창단 직후 당시 ‘월드스타’로 이름을 날리던 김세진을 영입한 삼성화재는 1997년 한국 최고의 레프트 공격수인 신진식도 품에 안았다. 둘은 단순히 삼성화재라는 한 팀의 좌우 공격수가 아니라 국가대표팀의 좌우 쌍포였다. 둘을 다 보유한 삼성화재가 남자 실업배구를 석권하는 건 당연지사였다.

    신진식의 영입은 삼성화재의 최대 라이벌인 현대자동차서비스(현 현대캐피탈)와 스카우트 파동까지 겪으면서 벌어진 일이기에 지금도 인구에 회자된다. 당시는 아마추어 리그였지만 자유경쟁 스카우트를 할 때라 선수들의 몸값 상한선이 정해져 있는 현재의 프로배구보다 선수 몸값이 오히려 더 비쌌다. 당시 누구나 고교 시절부터 현대자동차서비스로부터 물심양면의 지원을 받아왔던 신진식이 현대를 택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삼성은 배구 사상 최고액을 베팅하며 신진식의 어머니와 그의 모교인 성균관대를 집중 공략했다. 당시 신진식이 받은 돈이 지금도 어마어마한 금액인 약 20억 원에 달한다는 주장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삼성화재는 이에 그치지 않고 1999년에도 당시 대학 최고 스타들인 장병철, 최태웅, 석진욱, 명중재를 모두 스카우트했다.

    엄청난 훈련으로 77전승의 신화를 쌓다

    이런 삼성화재의 선수 싹쓸이에 대해 비판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신 감독의 진가는 오히려 이때부터 발휘됐다. 조직력을 중시한 그는 스타 선수들에게 엄청난 훈련을 강요했다. 단순히 매일 정해진 훈련 프로그램을 소화하는 정도가 아니라 가령 달리기를 한다면 매일같이 선수 개개인이 자신의 기록을 갱신해나가야만 훈련을 끝내는 식이었다.

    전술 훈련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사람이 호쾌한 스파이크 등을 보기 위해 배구장을 찾지만 신 감독은 경기가 있건 없건 선수들에게 개인기 위주의 공격이 아니라 수비나 기본기에 바탕을 둔 훈련을 시켰다. 특히 서브리시브 훈련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선수들로부터 “너무 고되다”는 푸념을 자주 듣곤 했다. 선수와 부모 간의 만남도 극도로 제한해 선수 부모나 배우자들이 “여기가 군대냐”며 항의할 정도였다.

    신치용 감독 휘하에서 삼성화재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신진식 현 홍익대 감독은 “밖에서는 멤버가 좋아서 삼성화재가 우승했다고 하지만 정말 토할 정도로 열심히 연습했다. 이렇게 열심히 연습하는데 실전에서 지면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만 들 정도로 열심히 했다. 그렇게 1승이 쌓이고 쌓여서 77연승이 됐다. 배구 인생 최고의 기억”이라고 당시를 떠올린다. 덕분에 삼성화재는 2002년 시즌에는 시즌의 55경기를 전승했고 이를 77연승까지 확장했다. 아무리 다른 팀보다 우수한 전력을 보유했다 해도 77연승을 달성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와 관련 신 감독은 2009년 5월 기자와 인터뷰하면서 “창단 때부터 17년간 팀을 맡다보니 다른 사람이 그린 그림에 덧칠을 하는 게 아니라 백지에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남이 그린 그림을 넘겨받았다면 내가 원하는 조직 문화를 심기가 어려웠을 것”이라고 자평했다. 창단 후 3년간 틀을 다져놓은 게 지금껏 흐름을 유지하는 비결이라고도 덧붙였다. 아무런 성과를 보여주지 못한 신생 팀의 초짜 감독이 스타 선수들을 데려다 혹독한 훈련을 시킨다면 이를 고분고분 따를 선수가 몇이나 될까. 하지만 그는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성적으로 이를 입증하며 결국 선수들의 마음을 얻어냈다.

    당시 그는 “김응룡 전 삼성라이온스 사장이 해태타이거즈 감독으로 재직하던 시절 18년간 같은 팀의 감독을 맡아 국내 스포츠지도자 중 단일 팀의 최장수 수장 기록을 갖고 있다. 내가 그 기록을 깨고 싶다”고도 말했다. 현재대로라면 그가 이 기록을 깨는 건 별문제가 없어 보인다.

    노장들과 함께 새로운 전설을 이뤄내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삼성화재의 독주는 프로배구 출범 후 잠시 제동이 걸렸다. 프로배구가 출범한 첫해에는 우승에 성공했지만 2006년과 2007년 김세진과 신진식이 각각 삼성화재 유니폼을 벗고 주전 선수들의 나이가 많아지면서 자연스레 전력이 하락한 것. 이 와중에 최대 라이벌 현대캐피탈은 김호철 감독 취임 후 2005~06년 시즌, 2006~07년 시즌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신 감독은 이에 굴하지 않고 노장 선수들을 잘 다독여 2007~08년 시즌부터 2010~11년 시즌까지 내리 4연속 우승에 성공했다. 이 중 그의 지략이 특히 빛난 해는 2008~09년 시즌과 2010~11년 시즌이다. 2008~09년 시즌이 개막할 무렵, 삼성화재의 우승을 점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우승은커녕 챔피언 결정전에도 오르기 어렵다는 비관적인 전망까지 나왔다. 주전 선수들이 줄부상을 당했기 때문이다. 1라운드에서는 약체로 평가받던 KEPCO와 상무를 제외한 나머지 프로 팀에 연패를 당하기도 했다.

    신 감독은 2라운드를 앞두고 선수단과 함께 계룡산에 올라 이렇게 다독였다. “너희가 나이가 많은 건 나도 알고, 너희도 알고, 세상이 다 안다. 지금 와서 너희들의 실력이 더 늘지도 않을 거고, 새 선수를 영입할 수도 없다. 결국 우리끼리 팀워크를 발휘하는 방법밖에 없다. 결과가 나쁘면 어쩔 수 없지만 노력도 해보기 전에 나이 많고 키 작다고 우리끼리 변명하지는 말자. 배구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인데 우리끼리 합심해 못할 일이 뭐가 있겠느냐.” 1라운드 때만 해도 선수단 내부에 알게 모르게 “이 전력으로 우리가 어떻게 또 우승을…”이라는 자조적인 분위기가 퍼져 있었지만 이 분위기는 곧 반전됐다.

    2010~11년 시즌은 사정이 더 나빴다. 창단 후 처음으로 두 차례나 3연패를 당하는 등 한때 최하위인 7위까지 처졌다. 우승은커녕 플레이오프 진출도 힘들어 보였지만 가빈의 몰아치기로 대역전극을 펼치며 준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를 잇달아 통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승은 힘들어 보였다. 챔피언결정전에서 맞붙은 대한항공은 프로 출범 이후 처음으로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챔피언결정전에 직행해 선수단의 사기는 최고조에 달했고 체력 소모도 적었다.

    이에 7전4선승제의 챔피언결정전이 열리기 전에는 누구나 대한항공의 낙승을 점쳤다. 대한항공이 정규시즌 전적에서도 4승1패로 삼성화재를 앞선 데다 노장 선수들로 구성된 삼성화재가 준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를 거치면서 체력을 방전한 반면 대한항공은 20일 이상 쉬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삼성화재는 이 예상을 깨고 보란 듯이 4연승을 기록하며 4연패를 달성했다.

    그 비결은 뭘까. 패넌트레이스와 단기전은 성격이 다르다. 단기전은 무조건 경기 내용보다 결과가 중요한 만큼 ‘승리 방정식’을 최대한 활용해야만 이길 수 있다. 이 점에서 삼성화재는 확실한 무기를 보유했다. 신 감독 특유의 용병술, 오랫동안 우승하면서 다진 끈끈한 팀 조직력, 해결사 가빈 등이다. 특히 신 감독의 지략이 빛났다. 그는 향수병에 걸린 가빈에게 특별 휴가를 줬고, 나머지 선수들에게는 호된 훈련과 질책을 병행하는 심리전을 고루 활용했다. 경기가 의도대로 풀리지 않으면 작전타임과 비디오 판독 요청 등으로 상대의 흐름을 끊었고 에이스 가빈을 활용한 공격은 상대 팀으로 하여금 “알고도 막을 수 없다”는 탄식을 자아냈다. 결국 신 감독의 의도대로 삼성화재는 다시 정상을 밟았다.

    신치용 감독이 주는 경영 교훈

    1)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라

    읍참마속(泣斬馬謖). 삼국지의 제갈공명이 눈물을 흘리며 아끼는 장수 마속의 목을 베었다는 고사성어다. 마속은 가정(街亭) 싸움에서 제갈공명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산꼭대기에 진영을 세우는 바람에 대패했다. 제갈공명은 군율에 따라 마속을 처형했다.

    조직의 기강과 질서를 위해 아끼는 사람을 버린 제갈공명의 예는 훌륭한 지도자가 그만큼 공과 사에 엄격해야 한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리더가 공사를 구분하지 못하면 그 리더를 믿고 따를 조직원은 없기 때문이다. 특히 리더가 스스로 자신의 친인척을 싸고돌기 시작한다면 해당 조직의 기강이 제대로 확립될 리 만무하다.

    잘 알려진 대로 신 감독은 현재 사위를 휘하의 선수로 두고 있다. 2011년 신 감독의 차녀 혜인 씨와 결혼한 삼성화재의 공격수 박철우는 2010년 시즌 전까지 현대캐피탈에서 뛰다 자유계약 선수로 풀린 후 삼성화재에 입단했다. 오랫동안 공개 연애를 한 두 사람이기에 장인과 사위가 한 팀에서 감독과 선수로 뛴다는 사실에 관심을 갖는 시선이 많았다.

    사위를 맞은 신 감독은 누구보다 공과 사를 엄격하게 구분했다. 박철우의 경기력이 흡족하지 않으면 “빵점 선수”라며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2010~11시즌 챔피언결정전에서 대한항공에 4연승을 거두고 우승했지만 박철우의 경기력이 흡족하지 않다며 그를 선발로 기용하지 않았다. 결국 신 감독은 2010~11년 시즌이 끝난 후에는 해당 시즌의 활약도가 나빴다며 직접 나서서 연봉을 5000만 원이나 깎았다.

    사위가 현대캐피탈에 있을 때부터 정신력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해온 그는 한 가족이 된 후에는 사위를 냉혹하리만큼 엄격하게 지도하고 있다. 신 감독의 이런 태도는 그가 왜 17년간 정상을 유지하는지를 잘 보여줄 뿐 아니라 친인척과 관련된 문제로 툭하면 구설에 오르는 한국의 정재계 지도자들에게 상당한 교훈을 준다.

    2)리더십을 발휘하려면 전 조직원이 아니라 고참을 장악하라

    신 감독은 고참 선수들을 장악하면 팀 선수단 전체를 장악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 때문에 그는 어지간한 코치나 선수 본인보다 고참 선수들의 몸 상태를 꼼꼼하게 챙긴다. 경기력이나 몸 상태가 좋지 않은 선수에게는 냉정하다. 팀에 도움이 되지 않는 선수는 고참이라 할지라도 팀에서 내보낸다. 가슴이 아프지만 팀을 위한 일이다. 김세진 신진식 김상우 등 스타 선수들도 자신의 몸이 안 되자 신 감독과 논의한 끝에 은퇴를 결심했다.

    이런 신 감독의 성격을 잘 아는 고참들은 긴장할 수밖에 없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경기장으로 나가 운동한다. 지금도 삼성화재에서 훈련장을 가장 먼저 찾는 선수는 석진욱, 여오현 등 고참들이다. 이들이 제일 먼저 훈련장에 나와 가장 늦게 떠나니 후배 선수들도 따라 나와 운동할 수밖에 없다. 삼성화재의 훈련량이 많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신치용 삼성화재 감독
    천하의 신 감독이 석진욱(36)을 버리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의 키는 186㎝로 배구 선수치고는 단신인데다 몇 년 전 선수로는 치명적인 무릎 십자인대 수술도 했다. 요즘같이 키 큰 선수가 즐비한 상황에서 석진욱은 무리한 공격을 하지 않고 수비에만 치중해 최강 리베로 여오현과 함께 삼성화재의 그물 수비를 완성시킨다. ‘괴물’ 용병 가빈의 ‘몰빵배구’가 가능한 것도 석진욱이 뒤에서 잘 받아 올리기 때문이다.

    사회 전체가 젊은 사람들을 원하고 한시도 성적 압박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프로스포츠 감독이 노장 선수들을 우대하는 이유에 관해 신 감독은 이렇게 설명했다. “노장 선수들은 젊은 선수들보다 책임감이 훨씬 뛰어나고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경험과 연륜을 가지고 있다. 나이가 많다는 건 그만큼 경험이 풍부하다는 뜻이고, 키가 작으면 순발력이 좋아 서브와 리시브에서 강점을 지닐 수 있다. 우리 팀 고참들은 굳이 내가 일일이 지시하지 않아도 코트에서나 코트 밖에서나 모범을 보인다. 선배들의 그런 모습을 보면 젊은 선수들의 태도도 달라진다. ‘나도 열심히 운동만 하면 되겠구나. 나이가 많다고 함부로 내쳐지는 신세가 되지는 않겠구나’라고. 다른 팀에 가면 코치를 하고도 남을 선수들이 주전으로 뛰니까 후배들은 다른 팀보다 2배 많은 조언자를 갖고 있는 셈이다. 저절로 청출어람(靑出於藍) 효과가 생긴다.”

    3)정당한 규칙하에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무기를 동원하라

    신 감독이 제갈공명이라는 별명을 얻은 이유는 그만큼 그의 지략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그는 TV 중계가 뜨면 마이크 앞에서는 속공을 지시하는 말을 하면서도 세터에게 귀엣말로 후위 공격을 시킨다. 다른 감독들이 30초짜리 타임아웃을 활용해 상대의 좋은 흐름을 끊을 때 그는 비디오 판독이나 포지션 폴트(서브를 할 때 전위는 후위보다 네트 쪽에, 또 레프트는 라이트의 좌측에, 센터는 레프트와 라이트의 중간에 있지 않을 때 선언되는 반칙) 이의 제기 등으로 최소 2~3분, 길게는 10분 이상 시간을 끊는다.

    2011년 12월 25일 열린 삼성화재와 KEPCO의 경기에서 삼성화재는 1세트를 내주고 2세트도 밀리고 있었다. KEPCO의 서재덕이 서브를 하려 할 때 신치용 감독은 심판진에게 항의했다. 삼성화재 홍정표가 서브를 넣기 전에 후위에 있던 KEPCO의 김상기가 전위로 오는 포지션 폴트를 범했다는 이유에서다. 승강이가 오가고 신 감독은 비디오 판독을 요청했다. 심판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항의 때문에 경기는 10분 정도 지연됐고 상승세를 타던 KEPCO 선수들의 어깨는 식었다. 항의 이후 삼성화재는 2,3,4세트를 연달아 잡고 손쉽게 경기를 이겼다.

    이런 그의 태도를 좋지 않게 평가하는 시선도 있다. 하지만 신 감독은 “규칙을 어긴 것도 아니고, 정당한 규칙을 지킨다면 감독은 그 선 안에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무기를 동원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한다. 당시 경기에서 진 KEPCO의 신춘삼 감독도 “우리 팀이 그 이의 제기로 흐름을 놓쳤지만 이런 부분도 실력으로 극복해야 한다”고 밝혔다.

    신 감독은 언제나 “내가 저 팀 감독이면, 내가 저 선수 입장이라면 어떻게 행동할까”를 연구한다. 바둑을 둘 때 몇 수 앞을 예측하는 것처럼 저쪽에서 A를 선택하면 나는 B를 선택하고, 다시 C로 나오면 나는 D로 대응하는 식이다. “따라다니지 말고 앞서가야 한다. 남을 따라다니면 늘 2등밖에 못한다”고 그가 강조하는 이유다. 그는 예측이 어렵지 않으냐는 질문에 “요즘 같은 시절에 정보를 구하는 일이 얼마나 쉽나. 상대 팀이 경기 후 인터뷰하는 모습만 봐도 해당 감독의 습관과 성향을 알 수 있다. 몇 수 앞이 아니라 백 수, 천 수 앞의 움직임도 예측할 수 있다. 그런 작전 지시가 맞아떨어질 때 느끼는 희열은 말로 표현 못한다. 선수들이 감독을 바라보는 눈빛도 ‘저 감독은 내가 신뢰할 만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구나’라는 식으로 금방 달라진다”고 답변했다.

    4)조직원에게 조직 문화의 중요성을 끝없이 강조하라

    신 감독은 “훌륭한 지도자는 훌륭한 조직 문화를 만드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전술 하나 잘 만들었다고 그 감독이 훌륭한 감독이고, 경기 한 번 이겼다고 그 팀이 강한 팀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가 조직문화를 강조하는 이유는 감독이나 선수가 누구냐에 따라 움직이는 팀이 아니라, 조직문화에 의해 움직이는 팀이 가장 강한 팀이라는 지론 때문이다. 감독이 모든 선수의 움직임과 상황을 일일이 살필 수는 없고, 선수들의 정신을 바꿔놓으면 그 다음에는 자기들이 알아서 따라온다는 이유에서다.

    팀 스포츠에서는 특정 선수만이 소화할 수 있는 포지션이 분명 존재한다. 때문에 주전과 비(非)주전의 격차가 커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모든 선수가 주전이 될 수는 없다. 신 감독은 그렇다고 주전이 될 수 없는 선수의 인생을 낭비하게 만들 수는 없으며, 결국 이런 선수들에게도 자신의 역할과 임무를 부여하고, 자긍심을 심어주는 게 리더의 할 일이라고 믿는다.

    신 감독은 삼성화재의 가장 큰 장점이 훈련 때 선수나 스태프 중 아무도 노는 사람이 없다는 점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훈련에 참가하지 못하는 선수에게 “다른 동료에게 파이팅을 외쳐주거나 청소라도 하라”고 주문한다. “네가 지금 우리 팀에서 하는 일이 뭐라고 생각하느냐?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할 수 없으면 당장 팀을 떠나라. 아니면 네 스스로 일을 찾든가. 운동을 하든, 청소를 하든, 운전을 하든 어떤 식으로든 팀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내가 먼저 너를 버릴 거다”라고도 덧붙인다.

    신 감독이 가장 싫어하는 말은 무임승차다. 그는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해당 조직이 발전한다며 조직문화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했다. “우리 선수들은 시합이나 연습 도중 지칠 대로 지쳐도 감독이나 코치들에게 휴식을 원한다는 신호를 보내지 않는다. 감독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동료들의 눈치가 보여 쉴 수 없다는 문화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선수들 스스로 ‘쉬고 싶지만, 나보다 더 열심히 운동하는 동료도 쉬지 않는데 내가 어떻게 먼저 쉬겠는가. 프로라면 이 정도는 이겨내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고, 이런 마음이 선수단 전체로 퍼졌기에 삼성화재의 성공이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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