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이 성공적인 쿠데타 결과 예카테리나는 마침내 러시아의 새로운 황제가 됐고, 그의 치세는 대체적으로 성공적이었다. 대외적으로는 여러 차례의 전쟁과 외교 정책을 통해 당시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투르크 제국과 폴란드(Poland-Lithuanian Commonwealth)로부터 상당한 땅을 확보해 러시아의 영토를 남쪽과 서쪽으로 크게 확장함으로써 대러시아 제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예카테리나는 당시만 해도 유럽의 후진국이던 러시아에 발전한 서구 문화와 교육 제도를 도입해 러시아를 한 단계 끌어올리려고 노력했다. 특히 그는 예술과 문학 활동에 있어 든든한 후원자 역할도 해 오늘날 관광명소로도 유명한 겨울궁전 내의 에르미타주 박물관도 생전에 그녀가 수집한 소장품들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그러나 계몽주의 사상에 입각한 그의 정치철학은 너무 이상적이어서 상당 부분 탁상공론에 그치며 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그중에서도 귀족들에게 국유지와 농민을 덧붙여 하사하는 농노제의 확대는 러시아 백성의 큰 불만을 야기해 급기야 1773년 러시아 전역을 휩쓴 ‘푸카초프의 난’이 일어나게 된다. 스스로 표트르 3세로 칭한 전직 군인 푸카초프(Yumelyan Pugachov·1742~1775)가 주도한 이 농민 봉기는 1775년까지 계속되다 정부군에 의해 철저히 진압당하고 푸카초프도 모스크바에서 처형된다.
그런데 예카테리나 2세에 관해 이야기할 때 이런 정치·외교적인 행적 이외에 그녀가 사생활에서 보여준 화려한(?) 남성 편력도 꼭 따라 나온다. 앞서 말한 첫 외간 남자인 세르게이 살티코프를 필두로 황위에 오른 뒤에도 여러 남자와 관계를 맺었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21명의 남자를 두었고 마지막 연인은 환갑이 넘은 나이에 생겼다고 전한다. 연인들 중에서는 그의 쿠데타를 결정적으로 성공하게 만들어준 오를로프(Grigory Orlov·1734~1783), 폴란드 귀족 출신으로 예카테리나의 힘을 빌려 폴란드의 마지막 왕으로 즉위한 포이나토프스키(Stanislaw Poniatowski·1732~1798), 그리고 가장 가까웠던 연인으로 손꼽히는 포템킨(Grigori Potemkin·1739~1791) 등이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힌다. 예카테리나 2세는 연인들에게 사랑의 대가로 지위를 올려주거나 파격적인 금전적 보상을 서슴지 않았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이런 예카테리나 2세는 1796년 12월 16일 오전 9시가 조금 지나 드레스룸으로 이동하다 그만 쓰러지며 의식을 잃고 만다. 67세의 나이로 숨진 그의 사인은 뇌졸중이었다. 그의 장례는 유언대로 흰 옷에 황금 왕관을 쓴 채로 성대하게 거행된다. 그리고 그의 황위는 살티코프의 아들로 여겨지는 아들 파벨이 잇는다.
女帝를 살린 술 ‘리가 블랙 발삼’
그런데 이렇게 파란만장한 예카테리나 여제의 일생에서 술에 관한 매우 흥미 있는 에피소드 하나가 전해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바로 예카테리나 여제가 리가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리가는 구소련에서 독립해 현재 발틱 3국으로도 불리는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중 라트비아의 수도다. 리가는 북유럽의 중심 도시로 한때는 스웨덴의 지배를 받았으나 표트르 대제 시절인 1710년 전쟁으로 러시아가 점령한 뒤 계속 러시아 영토가 됐다. 표트르는 리가의 중요성을 인식했을 뿐 아니라 도시 자체를 사랑해 재위 기간 중에 규칙적으로 리가를 방문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도 이러한 전례에 따라 리가를 방문했다. 그런데 체류 기간 중 그는 심각한 병에 걸리고 만다. 지금 추정해보면 심한 감기 증세에 소화불량까지 겹친 중한 상태로, 궁중 의사들의 처방도 별 효험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주위의 권유로 리가 특산 약주를 마셔보기로 했다. 그 약주의 효과는 대단했다. 마신 지 얼마 후 그의 병은 씻은 듯 나았다. 이 일로 그 약주는 여제를 살린 술로 유명세를 탔고, 역대 러시아 황제는 말할 것도 없고 현대에 와서도 드골 프랑스 전 대통령과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까지 자주 음용했다.
이 술의 정식 명칭은 ‘리가 블랙 발삼(Riga Black Balsam)’. 애칭으로 ‘블랙 리가(Black Riga)’라고도 불린다. 18세기 중반 리가의 한 약사(Abraham Kunze)가 개발했다고 전해지는 이 술은 순수 보드카에 25종류의 약초, 향신료, 오일 등을 혼합해 만든 것이다. 알코올 도수 45%의 독한 술로 자세한 성분은 비밀이다. 이 술은 예카테리나 2세의 에피소드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전통적으로 감기치료 효과와 건위 작용(위를 튼튼하게 함)이 있는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술 이름에 블랙이란 말이 들어간 것은 짙은 술 색깔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명실 공히 라트비아 국민주로 자리 잡은 리가 블랙 발삼은 비단 라트비아에서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여러 주류품평회에서 수상하는 등 명성이 높아 리가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구입하는 필수 관광 상품이 됐다.
그러면 여기에서 리가 블랙 발삼과 비슷하기는 하지만 종류가 다른 유명한 약주와 인연이 있는 또 다른 계몽군주를 만나보자.
요제프 2세(Joseph II·1741~ 1790, 재임기간 1764~1790)는 18세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당시 프랑스의 부르봉 가문과 함께 유럽 왕실을 양분하고 있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이었다. 부친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란츠 1세(Franz I Stephan·1708~1765 재위기간 1745~1765)였고 모친이 그 유명한 합스부르크가의 전설적 여성 통치자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1717~1780)였다. 프랑스 혁명 와중에서 단두대의 이슬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프랑스 루이 16세의 부인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1755~1793)가 바로 그의 누이동생이다.
개혁적 계몽주의 이상 펼친 요제프 2세
요제프 2세는 어릴 때부터 정열적인 야망가이면서 한편으로는 전제적인 성격이 강한 인물로 전해온다. 그는 1760년 19세 때 첫 결혼을 하지만 결혼 3년 만에 부인이 죽고, 유일한 혈육인 딸마저 잃는 슬픔을 겪는다. 이 때문에 재혼을 망설였으나 당시 정략적인 이유로 어쩔 수 없이 바바리아 왕가 출신의 여자와 1765년 결혼한다. 그러나 이 부인마저 결혼 2년 만에 천연두로 사망하자 크게 상심한 그는 그 후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다.
요제프 2세는 그가 14세가 되던 해인 1765년에 아버지 프란츠 1세가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신성로마제국 황제 자리에 오른다. 그러나 황제로서 통치하기에는 너무 어려서 즉위 후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와 함께 왕국을 공동으로 통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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