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만하면 됐나?” 문경 공방에서 만든 작품을 들고. 그의 작품에는 60년 이상 구리와 불과 망치와 함께해온 그의 인생이 담겨 있다.
“주부들이 불탄 놋그릇을 한 광주리씩 이고 오면 새 놋그릇 한두 개와 바꿔 주고 헌 놋그릇은 녹여 새 그릇을 만들었습니다. 양대는 구리(순동)와 석(錫)의 합금 비율이 16냥 대 4냥 닷 돈, 대략 78대 22 비율인데 이를 지키지 않으면 메질을 견뎌내지 못해요. 그러니 기술자도 부족하고 급할 때는 합금비율이 비교적 자유로운 주물 제작이 하기 쉽죠.”
요즘은 구리합금으로 만든 그릇은 방짜든 주물이든 모두 놋그릇이라 부르지만 예전에는 구리와 석을 합금한 향동은 ‘놋’이라고 하고, 구리와 아연을 합금한 주동으로 주물 제작한 그릇은 ‘퉁’ 또는 ‘짐’이라고 구분해 불렀다.
어쨌든 탁 방주는 평화로운 때든 전시든 언제나 돈을 벌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봉주는 전쟁통에 조마조마하게 사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중공군이 밀려오자 이번에는 고향친구들과 함께 일찌감치 피란길에 올랐다. 대구에서 과자장사를 하고 교인들과 함께 제주도로 피란 가서는 뻥튀기장사, 엿장사도 했는데 머리와 기술이 좋은 그는 과자를 직접 만들고 강엿 대신 흰엿을 만들어 남보다 돈을 잘 벌었다. 고생스러운 전쟁이었지만 피란길에 아내가 될 오화선을 만났다.
전쟁이 끝나자 놋그릇의 수요는 최고조에 달했다. 탁 방주의 공방에서 쉴 새 없이 일하던 그는 다른 장인들이 탁 방주에게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대립하자 은인과 동료 사이에서 갈등하다 마침내 밑의 대장들과 함께 자신의 공방을 냈다.
“제 생각만 하면 은인인 탁 방주와 함께하는 것이 맞는데, 쫓겨난 장인들은 원대장이 없으면 모두 실업자가 됩니다. 저는 고지식한 사람이라 동료의 청을 뿌리치지 못한 거지요.”
탁 방주는 이를 서운하게 여겼는지, 옛 동료를 통해 공장 매매에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한참 뒤 그는 탁 방주를 찾아가 용서를 구해 두 사람은 관계를 회복했지만, 그때까지 그의 가슴 한구석은 늘 무거웠다.
사라지는 유기, 공방은 넘어가고
1960년, 전쟁 뒤의 호황이 끝나자 불경기가 시작됐다. 이듬해 5·16으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산림보호법을 만들어 숯을 못 굽게 했다. 양대는 숯, 그것도 소나무로 만든 ‘솥숯’으로만 불을 땐다. 다른 숯을 쓰면 불똥이 튀어 데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당장 작업에 차질이 온 데다 일반 가정에서도 연탄을 쓰게 되면서 놋그릇에 녹이 슬기 시작했고, 때마침 스테인리스 스틸과 알루미늄 그릇이 등장하자 사람들은 놋그릇은 거들떠보지 않게 되었다.
“방짜 그릇은 연탄가스 같은 유해한 성분에 즉시 반응합니다. 오히려 건강의 지표가 돼주는 것인데 불편하다고 등을 돌렸습니다. 방짜는 양조간장과 인공조미료가 들어간 음식을 담아도 색이 변합니다. 아파트가 생기고 건강을 챙기는 요즘에는 이런 방짜가 다시 환영받고 있어요.”
빚을 내 시작한 공장은 사업은 안되는데 이자는 눈덩이처럼 불어갔다. 그러나 이 일 말고 그가 할 수 있는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없으니 공장은 그와 가족의 생명줄이었다. 그는 하나님께 공장만은 구해달라고 다시 간절히 기도했으나 이번에는 하나님의 응답도 듣지 못했고 공장은 결국 문을 닫고 만다.
“대신 제 마음 자세가 바뀌었어요. 차분하게 현실을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그게 응답이었던 것 같습니다. 집까지 팔아 빚잔치를 하고 나니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더군요.”
그 뒤 노동판에도 나갔지만 마음을 잡지 못해 물고기를 잡으러 다니는 사이 아내는 호떡장사를 했다. 그러다 1960년대 말 그는 다시 일어섰다. 아내는 안되는 유기 공방은 그만두고 가게를 하자고 했지만 그는 공방을 새로 시작하기로 했다.
“사업이 잘될 때는 100만 원도 쉽게 꿀 수 있었지만 무일푼이니 5만 원도 빌릴 데가 없더군요. 아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1만 원씩 꾸었습니다. 이자도 못 주고 실패하면 원금도 못 갚는다고 말했는데, 모두 빌려주고 때로 더 많이 주기도 했습니다. 평소 신용 덕택이었죠.”
예전 대장들을 불러들여 염창동 그의 집 마당에서 일을 시작했다. 집에서 쇠를 녹여 바둑을 만든 다음 이를 리어카에 싣고 아현동 경기공고에 가서 해머를 빌려 네핌질(달군 바둑을 펴는 작업)과 우김질(편 바둑을 우겨서 형태를 만드는 절차)을 하고 다시 집에 갖고 와서 제질(본격적인 성형·成形)과 가질을 했다. 염창동에서 아현동까지 쇳덩이를 리어카로 실어 날라야 했지만 새로 일을 시작했다는 기쁨에 힘든 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