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황승경의 ‘눈으로 듣는 음악’ ⑧

‘마에스트로의 전설’ 구스타프 말러와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 황승경 │국제오페라단 단장·공연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마에스트로의 전설’ 구스타프 말러와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2/3
‘독종’ 구스타프 말러

말러의 나이 42세 때 화가 에밀 쉰들러의 딸로 19세 연하인 작곡가 알마 쉰들러(1879~1964)와 결혼했다. 그녀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 ‘키스’의 실제 주인공이라는 설이 있을 정도로 클림트를 비롯한 많은 남성으로부터 구애를 받은 만인의 연인이었지만 말러의 음악성에 매료당해 그와 결혼한 것이다. 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작곡가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1871~1942)는 알마에 대한 쓰라린 실연의 상처와 고뇌를 교향악적 환상곡 ‘인어공주’로 승화해 발표했다.

알마 쉰들러는 당시 최고의 지휘자이자 작곡가인 말러가 자신의 음악을 새로운 세계로 인도해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렇지만 말러는 젊은 아내에게 작곡을 그만둘 것을 강하게 권하면서 내조자 역할에 만족하라고 요구했다. 그래도 결혼 초기에는 예술적 신뢰가 바탕이 된 사랑 속에 비교적 행복한 결혼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고, 그의 5번 교향곡을 비롯한 몇 작품에 이러한 안정된 생활이 잘 나타나 있다. 그렇지만 큰딸 마리가 성홍열(급성 감염성 질환)로 기관지 절개 수술까지 했지만 5세 때 세상을 뜨면서 두 사람 사이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말러가 결혼 전 프리드리히 뤼케르트의 시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를 연가곡으로 만든 것도 형제 13명 중 8명을 어린 시절에 떠나보낸 기억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그에게 딸 마리의 죽음은 자신의 영혼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가 음표로 절실하게 표현했던, 자식을 잃은 고통과 분열을 딸의 죽음을 통해 직접 겪으면서 그의 인생에서 처음 찾아온 안정된 생활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이후 설상가상으로 심장병 진단을 받은 말러는 10년 동안 일하던 빈 왕립오페라극장에서 물러나야 했다.

“너를 위해 살고 죽는다, 알므시”



말러는 그러나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덕분에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에 자리를 얻어 미국으로 갈 수 있었고, 3년이 조금 넘는 기간 미국을 돌며 정열적으로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그랬지만 미국에서도 그에 대한 평가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소수의 열광적 지지와 다수의 반발로 나타났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음악에만 집착했고, 가정에는 오직 냉기와 침묵만이 맴돌 뿐이었다.

그런데 부인 알마는 이 같은 분위기를 감당하기에 너무나 젊고 아름답고 자유로운 여자였다. 그녀는 자신의 새로운 사랑을 젊은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1883~1969)에게서 찾았다. 알마의 연인은 실험적 건축학교 바우하우스를 창설하고, 하버드대 교수를 역임한 사람으로 말러보다 23세 어렸다. 어느 날 말러는 그로피우스가 아내에게 쓴 편지를 읽고 이 사실을 알게 되지만, 후에 조각가가 된 둘째 딸 안나(1904~1988)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나이 든 남편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는지 알마는 불꽃 같은 그로피우스와의 사랑을 버리고 말러 옆에 머물렀다. 그렇지만 초창기와 같은 행복한 생활은 아니었다.

말러는 지휘자로서 음반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그가 연주했던 총보(모음 악보)에 남긴 세밀한 악상기호들을 보면 그가 얼마나 꼼꼼하고 철저하게 준비하면서 완벽한 음악세계를 건설한 사람인지 잘 알 수 있다. 그의 음악에는 섬광처럼 강타하는 불꽃과 거대한 고요와 황량한 고독으로 이루어진 체념이 들어 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말러가 음악에 대한 엄청난 열정과 의지를 가진 변방 출신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지휘할 때 말러는 섬뜩할 만큼 냉정한 자제력을 보여주는 한편 격렬한 움직임으로 광기 어린 고통의 절규를 표현해 주위를 압도했다. 극도로 지친 상태에서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일하던 말러는 아내의 두 번째 부정을 알게 되고는 자신이 작곡하던 미완성 교향곡 10번의 악보에 ‘너를 위해 살고 너를 위해 죽는다, 알므시(알마의 애칭)’라고 적었다.

연주 때마다 필생필사의 심정으로 임하던 그는 1911년 2월 폐렴으로 극심한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의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뉴욕 카네기홀에서 생애 마지막 연주를 하고 쓰러졌다.

결국 말러는 51세로 생을 마감하고 빈 교외의 작은 공동묘지에 쓸쓸하게 묻혔다. 일부 사람들이 그의 묘지를 베토벤, 슈베르트, 요한 슈트라우스, 브람스 등이 안장되고 모차르트(가묘)의 기념비가 있는 빈의 음악가묘지에 안장시킬 수 없다며 강경하게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의 묘지가 빈의 관광코스인 음악가묘지에 없는 이유다.

말러의 사후 알마는 그녀는 첫 외도 상대였던 건축가 그로피우스와 재혼했다. 그런데 이 결혼도 알마가 극작가 프란츠 베르펠과 다시 사랑에 빠짐으로써 파탄이 난다. 베르펠과 세 번째 결혼을 하게 된 알마는 이후에도 많은 남자와 염문을 뿌리다가 말러가 세상을 뜬 지 53년이 지난 1964년에 심장마비로 85세의 생을 마감했다.

앙코르 외치는 관객에게 욕설 퍼부은 토스카니니

지독한 완벽주의자로 악명을 떨친 사람이 말러뿐은 아니었다.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는 1867년 이탈리아 중북부 파르마에서 가난한 재봉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가리발디를 추종하는 ‘붉은 셔츠단’ 일원으로 애국운동에 빠져 전국을 떠돌아 다녔고, 어머니 혼자 집안 살림을 꾸려나가야 했기 때문에 어린 토스카니니는 어머니의 사랑조차 마음껏 받지 못했다. 그는 일찍부터 파르마음악원에 다니면서 첼로와 작곡을 공부했다.

그는 음악의 객관적 정확성과 투명성을 고집했고, 그 어떤 주관적 해석도 가미되지 않은 청아한 음색을 오케스트라에 요구했기 때문에 그의 음악은 종종 매섭고 차갑다는 평을 받는다. 눈이 좋지 않아 다섯 줄에 걸쳐져 있는 음표를 정확하게 구분할 수 없었던 토스카니니는 아예 통째로 암보(暗譜)해버려 ‘전설적인 암기력’이라 칭송받았다.

사실 지휘자로서의 토스카니니는 엉겁결에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19세에 첼로 연주자로 간 남미 해외연주에서 ‘아이다’의 지휘자가 병석에 눕는 일이 벌어지자 전곡을 암기하고 있던 토스카니니가 지휘봉을 쥐면서 지휘인생이 시작됐다. 이후 1898년 32세의 나이로 그는 오페라의 자존심인 밀라노 스칼라 극장 예술 감독으로 부임해 10년 동안 일했다. 여기에서 그는 자신의 능력과 성실성을 유감없이 발휘했고, 단원들에게는 절대 복종을 요구하면서 그가 이상으로 삼는 최고 음악을 고집했다. 한편으론 도처에 깔려 있는 관습과 인습에 맞섰다. 그는 무대 위에서 앙코르를 외치는 관객을 향해서도 무자비하게 욕설을 퍼부을 정도였으니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에게 한 욕설과 모욕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2/3
황승경 │국제오페라단 단장·공연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목록 닫기

‘마에스트로의 전설’ 구스타프 말러와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댓글 창 닫기

2019/10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