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콩가루를 푼 ‘풋닛가루’를 실에 묻히는 ‘매기’ 작업.
뜨거움 속에서 태어나는 시원함, 그것이 바로 모시다. 한여름 무더위를 식혀주는 청량한 촉감의 모시는 찜통 같은 열기 속에서만 짤 수 있다.
“모시 실은 건조하면 쉬 끊어져 아무리 더워도 바람이 통하지 않게 문을 꼭 닫고 눅눅한 상태에서 짜야 합니다. 예전에는 부엌 한쪽에 땅을 파 움막을 만들어 그 안에 들어가서 짰다고 해요. 6월 말 장마 때부터 8월 말 처서 전까지 후텁지근한 날씨가 제일 짜기 좋지요.”
기분 좋은 훈풍이 부는 봄이나 건조한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모시 짜기는 여의치 않아진다. 그래서 예부터 “찔레꽃 필 무렵이 모시 짜기 제일 힘들다”고 했다.
“날씨가 건조하면 실이 굳어서 바디(베틀에서 실을 끼우는 장치로 이 바디를 움직여 옷감을 짠다)가 잘 내려가지도 않게 돼요. 그럴 때는 정말 울고 싶은 심정이 되지요.”
바디 살은 참빗처럼 촘촘한데 그 촘촘한 살 사이로 모시 실(날실)을 두 가닥씩 끼우고 씨실은 북에 넣어 날실과 씨실을 교차해 짜게 된다. 모시 날실은 콩가루 풀을 먹였기 때문에 날씨가 조금만 건조해도 뻑뻑해져서 바디에 달라붙어버리고 실도 잘 끊어진다. 실이 끊어지면 일일이 모시 실로 잇고 다시 누에고치에서 뽑아낸 ‘풋숌(명주솜실)’으로 이어줘야 한다. 그래도 요즘엔 가습기를 틀어놓고 짤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한다.
젖먹이가 모시 일을 하다
방연옥이 모시 일을 시작한 것은 놀랍게도 ‘젖 먹던 시절’부터다.
“제가 막내여서 여섯 살까지 젖을 먹었는데, 그때 어머니 따라 동네 아낙네가 모여 같이 모시 하는 자리에 갔다가 자연스레 시작하게 된 겁니다.”
모시 베를 짜는 일은 각자 집에서 했지만, 말린 모시풀 줄기를 입으로 째고(길이로 가늘게 찢어 실로 만드는 작업), 그렇게 만든 실을 무릎에다 대고 침을 묻혀 잇는 모시삼기를 충청도 서천군 여인네들은 모여서 함께 했다. 어린 방연옥은 어머니 가슴에 매달려 젖을 빨다가도 곧잘 어른들 일하는 모양을 흉내 내어 실을 잇곤 했다. 그래서 나중에 방연옥이 뒤늦게 모시 짜기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을 때, 그의 어머니는 “너는 여섯 살 때부터 모시 일을 한 사람”이라고 했다. 다 큰 아이가 어머니 젖을 찾는다고 어른들에게 곧잘 야단을 맞았지만, 여름이면 모깃불을 피워놓고 겨울이면 아낙네들이 호롱불 앞에 모여서 수다를 떨며 모시를 째고 삼던 그 시절은 그에게 아주 포근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 같다.
“초등학교 들어가서도 계속 그 자리에 끼어서 일을 했어요. 모깃불이 꺼지면 제가 다시 붙이고, 또 누군가 우스갯소리를 하면 같이 웃고…. 참 재미났어요.”
지난해 모시 짜기가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등재된 데에도 이런 공동체 문화 속에서 전승돼온 기술이라는 점이 큰 매력으로 작용했다. 우리 전통 명절 추석 역시 신라시대 여인네들의 길쌈놀이에서 연유했고, 여러 지방의 길쌈노래도 전해지니 길쌈 전통은 우리네 풍속과 깊이 맞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전통 속에서 어른들 틈에 끼어 자연스레 익힌 방연옥의 솜씨는 열 살이 되자 실을 매끈하게 이을 정도로 발전했다. 그러나 모시 일을 누구나 다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방연옥과 달리 또래 아이들은 모시 일을 하기 싫어했다.
“이 고장 여자는 누구나 모시 일을 해야 했어요. 하지만 모두 다 그 일을 좋아할 수는 없잖습니까? 특히 아이들은 집에서 하는 모시 일이 힘들고 지겨웠을 겁니다. 저요? 저는 학교에서도 모시가 눈에 어른거릴 정도로 모시 일이 좋았어요.”
그의 집에서도 어머니와 언니가 모시를 했는데, 그는 식전부터 일을 거들다가 학교에 오면 공부는 머리에 안 들어오고 얼른 집에 가서 일을 계속할 생각만 했다. 출생신고가 늦은 바람에 두 살 늦게 들어간 학교 공부는 그에게 좀 ‘시시’했다.
“학교 들어가기 전 한글은 뗐고, 학교 가서는 구구단만 배우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나이가 많아서였는지 공부가 별로 안 어렵더라고요. 쉬는 시간이면 친구들이 나가 노는 사이 저는 숙제를 다해놓고, 집에 와서는 모시 일에만 매달렸습니다.”
공부도 곧잘 하는 데다 모시 일도 잘 도우니 동네 어른들은 모시 일 하기 싫어하는 아이를 나무랄 때면 “막내(그의 별명이 막내였다) 좀 본받아라”라는 말을 했고, 친구들은 그에게 “너 제발 모시 일 좀 그렇게 열심히 하지 마라”고 그를 원망했다. 그런데 어린 막내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모시 일에 매달렸을까.
“모시 많이 하면 부자 되는 줄 알았어요. 논도 사고 밭도 사고…. 어린 소견이었지만요.”

“솔직히 노는 것보다 베 짜는 게 더 재미있었습니다. 지금도 가끔 사람들이 ‘평생 모시 일 하는 게 질리지도 않으냐?’고 묻지만, 힘들 때는 있어도 질리는 마음은 안 들더라고요.”
아무리 재주가 좋아도 그 일을 지겨워하면 진정한 장인(匠人)은 될 수 없다. 그와 동년배인 많은 여성이 모시를 솜씨 있게 째고 삼고 짰지만, 그들이 기억하는 모시 일은 서러움과 고통으로 얼룩져 있다. 방연옥이 중요무형문화재가 된 데는 아마 솜씨나 운보다도 일을 좋아하는 그의 본성 덕이 더 컸으리라. 예순 중반인 지금도 일요일까지 이곳 한산모시관에 나와 작업을 하거나 관광객 앞에서 시연하고, 일주일에 사흘 제자들을 가르치며, 집에서는 또 논일과 밭일까지 한다. 힘들지 않으냐는 질문에 그는 고개를 흔든다.
“사람에겐 일거리가 꼭 있어야 해요. 그리고 저는 일이 싫지가 않아요.”
그가 일을 좋아하고 자꾸 하게 되는 원동력은 여느 장인과 마찬가지로 창조의 기쁨이다. 씨 뿌리고 가꾸면 열매를 맺는 농사처럼 모시 역시 완성했을 때의 기쁨이 적지 않다.
“어렵게 배운 기술로 힘들게 모시를 짜서 드디어 작품이 나오면, 이게 정말 내가 한 건가 싶을 정도로 신기한 기분이 들어요. 제게서 모시를 사간 사람이 입어보고 좋다고 칭찬해줄 때, 그때 제일 보람이 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