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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함께하는 우리 산하 기행 18

갇힌 땅에서 울리는 노랫소리

단종 유배지 강원 영월

  • 최학│우송대 한국어학과 교수 jegang5@yahoo.com

갇힌 땅에서 울리는 노랫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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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 읍내에 들어서면서 곧바로 단종릉을 만나게 된다. 단종릉을 먼저 둘러보고 이어 관풍헌에 들렀다가 그다음 청령포를 구경하는 것이 비운의 소년왕 흔적을 더듬는 역사 탐방의 무난한 코스가 된다. 청령포라는 아름다운 자연이 없다면 굳이 단종을 떠올려서 무엇하랴. 단종 때문에 영월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영월에 온 김에 단종을 만나보는 것이 훨씬 경쾌한 나그네 걸음이 될 수 있다.

단종릉은 왕릉의 격식을 따르면서도 양식은 아주 단출하다. 야산을 오르듯 비탈을 올라 능묘에 이른 사람들이 안쓰러운 낯빛으로 무덤을 둘러본다. 찰라나마 한 인간의 무덤 앞에 서서 555년 전의 사건을 더듬고 그 애절한 죽음에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것도 역사 교육의 힘이다. 포석이 깔린 묘역의 길을 걸을 때마다 내 발바닥에 밟히는 것은 그 억센 생명력을 지닌 질경이들이었다.

물길은 굽이 돌아 산을 가두고

산맥은 또한 휘어 돌아

물길을 막는다.



잔잔한 물살에 발을 적실 때

어느새 푸른 물길을 열고

충신 엄홍도가 물장구치며

앞질러 헤엄쳐 가고 있다

목 메인 마음 전마선에 오르면

물 건너 풀섶에 열여섯 살 노산군이

서성거리는 모습도 보인다

- 하현식 시 ‘청령포에서’ 앞부분

청령포 강물을 건너는 시인의 감정이 상당히 고양돼 있다. 엄홍도는 사약을 받고 죽은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영월 호장이었다. 강기슭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시신을 거두어 지금의 장릉 자리에 암매장 한 덕에 그 이름이 역사에 남았다. 시인의 눈에는 풀섶을 서성거리는 열여섯 살 단종의 모습이 보이지만, 비정한(?) 내게는 청정한 자연의 풍광만이 가슴 환하게 안겨든다. 그러면 어떤가. 모든 객체와 물상은 보는 이의 주된 정서로 덧칠되는 것이 아니던가.

청령포는 그 자체로 빼어난 산수미를 다 갖추었다. 산을 어루만지며 유연히 휘어 도는 맑은 강줄기와 수줍은 듯 속살을 내밀고 있는 모래톱, 그 너머의 울창한 솔숲과 용용한 산봉들이 함께 어우러져서 탁월한 풍경화 하나를 만들고 있다. 나는 차라리 이런 풍경에서는 소년왕에게 걸쳐진 피비린내 나는 역사쯤은 잠시 잊기로 마음먹는다.

청량한 공기가 가득한 숲길을 걸어들면, 숨겨놓은 부잣집 별장 같은 단종 어가(御家)를 만난다. 물론 예전의 그 집은 아니다. 팔작지붕의 기와집과 초가집을 복원해놓고 인형으로 당시 왕자(王者)의 귀양살이를 재현해놓았다.

어가를 나와 다시 솔숲을 지나면 강줄기를 돌려놓은 바위 벼랑 위에 설 수 있다. 전망대라 일컫는 바위 위에서 바라보는 서강 주변의 풍경 또한 수려하다. 이 길을 오르는 도중에는 단종이 부인을 그리워하며 돌을 쌓아 만들었다는 망향탑이 있고 전망대 옆쪽으로는 단종이 자주 서울을 바라보며 서 있곤 했다는 노산대도 있지만 그랬거니 여기고 일별하고 지나쳐도 무방할 듯싶다.

유폐 이듬해인 1457년 10월 마침내 단종은 관풍헌에서 사약을 받고 절명한다. 공교롭게도 왕명을 받들어 사약을 들고 온 이는 지난날 단종을 호송해서 청령포에 안치시켰던 금부도사 왕방연이었다. 속설에 의하면, 왕방연은 차마 어명을 받들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공명심을 가졌던 통인 하나가 단종의 뒤에서 활시위로 목을 졸라 죽였다고 한다. 아무튼 숨이 끊어졌음을 확인하면 금부도사의 임무는 끝난다. 이미 지난해 단종을 청령포에 유폐시키고 떠나던 때 그 안쓰러운 마음을 시 한 수로 남겼던 왕방연으로서는 소년왕의 시신까지 확인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한스러웠으리라. ‘천 만 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로 시작되는 그의 시조를 새긴 돌 하나가 서강 언덕에 서서 청령포를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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