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호

“나를 윤이상 같은 변절자와 비교하지 말라”

북한이 버린 천재 음악가 정추 1923~2013

  • 송홍근 기자 | carrot@donga.com

    입력2013-07-19 1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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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검은머리 차이코프스키’…향년 90세 永眠
    • 1957년 모스크바서 反김일성 시위 주도
    • ‘불귀의 망명자’로 마감한 70년 음악 인생
    • 윤이상, 김원균, 정추의 엇갈린 인생 항로
    • “죽거든 고향에 묻어달라” 유언
    “나를 윤이상 같은 변절자와 비교하지 말라”
    분단의 질곡에 날것으로 부딪치면서 한 편의 영화 같은 삶을 살아온 남자가 5월 13일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별세했다. 음악가 정추(1923~2013). 한반도가 낳았으나 한국에서도, 북한에서도 버림받은 비운의 천재다.

    광주→평양→모스크바→알마티

    고인은 1923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1942년 일본 니혼(日本)대에 입학해 음악을 공부했다. 이후 일제에 강제징병 당했다. 오사카에서 8 ·15광복을 맞았다. 1946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영화동맹 초대 서기장이던 친형 정준채를 따라 월북했다.

    1952년 세계 3대 음악원 중 하나인 모스크바 국립 차이코프스키 음악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6 ·25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을 때다. 1957년 모스크바에서 김일성 우상화 반대 시위를 벌였다. 그 길로 50년 넘게 망향(望鄕)의 세월을 보냈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인물은 헤아릴 수 없이 많겠으나 정추처럼 극적인 일생을 산 이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일제강점기엔 ‘황국신민’, 광복 후엔 북한 공민, 북한에서 버림받은 뒤엔 무국적자(카자흐스탄에서 17년간 그는 국적이 없었다), 그 뒤엔 소련 공민, 소련이 붕괴한 후에는 카자흐스탄 국민으로 살았다.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나 사회주의자가 됐다가 혁명국가 건설에 일조하겠다면서 38선을 넘었고 김일성 우상화에 반대한 후 고난의 삶을 끌어안았다. 말년엔 북한 독재집단을 타도하겠다고 나섰다.



    고인은 1992년 일본에 망명한 남로당 마지막 총책 박갑동(1957년 탈북)을 비롯한 망명객들과 힘을 합쳐 조선민주통일구국전선(구국전선)을 결성해 사망할 때까지 의장을 지냈다. 차이코프스키 음대 졸업 작품 ‘조국’, 스탈린 독재 시절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한 고려인의 한을 담은 교향조곡(몇 개의 악곡을 모아서 만든 교향곡) ‘1937년 9월 11일 17시 40분 스탈린’, 통일조국의 애국가가 되기를 바라면서 작곡한 ‘내 조국’이 대표작이다.

    고인의 생전 증언을 바탕으로 그의 삶과 음악을 재조명해본다.

    越北했지만 평생 反北 외쳐

    “나를 윤이상 같은 변절자와 비교하지 말라”

    정추는 5월 14일 카자흐스탄 알마티 근교 부른다이 묘지에 묻혔다.

    그는 광주의 부호이던 외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30년대 외할아버지댁에 그랜드 피아노가 있었어요. 예술인 집안이었죠. 외삼촌도 베를린 음대를 졸업했어요.”

    그는 일곱 살 때 노래를 작곡하는 등 어릴 적부터 천재성을 드러냈다. 집안 분위기가 예술적 감수성을 간질였다고 한다. 형제들도 예술가로 활약했다. 형 정준채는 1950년대까지 북한에서 영화감독으로 활약했다. 현재 서울에 거주하는 동생은 동요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을 작곡한 음악가다.

    “1938년 광주서중 다닐 적에 조선어 사용 문제로 일본인 교관과 다퉈 퇴학당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양정고보에 편입해 졸업장을 받았어요. 1942년 니혼대 음악학과에 입학해 음악을 공부했습니다.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고 싶었는데, 은사께서 전문성을 키운 후 그것에 기초해 나라를 위해 일하라고 조언하시더군요. 1944년 일본군에 강제 징집됐습니다. 친구들과 탈영을 도모하고 있을 때 일본이 패망했어요.”

    니혼대 재학 시절 그는 형 정준채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자가 돼 있었다. 해방 공간에서 좌익 영화계의 중심인물이던 정준채는 1946년 사회주의 혁명 분위기가 고조되던 북한으로 건너갔다. 그는 북한에 도착한 직후 동생을 평양으로 불러들였다.

    “어머니가 나를 끔찍이 사랑했어요. 며칠 동안 평양에 다녀오겠다고 어머니께 말씀드리고 38선을 넘었죠. 그러곤 어머니 얼굴을 지금껏 뵙지 못했습니다.”

    월북 후 평양음대에서 학생을 가르쳤다. 1952년 사회주의 종주국의 수도이면서 사회주의권 문화·예술 중심지이던 모스크바로 유학을 떠났다. ‘김일성훈장’을 받은 북한의 ‘음악 영웅’ 김원균(1917~2002)이 모스크바 시절 그의 유학 친구다. 차이코프스키 음대에서 정추와 함께 공부한 김원균은 북한의 ‘애국가’와 ‘김일성 장군의 노래’ 등을 작곡했다. 북한 최고의 음대(김원균평양음악대학)에 자신의 이름이 붙는 영예를 누렸다.

    정추는 1957년 10월 17일 모스크바대 광장에 서 있었다. ‘청년 정추’의 외침은 쩌렁쩌렁했다.

    “북한에 김일성 숭배가 있다는 게 사실 아닌가. 소련에서도 스탈린을 격하한다. 독재는 마르크스 사회주의를 배반하는 것이다.”

    1956년부터 북한에서는 김일성 주도로 반(反)종파 투쟁이 일어났다. 남로당파에 이어 소련계, 옌안계를 숙청하면서 정추, 김원균 같은 유학생을 상대로도 사상 검열을 했다. 정추를 비롯한 일부 유학생은 ‘반종파 투쟁은 김일성 우상화로 가는 길이며, 그것은 스탈린주의의 우상숭배와 다를 게 없다’고 결론지은 후 반(反)김일성 시위를 조직했다.

    정추는 1957년 모스크바에서 벌어진 시위의 주동자 중 하나였다. 북한 당국은 모스크바 유학생 전원을 평양으로 소환해 조사를 벌였다. 김원균은 이 과정에서 평양으로 되돌아갔다. 정의롭지 못한 권력에 저항한 음악가(정추)는 불우했고, 권력 품에 안긴 작곡가(김원균)는 영예를 누렸다. 정추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김일성이 소련계도 잡고, 옌안계도 잡고, 갑산계도 잡고, 남쪽에서 온 사람들도 다 잡아버렸어요. 소련계 한인 허가이는 6·25전쟁 때 김일성이 하는 일을 마뜩잖게 여겼어요. 허가이는 그 나름의 힘을 가진 인물이었어요. 허가이가 김일성을 제압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죠. 결과적으로 허가이는 김일성을 살려 놨는데, 김일성이 허가이를 죽여버린 겁니다. 허가이는 1953년 자살했고, 박헌영은 1955년 사형선고를 받았죠. 나 같은 경우는 모스크바에서 쫓겨나 평양으로 붙들려 갈 뻔했고요. 시위를 주도한 데다 남조선에서 왔으니 평양에 갔다면 죽었을지도 몰라요.”

    反김일성 시위 주도

    정준채도 권력투쟁 과정에서 숙청됐다.

    “형님이 1956년에 평양에서 최승희 무용극을 영화로 찍었습니다. 그런데 녹음장치 같은 것이 제대로 준비가 안 됐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북한 당국이 형님을 모스크바에 보냈습니다. 모스크바에서 필름을 현상하고 편집하느라 2~3개월 머무른 뒤 평양으로 돌아갔어요. 형이 모스크바에 왔을 때 소련은 들떠 있었습니다. 또 다른 혁명의 시기였죠. 선생들이 스탈린의 잘못을 하나둘씩 폭로했습니다. 학생들도 그것에 호응해 별의별 이야기를 다 했고요. 우리 음대만 해도 미학 선생인 완슬라브 교수가 스탈린 탓에 무고한 시민 수천만 명이 죽었다는 얘기를 해줬습니다.

    그런데 스탈린이 한 짓이 김일성이랑 비슷한 거 아닙니까. 형이 그런 분위기를 지켜본 후 평양으로 돌아갈 때 내가 비행장까지 나가 전송을 했습니다. 북한에서는 아무도 모르는 소식을 형은 모스크바에서 다 알고 간 것 아닙니까. 그 뒤로 형과 연락이 닿지 않았습니다. 수년 후에 ‘조선영화’라는 잡지를 보니 남쪽에서 형이 데리고 올라간 사람들의 이름이 다 빠져 있더군요. 물론 정준채라는 이름도 없었고요. 그렇게 해서 형이 숙청됐다는 것을 알게 됐죠. 형은 물론이고 형수와 5∼6명 되던 조카들마저 모두 검덕수용소로 갔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는데, 확실한 행방은 몰라요.”

    “나를 윤이상 같은 변절자와 비교하지 말라”

    정추는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50년 넘게 망명객으로 살았다.

    북한은 소련 당국에 정추를 체포해 송환해달라고 요구했으나 소련 당국은 절충안을 제시했다. 당시는 소련계 숙청 등으로 북한-소련 관계가 경색됐을 때다. 북한은 “흐루시초프의 소련이 수정주의 노선을 걷고 있다”고 비판했다.

    소련 당국은 정추를 북한에 송환하는 대신 알마티로 ‘유배’를 보냈다. 반(半)백년 넘는 망명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수일간의 기차 여행 끝에 톈산(天山)산맥 아래 도시,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알마티에 도착했어요. 이방인으로서의 삶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北 애국가는 주체사상 찬송가”

    북한의 영웅 김원균에 대한 그의 감정은 곱지 않았다.

    “김원균은 별명이 ‘사또’였어요. 유학 시절 함께 어울려 다녔죠. 나와 그치의 운명이 갈린 것은 김일성 우상화 반대 시위 때죠. 나는 조국 독립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자가 됐지만, 스탈린주의는 옳지 않다고 여겼어요. 스탈린이 죽고 흐루시초프가 집권하면서 소련에서 스탈린 격하운동이 벌어졌습니다. 그 과정에서 북한의 김일성 우상화 행태에 대한 비판적 여론이 모스크바 유학생 사이에서 확산됐죠.

    김원균은 내가 김일성 반대 연설할 때 현장에 있기는 했어요. 그런데 김원균이 방학 때 북한 유학생들에게 잠깐 평양에 다녀와야 한다고 꾀었던 모양입니다. 다른 학생들이 걱정하지 않게 집도, 책도 두고 몸만 잠깐 갔다 오면 된다면서 평양으로 데리고 갔어요. 유학생을 대상으로 포로수용소에서 하는 것처럼 한 명씩 사상 검토를 했다고 합니다. 김일성 비판이 옳다는 사람들은 다 잡아 가뒀고요. 김원균은 소련에 유학 온 김일성의 조카딸에게 연인 감정을 갖고 있었어요. 조카딸은 공부도 못하고 러시아말도 서툴렀습니다. 김원균이 김일성의 충복 노릇을 한 것은 ‘김원균평양음악대학’이란 명칭으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으로 시작하는 북한 ‘애국가’는 완전히 찬송가예요. 그도 그럴 것이 주체사상은 세계 10대 종교 중 하나 아닌가요? 주체사상에 딱 맞는 찬송가가 ‘애국가’인 거예요.

    김원균의 실력이요? 실력은 무슨, 뭐 어디 음악학교에 다닌 적도 없고, 일제강점기 에 독실한 기독교인이어서 찬송가나 알고 있는 형편이었어요. 다만 그치가 작곡한 ‘김일성 장군의 노래’는 나쁘지 않아요. 나름대로 잘 만들었습니다. 북한 당국이 김원균을 주제로 한 영화를 제작해 김원균과 나를 비교한 적도 있습니다. 하나는 김일성 반대해서 여기 남고, 하나는 김일성 찬양해서 그리로 돌아가고…. 그 사람은 아마도 평양에서 최고의 영예는 다 받았을 겁니다.”

    “나를 윤이상 같은 변절자와 비교하지 말라”

    1 1955년 모스크바 차이코프스키 음대의 북한 유학생 중 김원균(뒷줄 중앙, ‘김일성 장군의 노래’ 작곡자)과 정추(김원균의 왼쪽). 2 1960년 알마티에서 작곡하고 있는 정추. 3 1941년 도쿄에서 영화 촬영 중인 정추의 형 정준채. 4 1937년 외숙부인 정석호 댁에서 피아노를 치는 정추.

    정추는 윤이상(1917~1995)과도 곧잘 비교된다. 윤이상(1917~1995)은 한국이 버린 음악가다. 1967년 ‘동백림 사건’ 이후 고향땅을 밟지 못했다. 동백림 사건으로 한국에서 버림받은 후 북한식 사회주의와 관련해 미망(迷妄)을 가졌다. 한국인을 포섭해 북한에 보내는 일을 한 적도 있다. 정추와 윤이상의 족적은 정반대다.

    ‘고려인의 노래’ 1000곡 採譜

    정추는 ‘카자흐스탄의 윤이상’이란 표현을 싫어했다. 부당하다는 것이다. 생전에 이런 말을 했다.

    “윤이상이 박정희 독재정권에 저항한 민주투사인 것으로 알았어요. 하지만 그 사람이 북한 조직에 깊숙이 개입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습니다. 김일성 집단이 독재정권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텐데, 어떻게 북한을 두둔하는 행동을 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북한 체제를 반대한 망명자고, 윤이상은 사이비 사회주의 독재국가를 찬양한 사람입니다. 나를 그와 비교하지 말아주십시오. 나는 윤이상 같은 변절자가 아니에요.”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북한이 주장하는 ‘강성대국’은 엘리트층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내놓은 수사(修辭)일 뿐입니다. 최근 한국에서 종북 ·친북 인물이 나타나는 것을 당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북한이 좋다는 사람들은 말로 설득하지 말고 북쪽으로 보내 우상화가 뭔지, 인권 없는 세상이 어떤 건지 직접 보게 하는 게 방법일 겁니다.”

    1992년 고인은 북한 민주화와 통일조국 건설에 일조하겠다는 마음으로 구국전선 결성에 참여했다. 구국전선은 북방 정책을 추진하던 노태우 정부와도 선이 닿았다. 정부는 구국전선을 경제적으로 도왔다. 그는 정부의 배려로 광주를 방문했다. 46년 만의 귀향. 어머니 묘소를 찾아 인사를 올렸다. 눈물이 쏟아졌다. 미친 듯 절규했다.

    그는 소련이 붕괴한 이듬해인 1991년 구국전선을 조직했다.

    “나는 그때도 알마티에 거주하고 있었고, 1957년 나와 함께 김일성 반대 운동을 한 허진은 모스크바 근방에 살고 있었습니다. 박갑동 선생, 이상조 선생은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이상조 선생은 1957년에 모스크바 주재 북한대사로 계시던 분으로 모스크바에서 김일성 반대 시위가 벌어졌을 때 소련에 망명했습니다. 이렇듯 각지의 망명 인사들이 모여 구국전선을 꾸렸습니다. 구국전선의 설립 목적은 김일성을 무너뜨리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김정은 집단을 타도하는 게 목표입니다. 3대 세습이 뭡니까? 대명천지에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어요?”

    고인은 알마티에서도 민족혼을 잊지 않고자 노력했다.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연해주에서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의 황무지로 떠밀려온 고려인을 찾아다니면서 구전 가요를 악보에 옮기는 일에 20년 넘게 정열을 쏟아 부었다.

    “고려인이 일하는 농장에 찾아가 그들이 부르는 전래민요, 노동가요를 1000곡 넘게 채보했어요. 실향민의 노래를 악보에 옮기면서 조국으로부터 버림받은 아픔을 달랬습니다.”

    그의 망명지이던 카자흐스탄은 고려인의 한(恨)이 서린 곳이다. 고려인은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몰도바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스스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등에 사는 한인을 가리키는 말. 러시아어로는 이들을 ‘카레예츠’라고 한다. 고려인은 스스로를 ‘고려사람(Koryo-saram)’이라고 일컫는다.

    그는 당시 막 개발된 6kg 무게의 대중용 녹음기를 둘러메고 ‘고려인의 노래’를 녹음했다. 2005년 국사편찬위원회와 한양대 한국학연구소는 그가 1959년부터 20여 년 동안 채보한 1000여 곡을 묶어 ‘소비에트시대 고려인의 노래’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소프호스(국영농장)와 콜호스(집단농장)를 다니면서 녹음하고 채보했습니다. 그이들의 노래는 슬픈 게 많았어요. 고향을 생각하거나 이별의 설움을 노래한 것이 많았어요. 어느 누구도 생활이 어려웠다든지, 여기에 어떻게 왔다든지, 어떻게 정착했다든지 하는 것은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요.”

    고인의 대표작 중 하나인 교향조곡 ‘1937년 9월 11일 17시 40분 스탈린’은 ‘고려사람’의 애달픈 삶을 음악으로 구현한 것이다.

    “오랜 기간에 걸쳐 하나둘씩 완성한 곡이 합쳐진 겁니다. 1970년대 중반 교향조곡으로 구성됐습니다. 1937년 9월 11일 17시 40분, 그러니까 스탈린이 고려인 강제이주 명령서에 서명한 바로 그 시각을 제목으로 삼았고요.”

    카자흐스탄 ‘공훈예술인’

    “나를 윤이상 같은 변절자와 비교하지 말라”

    1961년 ‘가가린 쾌거 축하 공연’에서 연주된 ‘뗏목의 노래’악보 (왼쪽). 오른쪽은 1970년대 정추가 통일 후 애국가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작사·작곡한 ‘내 조국’악보 .

    2009년 3월 알마티에서 ‘정추 헌정 기념 음악회’가 열렸다. 통일조국을 꿈꾸면서 작곡한 ‘내 조국’이 연주됐다. 그는 카자흐스탄에서 ‘검은머리 차이코프스키’로 불렸다.

    “그해가 창작 50주년이었습니다. 그것을 기념하는 음악회였어요. 카자흐스탄 정부는 나의 80세, 85세를 기리는 헌정음악회도 열어줬습니다.”

    한국, 북한은 ‘정추의 음악’을 잘 모르지만, 그는 카자흐스탄 음악계가 존경하는 거장이다. 카자흐스탄 음악 교과서에 실린 작품만 60곡에 달한다. 1988년엔 카자흐스탄 정부로부터 ‘공훈예술인’ 칭호를 받았다.

    “30, 40년 동안 음악 관련 일을 한 공로로 준 근로 메달이라고 할까, 훈장이라고 할까, 뭐 그런 거예요.”

    소련 당국도 그의 능력을 인정했다. 1961년 열린 ‘유리 가가린 쾌거 축하 공연’에서 연주된 ‘뗏목의 노래’가 그의 작품이다. 유리 가가린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우주 비행에 성공한 인물이다.

    “카자흐스탄에 소련 연방의 우주기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류 역사상 첫 우주인 탄생을 축하하는 공연이 이곳에서 열렸어요. 공연을 위해 새로 작품을 쓴 것은 아니었어요. ‘뗏목의 노래’는 그전에 완성한 것이에요. 축하 공연 때 내가 현장에서 직접 피아노를 쳤습니다. 그게 소련 TV에 나간 거예요.”

    그가 졸업한 차이코프스키 음대의 옛 이름은 모스크바 국립 음대다. 나중에 러시아를 대표하는 음악가 차이코프스키의 이름이 붙었다. 정추는 차이코프스키 음악 계보를 잇는 ‘4세대 제자’로 불린다. 작곡가 세르게이 타네예프가 유일한 차이코프스키의 제자이고, 그 타네예프의 제자가 정추를 가르친 아나톨리 알렉산드로프다.

    하차투랸의 극찬

    “차이코프스키 음악을 깊이 있게 공부했어요. 1920년대 러시아에선 아방가르드 음악, 형식주의 음악이 굉장히 발전했습니다. 알렉산드로프 선생께 ‘아방가르드나 형식주의 음악은 어떻습니까?’ 하고 물어봤어요. 선생께서는 ‘다 쓸데없는 짓’이라고 하시더군요. ‘그럼 선생님은 그런 음악은 일절 다루지 않으십니까?’라고 물으니까 ‘내가 그놈들을 비웃기 위해 풍자적으로 아방가르드 식의 곡 하나를 썼다. 시간이 지나면 예술이 아닌 것들이다’라고 하셨어요. 반대로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은 좋은 선율을 갖췄으며 화성이 아주 원만하고 깊이가 있으며 표현력이 뛰어납니다.”

    러시아 각 악파의 대가인 알렉산드로프, 카발레프스키, 프로코피예프, 쇼스타코비치, 하차투랸 등이 그의 졸업 작품 ‘조국’을 평가했다.

    “직계 제자에게도 인색한 점수를 주기로 소문난 알렉산드로프 교수가 심사장에서 뛰어나오셨어요. 미소를 띠면서 ‘너 만점이야. 만점. 누가 5점 만점을 주자고 가장 먼저 말한 줄 아느냐?’ 묻기에 ‘글쎄, 누굴까요?’ 했더니 하차투랸이라고 했어요. 하차투랸은 당시 러시아 현대음악을 견인하던, 세계적 거물이었습니다. 깜짝 놀랐죠. 흥분도 했고요.”

    고인이 가장 아낀 작품은 통일조국의 애국가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작곡한 ‘내 조국’이다.

    “‘내 조국’을 완성한 게 1970년대예요. 고려인 한 분이 소련을 주제로 쓴 시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 시를 토대로 가사를 썼습니다. 나중에는 내가 한국어로 쓴 가사를 붙여 음악회에서 연주했고요. 하모니가 굉장히 웅장합니다. 학창 시절 은사께서 민족, 국가, 독립, 애국을 주제로 삼은 곡을 써보라고 조언하셨어요. 완성해놓고 보니 ‘이것이야말로 내가 만들고자 한 곡’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통일조국의 애국가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내 조국’이라는 제목을 붙였고요.”

    “하루빨리 북한 민주화 실현해야”

    그는 1961년 러시아 여성과 결혼했다. 두 딸을 ‘한국사람’으로 키우고 싶었다. 어릴 적부터 한국어 교육을 시켰다. 두 딸은 1990년대 한국에서 대학을 다녔다. 작은딸은 전남대에서 박사학위(영문학)를 받고 현재 카자흐스탄 외국어대 교수로 일한다.

    “딸들이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한국인에게 환멸을 느꼈대요. 한국 사회에 어떤 모순된 것이 있는 것 같아요. 딸들이 내 소망처럼 한국사람이 못 돼 안타까워요.”

    생전의 그에게 어떻게 하면 통일조국이 건설될 것 같으냐고 묻자, 노(老)음악가의 얼굴에서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가 아닌 ‘김일성 왕조’일 뿐이에요. 스탈린주의적 우상숭배 국가이고요. 북한 민주화를 하루빨리 실현해야 해요. 개혁, 개방과 민주화가 이뤄져야 통일조국을 건설할 수 있습니다. 김정은 밑에 있는 자들은 모두가 노예일 뿐입니다. 한국의 젊은 세대는 ‘통일할 필요가 있는가’ ‘통일하면 삶이 고달파진다’고 생각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대한민국이 크게 걱정됩니다. 또한 한국이 이념적, 지역적으로 나뉘어 다투는 것도 내가 보기에는 건강하지 않아요. 한국은 북한이 붕괴하면 그때 가서 관리, 지배한다는 생각을 가진 것 같아요. 그런데 자본주의적 원칙만 가지고선 흡수한 북한을 관리할 수 없습니다. 북한 사람들은 계획경제 체제에서만 살아왔습니다. 북한 붕괴 이전에 준비를 철저히 해놓아야 합니다. 바깥세상을 북한 주민에게 알려야 해요. 자본주의 국가와 교류를 늘리는 것을 도와야 하고요.”

    그는 한쪽에서는 월북했다는 이유로, 다른 쪽에서는 배반했다는 이유로 ‘두 개의 조국’으로부터 외면받은 박제가 돼버린 천재다. 그의 음악은 그의 삶을 닮았다. 이데올로기 다툼이 남긴 상처와 통일조국에 대한 소망이 담겨 있다. ‘조국’ ‘내 조국’ ‘1937년 9월 11일 17시 40분 스탈린’은 언제쯤 서울과 평양에서 울려 퍼질 수 있을까.

    비운의 천재 음악가 정추는 5월 13일 지인과의 점심약속 장소에 가려고 길을 걷다 쓰러져 급서했다. 이튿날 알마티 근교 부른다이 묘지에 묻혔다. “죽거든 화장하지 말고 고향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으나 ‘불귀의 망명자’로 영면한 것이다. 그가 땅에 묻힌 날 부른다이 묘지에는 눈부신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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