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먹거리에 대한 불신이 팽배한 요즘, 텃밭이나 옥상에서 자기 먹을 식재료를 직접 생산하는 도시농부가 늘고 있다.
- 도시에서 농사를 지어 소비자와 나누는 자생적 시장까지 생겨났다.
- ‘나’뿐 아니라 ‘우리’를 살리고, 도시에서 자취를 감춘 이웃 공동체를 되살리는 도시농부 운동을 취재했다.
상암 두레텃밭에서 일하는 도시 농부들.
“암사동에서 직접 키운 육종마늘과 고추로 만든 고추장, 그리고 콩부터 메주까지 제대로 만든 된장…, 저희 엄마가 만드셨어요. 한번 맛보세요.”
일요일인 6월 9일. 서울은 기온이 33도까지 올라갔다. 햇빛을 가리기 위해 쳐놓은 천막 아래 앉아 있던 상인이 “머리 위에 히터를 틀어놓은 게 아니냐”고 할 만큼 더운 날씨였다. 그런데도 서울 종로구 혜화동 아르코미술관 앞은 왁자지껄했다. 날씨 때문에 평소보다 적은 편이라고는 하지만 꽤 많은 사람이 ‘마르쉐@혜화’를 찾았다. 이 더운 날, 이들은 왜 이곳에 모였을까.
지난해 10월 처음 문을 연 마르쉐@혜화는 농부와 요리사, 수공예 작가들이 직접 재배한 농작물과 직접 만든 음식, 수공예품을 들고 나와 소비자를 만나는 장터다. 장터라는 뜻의 프랑스어 ‘마르쉐(Marche)’에 장소 앞에 붙는 전치사 ‘at(@)’을 더해, 어디에서든 장터를 열 수 있다. 지금은 혜화동에서 열고 있기 때문에 ‘@혜화’이지만 다른 지역에서 열린다면 그 지역 이름을 붙이면 된다. 마르쉐@서초가 지난 4월에, 마르쉐@서울광장이 6월에 열렸고, 곧 마르쉐@연남동도 열릴 예정이다.
마르쉐@혜화에서는 서울과 수도권 지역의 도시농부들이 직접 기른 계절 채소, 유정란, 각종 곡식과 충남 홍성, 경북 문경 등으로 귀농한 농부들이 정성들여 길러온 곡식, 과일을 만날 수 있다. 또한 텃밭채소로 만든 비빔밥, 국수, 음료를 현장에서 맛볼 수 있다.
그러나 마르쉐에서 판매하는 것은 그저 물건들만이 아니다. 마르쉐를 운영하는 마르쉐친구들의 송성희 씨는 이곳을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곳”이라고 소개했다.
‘판매’보다는 ‘공유’의 장터
“내가 어떻게 만들고 경작했는지에 대해 생산자와 소비자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유기농 인증, 무농약·저농약 인증 마크보다 더 믿을 수 있는 먹거리가 될 것입니다. 마르쉐는 이런 이야기가 오고가는 장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또 “산업사회가 되면서 먹거리가 공산품처럼 돼버렸는데, 공산품을 구매하는 방식이 아니라 누군가가 공들여서 정성을 다해 키워낸 것을 관계 안에서 나누고, 진정한 의미의 교환과 나눔으로 살려보고 싶었다”며 마르쉐를 연 취지를 설명했다. 그의 말처럼 마르쉐는 대형마트나 백화점, 시장과 비교해 소박한 규모였지만 정직하게 기른 채소와 정성들여 만든 음식이 판매가 아니라 ‘공유’되고 있었다.
마르쉐@혜화를 구경하다 낯선 음식이 눈에 띄었다. 재료는 배추와 무이지만 그것으로 만든 음식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유자매의 몽시락’을 판매하는 유미영 씨는 “우리는 고춧가루가 들어간 김치를 주로 먹는데 그전에는 초나 간장으로 김치를 담가 먹었다. 이건 초기의 김치를 재현한 것”이라며 자신이 만든 김치에 대해 설명했다. 자신이 먹을 음식을 스스로 만들어 먹자는 취지를 담아 ‘꿈의 도시락’이란 뜻의 이름을 지었다는 유자매의 몽시락은 홍대텃밭다리에서 도시농부들이 키워낸 채소를 활용해 만들었다.
“제가 직접 심고 가꾼 재료로 만든 음식을 가지고 나와 먹거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복잡한 사회에서 나를 지키는 방법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의식주 중에 ‘식’이라고 생각해요. 건강한 음식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었어요.”
직접 키운 깻잎으로 만든 페스토와 바나나잼을 판매하는 1인 가족 네트워크 이웃랄랄라는 레시피 전수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혼자 살기 때문에 식재료가 남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 버린 적이 많다는 그들은 식재료를 오래, 그러나 맛있고 건강하게 먹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늘 고민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생각해낸 방법을 마르쉐를 통해 공유한다.
20대 딸과 함께 마르쉐를 찾은 유재은(56) 씨는 “시중에 파는 먹거리는 믿지 못할 때가 많은데 이곳에선 먹거리에 대한 걱정을 덜 수 있다”며 “다양한 식재료나 음식들을 볼 수 있고 새로운 레시피도 배울 수 있어 색다르고 신선하다”고 말했다.
마트와 식당에서 사는 먹거리에는 ‘사람’이 없다. 잘 포장된 식재료를 사고 주문한 메뉴의 음식을 먹지만 어떤 사람이 어떤 재료로,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 수 없다. 농부의 땀과 요리사의 정성이 담긴 음식에 감사한 마음을 가질 기회가 없다.
그러나 마르쉐에서는 다르다. 유영재(61) 최치숙(59) 부부는 “루꼴라 씨앗처럼 쉽게 구할 수 없는 식재료를 구할 수도 있어 좋지만 특히 땀과 정성이 담긴 신선한 먹거리를 만날 수 있어 더욱 좋다”고 말했다. 남편과 함께 찾은 지미라(52) 씨는 마르쉐를 위해 강남에서 혜화까지 먼 길을 왔다고 했다. “달걀, 두부, 소스, 쌈채소, 밤 등 너무 많이 사서 집에 가는 일이 막막하다”면서도 연신 “너무 좋다”고 했다.
원산지를 속이고, 유통기한이 지난 재료로 음식을 만들고, 병 걸린 소를 도축해 유통하는 등 먹거리에 대한 불신이 팽배한 요즘, 믿을 만한 먹거리를 판매하는 장터나 매장을 이용하는 것에서 한발 더 나아가 직접 농사짓기에 나선 이들이 도시농부들이다.
시민들이 마르쉐@혜화에서 도시농부들이 직접 재배한 농산물과 음식을 둘러보고 있다.
안철환 텃밭보급소 소장은 도시농부에 대해 “소비만 하는 도시에서 생산하는 삶의 가치를 알려주는 행위”라고 말한다.
“자기가 키운 것을 자신이 직접 먹기 때문에 특별하다. 식물이 언제 싹을 틔우고,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면서 계절의 변화와 자연의 순환을 배우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다.”
예술가들의 작업실과 철공소가 공존하는 명소가 된 구로구 문래동 문래예술창작촌에서는 2011년부터 건물 옥상에 텃밭을 가꿔 농작물과 꿀벌을 키운다. 유기농, 친환경 농산물을 재배하기 위해 칼슘이 풍부한 달걀껍데기를 뿌리고, 지렁이가 만든 퇴비를 이용하는 등 비료도 직접 만든다. 어떤 흙이 좋은지, 로컬푸드와 토종 종자의 종류, 텃밭 디자인 등 도시농업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가르치는 농부학교도 열고 있다. 텃밭 부흥회, 옥상 부엌파티, 김장 잔치 등 다양한 행사를 열어 주민들이 교류할 수 있는 장을 만드는 것도 특징. 그래서 문래도시텃밭은 다른 텃밭에 비해 지역주민이 많이 참여한다.
2012년 8월 마포구 동교동의 가톨릭 청년회관 건물 옥상에서 시작된 홍대텃밭다리는 농사를 짓고 싶은 사람들에게 분양해 운영되고 있다. 다른 텃밭과 달리 자기 마음대로 자루나 통, 드럼 등을 가져와 자신만의 농터를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저마다 다른 모양의 밭이 주인의 개성을 보여준다. 최근에는 상수동의 한 카페 옥상까지 텃밭을 확장했다. 기본적인 농사 정보를 제공하고 먹거리에 대한 고민을 나누는 농부학교도 진행한다.
텃밭다리를 운영·관리하는 3명의 멘토는 올해부터 자신들이 키워낸 쌈채소, 허브 등을 직접 근처 식당과 요리교실에 납품하고 있다. 텃밭다리 멘토 박정자 씨는 “농작물로 돈을 버는 게 시골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도시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한다.
“때마다 나오는 농작물을 내다 팔았는데 꽤 인기가 있었어요. 올해는 좀 더 체계적으로 해볼 계획이에요. 가격도 잘 정하고 농번기에도 판매할 수 있도록 말이죠. 제대로 된 로컬푸드를 해보고 싶어요. 농사를 지으면서 도시 생활을 즐기는 삶을 보여줄 생각입니다.”
파절이(파릇파릇한 젊은이)는 20대 도시농부들의 협동조합이다. 2011년 11월 처음 활동을 시작해 이듬해 3월부터 노들텃밭과 환경연합 옥상텃밭에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올해는 블로그를 통한 모금과 서울시 지원을 통해 광흥창 옥상에 텃밭을 조성했다.
이웃과 나누는 도시 텃밭
특이한 점은 다른 옥상텃밭은 상자나 자루를 활용해 농사를 짓는 것과 달리 파절이 옥상텃밭은 옥상에 흙을 깔아 텃밭을 만들었다는 것. 이를 위해 15t이나 되는 흙을 날라 260m² 넓이의 옥상에 뿌려야 했다. 옥상 문을 열고 들어서면 도심 한가운데에서 시골로 순간이동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밭을 그대로 옮겨놓은 옥상텃밭 외에도 파절이만의 특별한 점은 또 있다. 자신들이 기른 신선한 채소를 자전거를 타고 배달한다. 나혜란 대표는 “로컬푸드의 전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다”며 “탄소 제로 상태로 생산한 것을 탄소 제로 상태로 배달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했다. 하지만 한창 수확물이 많은 여름날 자전거 배달은 쉽지 않을 일일 터. 그럼에도 이런 도전을 계속하는 것에 대해 나 대표는 “도시농부는 나 혼자가 아닌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소셜 디자이너이기 때문에 세상을 바꾸는 일을 멈출 수 없다”고 말한다. 올해는 어린 도시농부들인 ‘새싹’들과의 체험도 준비 중이다.
산업사회로 넘어오면서 농업은 기계와 화학비료와 농약으로 만들어지는 대규모 사업이 되었다. 화학비료와 농약은 땅과 지하수를 오염시키고 지구온난화에 악영향을 끼쳤다. 심재훈 텃밭보급소 이사는 “사람들은 지구온난화를 걱정하면서도 그 원인인 먹거리에 대한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고 지적하며 “비료와 농약, 기계에 의존한 전업농사와 달리 소규모 다품종으로 비료나 농약 없이 농사를 짓는 도시 농사가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도시 농사가 다양한 행사를 통해 그동안 도시에서 사라졌던 이웃공동체를 되살리는 역할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나의 안전하고 건강한 식생활을 위해 시작한 도시농부가 ‘나’를 넘어 우리 사회를 살리고 있는 것이다.
건물 옥상에 들어선 홍대텃밭다리 농장.
두레텃밭이 특히 주목받는 것은 수확물의 절반을 기부하는 형태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60명이 경작하는데 신청자 경쟁률이 8:1이 넘을 정도로 지역주민의 큰 사랑을 받고 있다. 마포도시농업네트워크와 함께 상암 두레텃밭을 돕는 ‘여성이 만드는 일과 미래’의 구원경 사무국장은 “마을 텃밭이기 때문에 수확물은 농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이웃들과 함께 나눠야 한다”고 말한다.
지난 6월 6일에는 마을 주민에게 무료로 채소를 나눠줬다. 채소를 가져간 이웃은 자발적으로 기부금을 냈고, 기부금은 도움이 필요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사용될 예정이다. 구원경 사무국장은 “지역 주민에게는 간접적인 혜택, 어려운 분들께는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활동을 하면서 마을텃밭의 공공성을 높여야 한다. 공공성이야말로 마을 텃밭의 지향점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상암 두레텃밭 주민대표 박쌍애(61) 씨는 “두레라는 게 과거에만 있었던 게 아니다. 지금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텃밭은 함께 농사를 짓기 때문에 서로 도와야 하고 소통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5평 남짓한 땅에서 농사를 짓지만 수확물은 식구가 다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양이 많아 형제자매는 물론 아래층, 위층 다 나눠 먹으면서 모르던 이웃과 친해졌다”고 전했다.
나도 도시농부
“식욕이 본능인 것처럼 경작에 대한 욕구도 사람의 본능”이라고 심재훈 텃밭보급소 이사는 말한다. 만약 잠자고 있던 경작에 대한 욕구가 깨어났다면 도시농부에 도전해보자. 땅이 있다면 바로 시작하면 된다.
가장 쉽고 편한 방법은 노들공원텃밭처럼 구나 시에서 운영하는 텃밭을 이용하는 것이다. 또 시민사회단체에서 운영하는 도시농사에 합류해 함께 농사를 짓는 것도 방법이다. 텃밭보급소나 서울, 영등포, 마포, 수원, 고양, 인천, 천안 등의 도시농업네트워크 등을 통해 정보를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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