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는 스스로 체득한 건강의 지혜로 조선 최장수 왕이 됐다.
비록 여든이 넘도록 장수했지만, 영조는 어릴 때부터 죽을 때까지 한약을 달고 산 ‘국민 약골’이었다. 조금만 찬 음식을 먹어도 배탈이 났고 소화불량에 시달렸으며 복통 때문에 소변을 보기 어려워하던 소년이었다. 전염병에 걸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기적적으로 살아나기도 했다. 그렇던 그가 83세라는 천수를 누렸다는 건 미스터리에 가깝다. 대체 그의 건강 비결은 무엇일까. 건강 체질을 타고난 걸까, 아니면 후천적으로 가꾸고 양육한 걸까.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을 밝혀가는 과정이 바로 ‘왕의 한의학’을 연재하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실천으로 옮긴 건강 지혜
영조의 장수와 건강 비결을 현대적 시각에서 보면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첫째, 자기의 몸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다. 몸의 어떤 부분에 어떤 약점이 있는지 파악해 이를 염두에 두고 과부하가 걸리진 않는지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24시간 변화를 관찰하면서 신체의 약점을 알고 과부하의 경계치를 관찰하는 데는 자기 자신이 최고 전문가일 수밖에 없다. 영조는 평생 복통과 소화불량 등 냉기에 민감해했다. 자신이 냉증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고 한평생 차가운 자리에 앉지 않고 찬 음식을 멀리하는 등 온기 보존에 신경 쓴 것은 철저한 자기 관찰의 결과다.
둘째, 자신을 냉정하게 주시하면 병이 자기 몸에서 가까이 있는지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잘 알고 무엇을 할 것인지 방법론을 찾을 수 있게 된다. 영조는 ‘인삼 마니아’였다. 여러 번 처방을 실험한 후 인삼을 대량으로 넣은 건공탕을 상복해 건강을 유지했다.
현대는 건강지식 홍수 시대다. 많은 사람이 신체 관리를 위한 전문지식에 대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팔랑귀가 된다. 하지만 과학적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연의 심오함이다. 건강 지식이 자신의 신체 상황과 맞아야 하는데도 모든 사람에게 맞는 것처럼 맹신하는 데서 문제가 불거진다.
예를 들면 우유나 인삼의 경우가 그렇다. 우유가 보급되자 과학적 분석을 통해 모유보다 더 풍부한 영양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 한때 모유보다 우유를 선호했지만, 나중에 모유 성분 가운데 면역 효소나 기분을 좋게 하는 성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우유 우위설이 자취를 감췄다. 인체의 심오함을 단편적 지식의 틀만으로는 평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실증한 예다. 인삼도 마찬가지다. 체질에 맞지 않으면 열이 나거나 혈압을 높이는 등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자신의 체질 특성과 견줘보고 관찰해서 무엇이 몸에 맞고 맞지 않는지 진실을 확인하는 게 중요하다.
셋째, 건강의 지혜를 실천하는 것이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며 모자란 듯 음식을 먹으면서 새롭지는 않으나 지혜로운 지식을 실천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작은 노력으로 크게 건강을 얻고자 게으름을 부린다. 하지만 영조는 술을 거의 먹지 않고 아무리 바빠도 밥을 제때 챙겨 먹으면서 자신만의 노력으로 건강의 지혜를 체득했다.
대다수 왕이 선대 왕을 여읜 슬픔에, 혹은 힘겨운 장례절차 와중에 건강을 잃어버린 반면 영조는 아들인 사도세자 사건 앞에서도 곡기를 끊거나 반찬 수를 줄이는 감선(減膳)을 하지 않았다. 삶을 이어가기 위한 에너지 보급과 권력투쟁을 철저하게 구분짓고 살았음을 보여준다. 국가적 위기상황이나 신하들과의 갈등 때 반찬 수를 줄이거나 단식투쟁을 했지만 시간을 정해놓고 투쟁의 근본 목표에 부합한 것에만 충실했을 뿐 투쟁 그 자체에 매몰되진 않았던 영리한 왕이다.
영조는 무수리 출신인 숙빈 최씨의 아들로 태어난 까닭에 왕이 되기까지의 행보가 여간 험난하지 않았다. 그의 출생을 둘러싸고 여러 가지 설이 나돌았다.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 김춘택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었다. 많은 야사(野史)가 호기심어린 눈으로 숙종의 아들이 아닐 것으로 추정하면서 영조를 바라본다.
못 말리는 ‘인삼 마니아’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 각종 기록을 통해 살펴보면 영조의 체질은 특이한 데가 있다. 그는 83세에 세상을 뜰 때까지 인삼이 든 처방을 애용했다. 심지어는 말년 10년 동안 복용한 인삼이 100근이나 될 정도였다. 그의 풍성한 수염은 아버지 숙종의 풍모와 전혀 달랐고 오히려 숙빈 최씨에 가까웠다. 이것도 그가 김춘택의 아들로 의심받는 한 이유가 됐다.
성격도 아버지 숙종이나 이복형 경종, 아들 사도세자, 손자 정조와 전혀 달랐고 질병의 양상도 이들과 달랐다. 조선시대 왕들은 무장인 이성계의 혈통을 이어받아 대개 불꽃같은 성질을 보이거나 화병을 앓았다. 심지어 화가 내부에서 부글부글 끓어올라 종기를 앓다 죽는 경우가 많았다. 숙종도 예외가 아니었다. 조선왕조실록의 숙종 14년 7월 16일 기록엔 “이때에 임금의 노여움이 폭발하여 점차로 번뇌가 심해져, 입에는 꾸짖는 말이 끊어지지 않고, 밤이면 또 잠들지 못하였다. 마음이 답답하여 숨쉬기가 곤란하고 밤새도록 번뇌가 심하다”고 쓰여 있다. 극도의 화병을 호소한 대목이다.
영조는 평생 인삼이 든 처방을 애용했다.
하지만 영조는 달랐다. 일생 동안 화열을 돋우는 인삼을 달고 살았다. 그가 가장 많이 복용한 것도 한의학 처방 중 인삼이 가장 많이 포함된 건공탕이었다. 영조 41년의 처방 기록에 의하면 매일 8.8돈(30g)이나 되는 엄청난 양의 인삼을 복용했다. 영조 스스로도 “제조에게 인삼의 정기를 얻어 건강하다”고 말할 정도로 대단한 인삼 애호가였다. 그런데 그의 아들 사도세자와 손자 정조는 숙종과 경종 등 전대 왕들처럼 화열이 많은, 따라서 인삼이 맞지 않는 체질이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사도세자의 경우를 보자. 영조는 사도세자를 불러 왜 사람을 죽이게 됐는지 물었다. 이에 사도세자는 “마음에 화증이 나면 견디지 못해 사람을 죽이거나 닭 같은 짐승이라도 죽여야 마음이 풀어지기에 그랬습니다”라고 답했다. 결국 이 병이 커져 비극적인 사도세자의 죽음을 불렀다는 데는 역사적으로 이의가 없다.
정조는 더욱 치열하게 내면의 화병과 싸웠다. 화를 내리는 가미소요산과 우황, 금은화를 밥 먹듯 먹었다는 건 잘 알려져 있고 소량의 인삼도 극도로 경계해 복용하지 않았다. 죽는 순간까지 인삼을 기피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영조는 숙빈 최씨의 체질을 이어받아 소음인에 가까운 체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영조가 일생 동안 보인 정치적 행태는 매우 자학적이었다. 대신들과 문제가 생기면 이를 쟁점으로 탕약 복용을 거부해 약자로서 탄압받는 임금의 모습을 부각했다. 왕권과 신권의 충돌에서 능동적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게 아니라 수동적으로 여론을 환기시키는 소음인의 특징을 보인 것이다. 영조 50년엔 유생과 백성들을 모아놓고 현상금을 내걸어 탕제 정지 여부를 묻는 행사도 벌였다. 또한 소식(小食)을 즐기고 기름진 음식과 술을 피하는 등 절제된 식생활을 이어나갔다. 소화 기능이 약한 소음인 체질이 아니고선 실천하기 힘든 식습관이다.
수동적 소음인 특징 뚜렷
왕위에 오르는 과정도 순탄치 못했다. 그는 이복형 경종 밑에서 왕세제로 있으면서 조금만 한눈팔면 목숨이 끊어질 수 있는 살얼음판을 걸었다.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는 궁녀들의 여종인 무수리였다. 왕의 어머니라곤 상상하기 힘든 천한 신분을 딛고 영조는 출발점에 섰다. 경종의 어머니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상대로 저주의 굿판을 벌인 후 죽임을 당한 것은 숙빈 최씨가 진실을 알린 덕분이었다. 장희빈이 사약을 받고 죽고 난 후 경종과 영조는 갈등관계에 돌입한다. 자기 어머니를 죽인 원수의 자식인데 예뻐 보일 리가 만무할 터.
경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문고리 권력’인 실세 환관 박상검과 영조 간에 불거진 갈등은 1인자와 2인자의 간극을 보여주면서 불안한 왕위 계승자로서의 지위를 확인시켰다. 뒤이은 목호룡의 고변은 왕과 왕세제 간 일촉즉발의 순간순간으로 이어졌다.
경종의 죽음을 둘러싼 독살 의혹은 남인과 소론 강경파에 의해 더욱 증폭됐다. 경종은 상극의 음식인 게장과 단감을 먹고 죽었는데, 영조 31년 5월 20일 소론의 선두주자로 반란을 꾀했던 신치운은 스스로 “신은 영조 즉위년인 갑진년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신의 역심입니다”라고 말했다가 죽임을 당했다. 경종 독살설의 의혹이 영조 재위 31년까지 뻗친 것이다. 게다가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죄책감은 결코 다른 왕들보다 작은 스트레스가 아니었을 것이다.
영조가 앓은 질병은 대부분 소화력 부진이나 복통 등 한랭성 질환이었다. ‘골골백세’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체질이었다. 다만 궁궐 밖에서 생활하던 18세에 두창을 크게 앓은 것을 제외하면 본인의 판단과 선제적 대처로 질병을 예방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를 괴롭힌 질환은 산증(疝症)이었다. 경종 재위 시절 왕세제였던 그는 산증으로 경연(經筵)을 자주 쉬어야 할 정도로 통증이 심했다. 산증은 한의학적 병명으로, 현대의학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하복냉통증후군이다. 요즘으로 말하면 소화불량과 전립선질환이 복합된 것이며, 여성으로 말하면 생리통과 냉대하로 인한 자궁 하복통 질환을 의미한다.
동의보감은 ‘산증은 부위별 분류에 따라 전음(前陰)에 배속하였다. 전음은 종근이 모이는 곳이며 종근이란 음부의 털이 나는 곳에 가로놓인 뼈의 위아래에 있는 힘줄이다’라고 설명했다. 아랫배에 병이 생겨 배가 아프고 대소변이 잘 나오지 않는 것을 산증이라고 하는데 이는 찬 기운으로 인해 생긴다. 송나라 양사영의 ‘직지방(直指方)’은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산증이란 음낭과 아랫배가 아픈 것이다.…오한과 발열이 생기다가 대소변을 보지 못하거나 설사가 나기도 하는데 적취(積聚·몸 안에 쌓인 기로 인해 덩어리가 생겨 아픈 병)가 생겨 술잔 같거나 팔뚝 같거나 쟁반 같기도 하다.’
“만 가지 보약이 헛것”
어의들은 위장의 온기를 보태려고 영조에게 뜸 치료를 적극 권했다.
‘홍진(홍역) 이후에 처음에는 산기가 있음을 알지 못하고, 체기가 있어서 청열소도지제를 다복하여 하부가 궐랭하고 해역이 병발해 독음에 뜸을 뜨고 방풍산을 써서 효과를 보았으나 그 찬 약이 문제였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승정원일기 영조 50년 5월 8일 기록에서 영조는 “홍진 때 쓴 우황과 찬 약이 산증을 유발했다”고 회고한다. 영조는 생활습관 문제도 고백한다.
‘예전 같으면 여름에는 생냉물을 먹지 않았으나 요즘은 과인이 스스로 과식한 측면이 있고, 겨울이 되어서도 오히려 수족을 차게 하는 등 온몸을 두루 차갑게 했다. 평상시 과인의 처신이 몸을 차갑게 한 것이다.’
산증의 형태에 대해서도 ‘지금 복부는 손으로 만져보면 옆으로 횡단지기가 있는데, 의복이 단박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지금 여름에 덥다고 생랭(生冷)한 것을 과식한 소치’라고 밝혔다.
산증은 소변을 보기 어렵거나 참기 힘들게 해 영조를 계속 곤란케 했다. 영조 2년 10월 14일 승정원일기엔 ‘어릴 때부터 소변을 자주 보았는데 최근에는 더욱 심해져 하룻밤에 수차에 걸쳐 들락날락했다. 특히 요번 제사 때 초헌을 보는데 소변이 심히 마려워 실례를 할 뻔했다’라고 곤혹스러운 경험을 밝혔다. 심지어 ‘소변이 방울방울 떨어져 고통스럽다’라고 고민을 털어놓은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소변에 관한 한 아버지 숙종은 아들 영조와 꼭 닮았다. 숙종 10년엔 사심도적산과 삼호작약탕 등에 대한 처방을 주문했는데 이들 처방은 모두 소변을 순조롭게 보기 위한 것이었다. 영조는 찬 약물이나 생활습관에서 산증의 원인을 찾지만 동의보감은 이 병의 원인을 화병으로 설명한다.
‘대체로 성을 몹시 내면 간에서 화(火)가 생긴다. 화가 몰린 지 오래되면 내부가 습기로 차가워지며 통증이 심해진다.’
숙종의 경우 변덕스럽게 화를 내는 경우가 잦았던 점을 고려하면 무장의 후예다운 질병이었다. 사실 영조도 자가진단과 달리 각종 스트레스로 인한 화병에 시달렸다. 앞에서 본 대로 즉위할 때까지의 스트레스와 격화된 당쟁의 와중에서 신하들 사이에 끼여 자학적인 발언을 자주 했다.
조선왕조실록 영조 7년의 기록엔 ‘만 가지 보약이 헛것이다. 내 마음을 괴롭히는 것이 이와 같다’고 말하거나 영조 9년엔 ‘온갖 보약이 다 헛것이고 마음을 맑게 하는 것이 요방이다’라며 괴로운 심경을 표현했다. 영조 44년의 기록에도 ‘아, 나의 병은 첫째도 심기이고 둘째도 심기에서 비롯된다’라고 토로했다. 영조 13년엔 현기증을 호소하면서 고암심신환이라는 처방을 내리는데 그때 현기증의 원인을 화라고 규정한다.
화가 원인이 된 산증을 치료하는 방법은 다른 원인으로 발생한 것과 차이가 있다. 숙종과 영조의 소변에 관한 처방은 비교의 기본점이 된다. 한의학의 기본적인 치료 원칙은 허와 실을 가리는 데 있다. 두 임금의 질병 양상은 허와 실 사이에서 차이가 크다. 숙종은 소변이 붉고 갈증을 자주 호소했는데 도적산 계열의 찬 약물을 위주로 공격적인 처방을 한 반면, 소변을 보기 힘들거나 참기 힘들어하며 설사가 잦은 허증 증상을 보인 영조의 경우는 내부를 따뜻하게 데우는 반총산을 위주로 처방했다. 영조는 ‘반총산을 나의 주인으로 삼는다’고 할 정도로 애용했다.
소화기 냉증 치료하려 배꼽 뜸질
회충에 의한 상충(上衝·위로 치밀어오름)감과 구역감을 회기라고 하는데 이 증상은 영조 20년에서 41년까지 이어진다. 회충을 치료하는 약물은 모두 매운 약이다. 위장의 온기를 올려 회충이 살 조건을 사라지게 하겠다는 처방이었다. 어의들은 위장의 온기를 보태기 위해 한편으로는 뜸 치료를 적극적으로 권했다. 영조도 자신의 건강상 약점이 소화기 냉증에 있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연제법(煉臍法)으로 이를 극복하고자 애썼다. 연제법은 배꼽을 뜸질하는 것인데, 방식은 직접구가 아닌 간접구에 가깝다. 쑥뜸과 피부 표면 사이에 소금이나 약재를 넣어 열기가 피부에 직접 닿아 상처를 내거나 고통을 주지 않도록 한 것이다.
인체를 보는 지혜가 동서양에서 일치하는 것은 배꼽이다. 왜 배꼽일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인체도는 의학과 예술의 융합점을 보여준다고 평가받는다. 인체도는 다빈치의 역작이지만, 그 속에 있는 사각형과 원을 통한 비례는 로마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의 인체 비례에 대한 생각을 구현한 것이다.
“자연이 낸 인체의 중심은 배꼽이다. 등을 대고 누워서 팔 다리를 뻗은 다음 중심을 배꼽에 맞추고 원을 돌리면 두 팔의 손가락 끝과 두 발의 발가락 끝이 몸에 닿는다.”
손발을 뻗은 인체의 중심이 배꼽이라는 생각은 동의보감에도 유사하게 기록돼 있다. 동의보감 배꼽편은 “팔을 위로 올리고 땅을 디디고 서서 줄로 재보면 중심이 바로 배꼽에 해당된다”라고 했다. 손을 들어 올린 모습에서 배꼽이 인체의 중심이라는 데는 동서양이 일치된 견해를 갖고 있는 것이다.
배꼽이라는 순수한 우리말도 마찬가지다. ‘월인석보’에선 배꼽을 ‘빗복’으로 적고 있는데 배의 한복판이라는 뜻으로, 이곳이 인체의 중심이라는 표현이다. 성서 욥기 40장 16절은 “이제 보라. 그의 기력은 그의 허리에 있고 그의 힘은 그의 배꼽에 있느니라”고 했다. 동의보감은 더욱 구체적으로 배꼽의 의미를 해석하면서 치료 효능까지 덤으로 적었다.
‘배꼽 줄은 마치 과일이 나뭇가지에 달려 있을 때 양분이 과실꼭지를 통하는 것과 같다. 배꼽에 더운 김을 쏘여주어 꼭지를 튼튼하게 하는 것은 풀과 나무에 물을 주고 흙을 북돋워주면 잘 자라는 것과 같다.’
뜸을 뜨고 더운 김을 쏘이는 것은 배꼽이 차갑다는 뜻이다. 이런 인식엔 한의학 고유의 음양론이 뿌리내리고 있다. 배꼽은 자궁 속 태아 상태에서 영양분을 받는 유일한 통로다. 어머니는 배꼽을 통해 태아의 음형을 기르는 물질적 기초를 공급한다. 출생 후 닫혀 있어도 배꼽은 인체의 정혈이라는 음기가 모이는 축이다.
영조는 배꼽 뜸질을 건강을 회복하는 보편적 치료법의 하나로 선택했다. 동의보감은 배꼽을 데우는 방법으로 몇 가지를 제시했다. 소금이나 회화나무 껍질로 배꼽을 덮고 난 뒤 배꼽에 쑥뜸을 뜨는 방법, 부자를 비롯한 따뜻한 약으로 고약을 만들어 붙이는 방법, 배꼽을 약쑥으로 덮는 방법 등이 그것이다. 배꼽을 데우면 ‘냉대하와 월경이 고르지 못해 임신하지 못하는 것을 치료한다’라고 적기도 했다.
체질에 맞는 식습관 실천
영조가 가장 좋아한 음식은 사슴꼬리 반찬이었다.
영조는 그만큼 이중탕을 사랑했다. 그는 이중탕을 자신이 가장 아끼던 만능 기술자 최천약의 신기에 가까운 기술과 같다며 상복하면서 건강 지킴이로 삼았다. 영조 41년 12월 29일 제조들이 “건공탕의 효과로 얼굴이 화창해졌다”고 하자 영조 스스로 “인삼의 정기를 얻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한 해 인삼 20근을 소비할 정도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 이 모두가 영조가 매일 한약을 복용할 정도로 건강을 챙긴 덕분이었다.
영조가 기름진 음식이나 음주를 멀리한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금주령을 철저히 지킨 탓인지 처방에 술이 들어가지 않아 효과가 떨어진다고 신하들이 건의할 정도였다. 음식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사람은 영조가 감선이나 철선(撤膳·국상이 났거나 나라에 재앙이 들 때 임금이 근신하기 위해 육선(肉膳)을 들지 않던 일)을 하면서 철저히 검약한 것으로 안다. 그러나 자신이 좋아하는 반찬 4가지를 꼽는 모습은 전혀 달랐다. 송이버섯, 생전복 새끼, 꿩고기, 고초장(苦草醬·고추장)이 그것이다.
영조가 사족을 못 쓸 만큼 좋아한 것은 사슴꼬리였다. 79세에 이르러서도 “반찬 중에서 사슴꼬리만 손을 댈 수 있다”라고 할 정도였다. 그가 특히 즐긴 것 중 하나는 죽은 효장세자의 부인 현빈이 준비해준 밤이었다. 반면 그가 싫어한 것은 생선회나 기름진 음식 등 자신의 소화력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자신의 체질에 맞게 잘 먹은 것이 건강관리의 포인트였던 셈이다.
조선시대까지 약차는 기호음료처럼 먹는 요즘과 달리 치료의 보조수단으로 쓰였다. 하나의 처방이었다. 영조가 다리 힘이 모자라면서 즐겨 먹은 것이 송절차다. 승정원일기는 송절에 대해 ‘송절은 솔뿌리를 가리키는데 근육과 뼈를 튼튼하게 하고 어혈을 없애는 약재다. 황토에서 자란 어린 소나무의 동쪽으로 난 뿌리를 주재료로 오가피 우슬을 넣어 만든 것’이라고 밝혔다.
일부 연구자 중엔 ‘송절차를 마시고 술에 취했다’는 실록 문구를 근거로 송절차가 금주령을 피하기 위한 영조의 눈속임 술의 한 종류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영조가 술을 즐긴 적이 없다는 점으로 미뤄볼 때 이는 억측에 가깝다. 영조는 송절차의 효험을 많이 본 탓인지 5년 동안 음용한 후 복용을 중지했다.
‘앎’으로 극복한 허약 체질
어깨 통증도 영조를 오랫동안 괴롭힌 질병이었다. 침요법은 물론 고약 종류를 직접 붙이거나 다른 보조요법도 사용했다. 솔잎을 쪄서 따뜻하게 감싸는 방법, 누에고치를 볶아서 붙이는 것, 천초를 술과 달여서 팔에 수건으로 감싸는 방법 등이 동원됐다. 영조의 체질에 맞게 탕약도 복용했는데, 특기할 점은 아침에 일어나 팔을 전후로 흔들고 난 뒤 갑자기 좋아졌다며 운동치료의 효험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영조는 허약한 ‘저질 체력’임이 분명했다. 평생 산증으로 인한 복통과 설사, 소변장애 증상으로 고통받았다. 특히 즉위 초기엔 산증과 소화불량으로 힘들어했으며 중년기엔 어깨 통증과 회충으로 인한 소화불량을 호소했다. 말년엔 극심한 피로와 하지무력감, 건망증에 시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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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가 조선 왕들 중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장수에 성공한 왕이 된 비법은 평범했다. 그는 자신의 체질을 알고 질병에 대비하며 스스로 건강을 지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영조는 정치적, 태생적으로 가해지는 엄청난 스트레스 속에서도 건강 비결이 자기를 바로 알고 약점과 단점을 끊임없이 보완하고 실천하는 평범한 것임을 증명한 유일한 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