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나날<br>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마음산책
이 마천루의 어느 한 건물이 출판사 사옥이라면 어떤 기분이 들까. 대학 졸업 후 광화문에 있던 메이저 출판사 M사 편집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나로서는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 대목이다. 그러나 세계 금융의 중심지인 월스트리트처럼, 이곳의 대형 출판사는 세계 출판시장을 겨냥하고 있음을 생각하면 금방 수용할 수밖에 없다.
한 달 또는 두 달여 뉴욕에 머물 때면, 온종일 표류하듯, 맨해튼 거리를 산책하곤 하는데, 산책의 묘미 중 하나가 목적하지 않았던 건물에 불쑥 들어가보는 것이다. 그중 건물의 회전문을 즐겁게 밀고 들어갔다 나오는 곳이 바로 브로드웨이의 랜덤하우스다. 대리석 벽에 높은 천장, 널찍한 1층 로비 한가운데에 놓인 둥근 유리 진열대, 좌우 벽을 장식하고 있는 서가, 그리고 표지 전면이 보이도록 배치해놓은 몇몇 고전 또는 신간 몇몇…. 둥근 유리 진열대에는 줄리언 반스의 소설 ‘A Sense of an Ending’(‘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로 번역 출간)가 전시되어 있고, 왼편 벽의 서가에는 헨리 제임스의 소설 ‘아메리칸’이 제왕처럼 내려다보고 있다.
그리고 천장 가까이 꽂혀 있는 책들의 등을 하나하나 거쳐가다보면 보석처럼 번쩍 눈에 띄는 것이 있는데 바로 제임스 설터의 이름이다. 그러고 보니 두어 달 전, 파리 센 강변의 오래된 영국 서적 서점인 셰익스피어앤컴퍼니에서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 옆에 당당히 자리 잡고 있던 제임스 설터의 ‘어젯밤’이 떠오른다. 나는 습관적으로 조이스의 소설을 집어들었다가 내려놓고 대신 설터의 소설을 반갑게 펼쳤보았다.
아포리즘적 문장
완전한 삶이란 없다. 그 조각만 있을 뿐. 우리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났다. 모든 것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그런데 빠져나갈 이 모든 것들, 만남과 몸부림과 꿈은 계속 퍼붓고 흘러간다…. 우리는 거북이처럼 생각을 없애야 한다. 결의가 굳고 눈이 멀어야 한다. 무엇을 하건, 무엇을 하지 않건 그 반대는 하지 못한다. 행동은 그 대안을 파괴한다. 이것이 인생의 역설이다. 그래서 인생은 선택의 문제이고, 선택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되돌릴 수 없을 뿐이다. 바다에 돌을 떨어트리는 것처럼.
-‘가벼운 나날’ 중에서
제임스 설터는 랜덤하우스의 명편집자 조지프 폭스가 죽을 때까지 옹호하던 작가다. 작가와 편집자는 운명적인 관계다. 일정 수준에 오른 작가를 예로 들면, 그 작가가 어느 출판사의 어떤 편집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사정(세계)이 달라진다. 편집자들은 작가를 발굴하고 세계로 나갈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준다. 세상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작가가 있는데, 모두 편집자의 열렬한 지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설터가 랜덤하우스의 명편집자 조지프 폭스를 사로잡은 것은 앞의 인용에서 보듯 오랜 통찰력에서 나오는 투명하면서도 아포리즘을 거느린 절제된 문장 때문이다. 그의 소설의 특장은 매 단락 새로 시작되는 짧은 연극, 또는 옴니버스 단편영화를 보는 듯한 현장감이다. 소설은 생동감에서 그치지 않고, 그 순간을 서사화해서 독자의 의식 깊이 찔러 넣어주어야 한다. 설터는 연극 또는 영화의 미장센(고유한 장면 연출법)과 소설의 서사 미학을 완벽하게 구현하는, 드문 작가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서사 미학을 창조하는 동력은 바로 현실(사실)을 꿰뚫은 시적인 문장 또는 철학적 사유로 빚어낸 아포리즘적 문장에 있다.
공유한 것은 행복뿐이라는 듯, 그들은 다음날을 계획했다. 이 평온한 시간, 이 안락한 공간, 이 죽음. 실제로 여기에 있는 모든 것들, 접시와 물건들, 조리기구와 그릇들은 모든 부재하는 것의 삽화였다. 과거로부터 밀려온 조각들이고 사라져버린 몸체의 파편들이었다.
-‘가벼운 나날’ 중에서
부부 관계 속 욕망의 랩소디
제임스 설터는 이 지면에서 한 번 다룬 적이 있다. 그의 단편소설집인 ‘어젯밤’이 처음 한국에 소개되던 2010년, ‘파티가 끝난 마지막, 어젯밤’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단편 세계를 스케치했다. 이번에 번역 출간된 ‘가벼운 나날(Light Years)’은 한국에 소개되는 설터의 두 번째 작품으로 미국 현대소설사의 반열에 그의 이름을 올린 대표작이다. 단편집 ‘어젯밤’이 뉴욕을 무대로 살아가는 중산층 부부의 성적 욕망과 균열을 그렸다면, ‘가벼운 나날’은 장편의 흐름으로 맨해튼의 건축사인 비리 벌랜드와 그의 아름다운 아내 네드라 벌랜드의 30년에 걸친 결혼생활을 연대기적으로 보여준다. 연대기는 1950년대 후반, 맨해튼의 허드슨 강 건너 사는 미국의 20대 젊은 부부의 삶의 풍경과 그들의 속물적 지향성을 스케치하면서 시작된다.
1월이었다. 추운 날, 그녀는 시내에 일찍 나왔다. 보도는 얼어붙었고 비둘기들은 ‘FURNITURE’라고 쓰인 간판의 R자 위에서 몸을 웅크렸다. 뉴욕은 소유물의 대성당이었다. 그 냄새조차, 꿈이었다. 이 도시에선 거부당한 사람들조차 떠나지 못했다. (…) 그녀는 미술관에 가고, 남편의 사무실에 들르고, 렉싱턴 애비뉴에 있는 숍에 갔다. (…)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외투를 벗었다. (…) 테이블에 혼자 앉은 남자들이 그녀를 쳐다봤다. (…) 그녀는 컬럼비아 대학을 지나가고 있었다. 차는 막혔지만 그래도 움직였다. (…) 강을 건널 때쯤 나무들은 까매졌다. 그녀는 좌측 차선만 타고 제한 속도를 초과하면서 혼자 달렸다. 피곤했지만 계획들을 생각하면 행복했다.
-‘가벼운 나날’ 중에서
설터가 묘파해낸 30년에 걸친 이 드라마의 핵심은 부부 관계 속에 도사리고 있는 욕망의 랩소디(狂詩曲)다. 즉, 두 명의 개체(타인)가 만나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지속해나가는 중에 끊임없이 발생하는 외도(外道)의 욕망이 다채로운 파고(波高)를 이루며 펼쳐진다. 처녀림의 호수처럼 맑고 잔잔하고 고요하던 두 사람의 마음에 파문이 일고, 번지고, 흔들리는 가운데 부부의 삶은 진부해지고, 인생은 각자의 종착지를 향해 흘러간다.
네드라가 그의 옆, 자기 자리에 누웠다. 그는 조용히 누워 있었지만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존재는 가정의 신성함과 질서의 마지막 징표였다. 훌륭한 지휘관이 제일 늦게 잠드는 것과 같았다. 집은 조용했고, 창문은 어두웠다. 딸들은 침대에 누웠다. 그의 가까이 어디엔가 있는 네드라의 손가락에는 결혼 금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 그들은 어둠 속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방 뒤쪽 어디엔가 있는 책상의 서랍 속에는 잡지와 신문에서 글귀를 오려붙여서 쓴 편지들이 들어 있었다. 유머와 열정이 담긴 연애편지였다. 그들이 결혼하기 전 비리가 조지아 주에서 군대에 있으면서 혼자 힘들어할 때 쓴, 유명한 편지였다.
-‘가벼운 나날’ 중에서
이 대목은 소설의 중심인물 중 하나인 비리, 곧 네드라의 남편이 첫 외도를 한 뒤 돌아와 잠자리에 드는 장면이다. 그는 세인의 시선을 끌 정도로 아름다운 아내 네드라를 사랑하고 아이들에게 충실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것은 고스란히 네드라에게도 해당된다. 둘은 한 가정의 구성원으로서의 남편과 아내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면서 남자와 여자라는 개체로서의 욕망도 좇는 이중의 삶을 이어간다. 설터는 이러한 결혼 상태의 남녀에게 생성되는 미세한 감정과 파국(이혼)에 이르는 다채로운 감정선의 향방을 서사화하는데 핀셋으로 집어내듯이 예리한 한편, 그 장면에 좀 더 머물러 있고 싶을 만큼 문장이 유려하다.
참을 수 없는 순간
그는 마흔일곱이었다. 로마의 햇빛 아래 서니 머리엔 숱이 없었다. 그는 유럽의 도시 속에 파묻혀 있었다. 비둘기가 어느 구석에나 모여 있고, 성자들의 무덤 위에 잠들어 있었다. 그는 가판대에 ‘뉴욕 트리뷴’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혼자서 식사를 하는 남자였다. 창에 비친, 햇빛을 받은 자신의 얼굴을 보고 그는 충격을 받았다. 그건 고대 정치가의, 연금 수령자의 얼굴이었다. 주름살은 잉크처럼 까맸다. 늙었다고 무시하지 말길, 그는 빌었다.
-‘가벼운 나날’ 중에서
인생의 이러저러한 사건과 순간이 소설로 빚어지려면, 여러 갈래의 형상(aspects)이 하나의 주제 아래 수렴되는 중에 작가만의 고유한 표현력, 곧 문장력이 결정적으로 작용해야 한다. 설터의 소설을 읽다보면 그 사실이 명료해진다. 1975년에 출간된 설터의 이 소설이 세계 자본 시장의 정글인 맨해튼 한복판에 자리를 잡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결국 작가의 생명력은, 동시에 소설의 순금 부분은 피할 수 없는, 또는 참을 수 없는 순간을 전달하는 문장의 힘에 있다. 뜨거운 여름날, 훌쩍 일상을 벗어나, 하루이틀 자신의 지나온 날들, 또는 앞으로 다가올 날들로 새로워지고 싶다면, 설터의 ‘가벼운 나날’을 권한다.
숲은 숨을 쉬는 듯했다. 마치 그를 알아보고 숲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그는 변화를 느꼈다. 깊게 감동하듯 감사를 느꼈다. 피가 머리를 빠져나와 온몸에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