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朴 정부와 철학 다르면 나가라는 거냐?”
- 국정원 “안보 연구 특화 위한 조치일 뿐”
- 南 원장 “절차, 원칙 세워 구조조정하라”
남재준 국가정보원장이 6월 25일 국회 정보위원회 회의장으로 향하고 있다. 국정원은 NLL 대화록 전격 공개와 대선개입 의혹 국정조사로 정쟁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참군인의 전형이다. 깨끗하고, 강직하고, 꼿꼿하고, 사심이 없다. 원칙주의자다. 북한과 직접 연계된 종북 세력을 응징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국정원이 정권을 위한 조직이 아니라 국가를 위한 조직이 돼야 한다는 원칙도 갖고 있다.”
정권 교체, 원장 교체 때마다 국정원은 몸살을 앓았다. 인적 쇄신을 명분 삼은 물갈이가 거칠었다. 인사에서 소외된 이들은 야권에 줄을 대기도 했다. ‘정권의 시녀’를 자임해 잘나가는 이도 나왔다. ‘남재준 국정원은 이런 구태를 일소할 수 있을까.
정권 교체 때마다 몸살
3월 22일 남 원장 취임 이후 인사를 둘러싼 잡음이 가장 먼저 새어나온 곳은 국정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소(소장 유성옥)다. 이 연구소는 박정희 정부 때인 1977년 9월 창설됐다. 대북전략, 통일·외교·안보·경제정책을 연구해왔다. 2000년 이후엔 테러·국제범죄·산업·사이버 보안 등으로 연구영역을 확대했다. 이헌수 기획조정실장 산하인 것으로 알려졌다.
국정원은 5월 중순 국가안보전략연구소에 대한 구조조정에 나섰다. 30여 명의 박사급 연구위원 중 절반을 내보내기로 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연구소가 술렁였다. 류길재 통일부 장관이 구명 노력에 나선 것으로도 알려졌다. 남 원장이 “우리와 맞지 않는 사람은 내보내라”고 지시해 구조조정이 시작됐다는 얘기가 나왔다. 이 대목에서 ‘우리와 맞지 않는 사람’은 야권 성향 인사인 것으로 해석됐다. 하지만 국정원 측의 설명은 다르다.
“우리와 맞지 않는 사람은 설립 취지에 맞지 않는 이들을 말한 것이다. 실무 부서에서 ‘연구소는 도대체 뭐하고 있느냐’는 지적이 있었다. 설립 취지에 부합하지 못하고 자기 연구 위주로 공부하는 분이 많다. 과거에 ‘아는 사람’, 이런 식으로 채용되다보니 연구소 성격과 맞지 않는 것이다. 미국 경제 논문을 쓰는 사람도 있다. 국민 세금이 허투루 쓰여서는 안 된다. 대(對)테러라든지, 사이버 보안이라든지 우리가 집중해야 할 분야가 많다. 설립 목적에 맞지 않는 사람은 재계약하지 않는 방향으로 구조조정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3년, 5년 계약직인데, 계약기간 만료 때 재계약을 안 하고 내보내는 방식으로 한다.”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일부 연구위원들은 국정원이 구조조정 방침에서 한발 물러선 것으로 알고 있으나 물갈이는 이렇듯 현재진행형이다. 구조조정 대상자로 거론되는 것으로 외부에 알려진 이들 중 A, B, C 3명의 박사급 연구위원이 주목받았다.
A 박사는 야당 후원회 가입을 비롯한 외부 활동이 문제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노무현 정부가 임기 말에 추진한 ‘한반도 평화체제’ 전문가다. 노무현 정부의 평화체제 구상엔 A 박사의 연구결과도 녹아들어가 있다. B 박사는 노무현 정부 때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일했다. NSC 사무처장을 지낸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측근이다. 이 전 장관 아래서 장관정책보좌관으로도 일했다. C 박사는 언론에 보안사항을 누설했다는 혐의를 받은 적이 있으나 위반 사실이 확인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A, B, C 박사는 대북정책을 들여다보는 시각이 여권보다는 야권에 가깝다는 평가를 듣는다. 이명박 정부 때도 야당과의 관계를 비롯해 이런저런 이유로 징계를 받는 등 국정원 지휘부와 불편했다. 남 원장의 구조조정 지시를 두고 “박근혜 정부와 철학이 맞지 않는 이들을 내보내려 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제기된 까닭이다. 국가안보전략연구소의 구조조정이 앞으로 있을 국정원 인적 쇄신의 신호탄이 아니냐는 해석도 나왔다.
“일부 연구위원 물의 일으켜”
국정원 측의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을 들어보자.
“국가안보전략연구소는 1977년 설립 이후 대북, 국제, 안보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하다 무원칙적으로 국내, 경제, 산업 등 비(非)안보 분야까지 연구가 확대됐다. 임무와 기능이 불분명해진 데다 연구의 질적 수준이 저하했다고 판단했다. 또한 일부 연구위원들은 개인의 입지 강화를 위한 대외활동에 몰두해 본연의 연구 임무를 소홀히 하면서 갖가지 물의를 일으키는 등 기강 확립 필요성이 대두됐다.
안보 문제에 특화한 연구소로 전문화하고자 임무, 기능을 정비하면서 구조조정에 나선 것이다. 북한·통일 전략, 동북아 전략, 대테러 등 순수 안보 분야에 연구 역량을 집중하는 것으로 구조조정을 추진한다. 국내 관련 정책과 현안을 연구하는 조직을 폐지하면서 국정원이 국내 문제에 관여할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것도 구조조정 방향이다.”
국정원은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연구위원 중 희망자를 대상으로 명예퇴직 기회를 제공했다고 밝혔다. 경제 문제 등을 다뤄온 연구소 내 국익연구실은 폐지하는 쪽으로 방침을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구조조정의 폭, 대상 등을 두고 국정원 내에서 토론이 있었다고 한다. 강경한 이들과 온건한 이들로 나뉘었는데, 남 원장이 이렇게 정리했다고 한다.
“법에 어긋나는 짓 하지 마라. 법적 요건에 맞으면 내보내라.”
시곗바늘을 뒤로 돌려 김대중 정부 시절 국정원의 물갈이 사례를 잠시 살펴보자. ‘김대중 국정원’은 과거 정권과 가까웠던 이들을 한직으로 배치했고, 일부는 과거의 비위를 이유로 면직했다. 그중 일부가 ‘국사모(국가정보원을 사랑하는 모임)’를 조직해 김대중-노무현 정부에 소송을 제기하는 등 충돌했다.
2003년 8월 13일 서울행정법원은 전직 국가정보원 2~3급 간부 21명이 “정치적 보복으로 인해 부당하게 면직됐다”며 국정원장을 상대로 낸 직권면직 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원고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는 면직 시 국정원직원법이 정한 임용형태, 업무실적, 직무수행능력 등을 고려해 정해야 함에도 업무실적을 고려하지 않은 상태에서 면직이 이뤄졌다”며 “일부 사항을 빠뜨린 채 이뤄진 직권면직 처분은 위법하다”고 밝혔다. “법에 어긋나는 짓 하지 마라”는 남 원장의 언급은 이 같은 전례를 염두에 둔 것으로도 해석된다. 국정원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징계 누적자는 어쩔 수 없다”
“잘못을 저지른 게 있는 일부 박사들이 자신들을 내보내려는 줄 알고 사실과 다른 얘기(박근혜 정부와 맞지 않는 사람들을 내보내려 한다)를 퍼뜨린 것으로 보인다. 사실 국책연구기관에서 일하는 사람이 정치권과 연결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더구나 야당하고는 더욱 그렇다. 그 사람들의 근무 자세와 관련한 문제인데, 그래도 그것만 가지고 재계약을 체결하지 않을 수는 없다. 소송하면 우리가 진다.”
국정원 산하 연구소라고 해서 근로기준법의 적용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특정인에게 해직을 강권하는 것은 불법이다. 남 원장은 구조조정을 둘러싼 논란과 관련해 최근 “포용하는 식으로 가자”고 정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절차와 원칙을 제대로 세운 후 그에 근거해서 하라. 합리적 기준을 갖고 하라. 무리하게 하지 마라. 이념에 의해서가 아니라 징계가 누적돼 한계에 도달했다든지, 실력에 문제가 있다든지, 문제를 일으킨 게 누적됐다든지 하는 경우는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는 취지로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국정원 측은 “전공 등이 연구소와 맞지 않으면 재계약을 하지 않을 수 있다. 구조조정 대상자는 재계약 만료 시점이 되기 전 예고한다. 일자리를 알아보거나 앞길을 개척할 시간을 주는 것이다. 다 닥쳐서 내보내는 곳도 있지 않나. 인간적인 방식으로 구조조정한다”고 말했다.
국정원 측은 ‘신동아’ 마감 직전인 7월 15일 서면 자료를 추가로 보내와 이렇게 설명했다.
“연구소 임무·기능 변경과 조직개편으로 인해 해편되는 연구실 소속 비안보분야 전공자들에 대해서는 안보분야 연구 역량을 객관적으로 평가해 재배치할 예정이다. 부득이하게 해촉하는 연구원들은 실직에 따른 경제적 부담을 줄여주고자 1년간 공로연수 형식으로 급여를 지급하는 등 예산범위 내에서 최대한 지원할 방침이다. 구조조정에는 정치적 고려가 일절 포함돼 있지 않다. (이종석 전 장관과 가까운) B 연구위원과는 최근 재계약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