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월호에서 역사적 사건은 세 방향에서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바꿀 수 없거나 상황을 제한하는 객관적 조건, 그럼에도 발휘되는 창조력이나 가치 같은 자유의지, 마지막으로 서로 다른 원인들의 충돌이 빚어내는 우연.
- 이 셋의 변주가 역사를, 인간 세상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준다. 그래도 우리의 궁금증은 멈추지 않는다.
- 그 일이 왜 일어났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못 믿겠다’는 속담은 상반된 상황에서 쓰지만, 원인과 결과가 상응한다는 상식적 판단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선 같다. 그런데 역사에선 이렇게 간단하지 않아 오류가 자주 발생한다.
‘왜?’에 대한 반발
그런데 의외로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왜’에 대해 부정적인 학자가 많다. 카프카, 사르트르, 러셀 같은 학자들도 인과론(causality)에 회의적이었다. 역사학자 중에서도 그런 경우가 많지만, 미국사의 고전인 ‘미국민중사’(유강은 옮김, 이후)의 저자 하워드 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원인과 옥신각신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원인이란 것이 문제의 핵심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면 우리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할 뿐만 아니라, 나쁜 경우에는 심지어 꼼짝 못하게 만드는 뭔가를 만들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인과관계란 단지 복잡한 것만이 아니다. 철학자들에 따르면 그것은 해결이 불가능한 문제다. 아마 그것은 우리 자신과 현실 사이에 언어의 장애물을 설치하려는 성향이 만들어낸 형이상학적 수수께끼의 하나인지도 모른다.
-The Southern Mystique, 1964
이렇게 원인이란 말을 덜어내면서 역사학자들은 대신 ‘영향(influences)’ ‘원동력(impulses)’ ‘요소(elements)’ ‘뿌리(roots)’ ‘기초(bases)’ ‘토대(foundation)’와 같은 표현을 썼다. 이밖에도 비슷한 말은 역사학자들이 다 가져다 썼을 것이다. 그렇다고 원인에 대한 향수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그것이 모호하건 불만이건 역사는 태생적으로 원인에 대한 탐구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 글은 할리카르낫소스 출신 헤로도투스가 제출하는 탐사 보고서다. 그 목적은 인간들의 행정이 시간이 지나면서 망각되고, 헬라스인들과 비(非)헬라스인들의 위대하고도 놀라운 업적들이 사라지는 것을 막고, 무엇보다도 헬라스인들과 비헬라스인들이 서로 전쟁을 하게 된 원인을 밝히는 데 있다.
- ‘역사’, 헤로도투스, 천병희 역, ‘ 도서출판 숲
헬라스인과 비헬라스인의 전쟁이란 페르시아 전쟁을 말한다. 무지막지한 왜곡을 수반한 영화 ‘300’의 모티프도 헤로도투스의 이 역사책에서 나왔다. 인류의 가장 오랜 역사서 중 하나인 ‘역사’의 출발이 바로 ①업적에 대한 기억과 ②전쟁의 원인 탐구였다는 점에서 이미 ‘원인’에 대한 오랜 유전자를 감지할 수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역사가 사마천은 달랐다.
다시 사마천과 헤로도투스
“한나라가 흥기하여 천하가 하나로 통일되고, 현명한 군주와 어진 임금과 충성스러운 신하와 정의를 보고 죽는 인물이 나왔다. 그러나 내가 태사(太史)가 되고도 이들을 논하고 기록하지 못해 천하의 역사 문헌을 폐기하였구나. 나는 이것이 매우 두렵다. 너는 이 점을 염두에 두어라.”
사마천은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소자가 영민하지 못하나 아버님께서 순서대로 정리해두신 옛 문헌을 빠짐없이 모두 논술하겠습니다.”
-‘사기’의 ‘태사공자서’, 사마천, 김원중 옮김, 민음사
사마천의 방점은 헤로도투스가 역사를 남긴 첫 번째 이유에 찍혀 있다. 이는 사마천이 ‘춘추(春秋)’의 전통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인데, 공자가 편찬했다고 전해지는 역사서 ‘춘추’에 대해 맹자는 “공자가 ‘춘추’를 완성하자 세상을 어지럽히는 자들과 어버이를 죽이는 자식들이 두려워하였다”고 말했다. 기록되는 것으로 심판받는 것, 이것이 통상 생각하는 동아시아 역사의 기능이기도 했다. 거기에 더해 사마천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백이와 숙제는 비록 어진 사람이기는 하지만 공자의 칭찬이 있고나서부터 그 명성이 더욱더 드러나게 되었다. 안연은 학문을 매우 좋아하기는 하였지만 공자라는 천리마의 꼬리에 붙어 행동이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 바위나 동굴 속에 숨어 사는 선비들은 일정한 때를 보아 나아가고 물러난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의 명성이 묻혀 세상에 일컬어지지 않는 것은 슬픈 일이다. 시골에 묻혀 사는 사람이 덕행을 닦아 명성을 세우고자 하더라도 덕행과 지위가 높은 선비에 기대지 못한다면 어떻게 후세에 이름을 남길 수 있겠는가?
-앞과 같은 책, ‘백이숙제열전’
후세에 이름을 남긴다는 사마천의 표현을 지나친 공명심으로 해석할 일은 아니다. 이름을 남긴다는 말은 흔적을 남긴다는 말이다. 삶의 흔적을 사마천 자신이 기록해주겠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마천은 열전에 참으로 많은 인간의 모습을 담으려애썼다. 백이, 숙제부터 형가(荊軻) 같은 협객은 물론 재화에 도가 텄던 경제통들의 열전인 화식(貨殖)에 이르기까지.
요즘도 스페인 축구팀을 ‘무적함대(Armada)’라고 부른다. 거기엔 이유가 있다. 1588년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영국을 침공하려고 플랑드르에서 출동시킨 함대의 명칭이 무적함대였기 때문에 지금까지 스페인 축구팀의 애칭으로 불리는 것이다.
무적함대의 패배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이 지휘한 스페인 함대는 130척의 선박에 약 8000명의 선원, 1만9000명의 병사로 이뤄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 가운데 약 40척은 전함이며 나머지는 대개 수송선과 소형 선박이었다. 스페인 측은 자신들의 선박 가운데 최상의 것조차 영국 선박보다 느리며 중평사포의 성능도 뒤떨어진다는 점을 알았으나 영국군과 싸울 경우 상대편 전함에 올라타 상대를 무찌를 수 있는 역량을 믿고 있었으며, 그 후 영국군보다 우세한 스페인 보병이 결정적인 역할을 해줄 것으로 생각했다(‘브리태니커’).
그러나 마치 적벽대전에서 제갈공명이 조조의 군대를 혼란에 몰아넣었던 화공선(火攻船) 전략과 유사한 전법으로 영국군은 스페인군을 와해시켰고, 스페인군은 60척만이 귀환할 수 있었다. 전사한 병사만 1만5000명이었다.
어떤 역사학자들은 무적함대의 패전으로 스페인이 몰락하고 영국이 떠올랐다고 말한다. 아르마다의 패배 탓에 아메리카와의 유통망이 붕괴됐고 스페인 경제가 삐걱거리게 됐다는 관찰이다. 그러나 무적함대가 패배했던 1588년 이후, 1603년까지 스페인은 영국에서 제해권을 빼앗기지 않았다는 설이 유력하다. 개릿 매팅리는 “다른 시기 어떤 15년보다도 1588년부터 1603년까지 스페인에 도착한 아메리카 보물이 훨씬 많았다”고 논증했다(The Armada, 1959).
그런데 어떤 학자들은 아르마다 해전 이후 엘리자베스 1세 마지막 15년 동안 문학적 재능을 가진 천재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고 말한다. 매팅리는 “아르마다 패전과 엘리자베스 시대 드라마의 만개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는 주장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과연 ‘그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를 증명하는 것은 더 어렵다”고 말한다.
‘그 이후에’의 오류
신교(영국)와 구교(스페인)의 대립이 여기에 내재하기도 했고, 영국 민족주의의 성장이라는 배경도 한몫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것은, 무적함대의 패배가 무척 강력한 역사적 사건이긴 하지만 그 결과는 별것 아닐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무적함대의 패배는 싸우라고 보낸 전략의 실패를 제외하곤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이러한 사실은 영국인이 그 해전을 통해 축적한 애국주의 본능에 반하는 것일 수도 있고, 큰 사건으로부터 강한 감동을 느끼고 싶어 하는 우리의 미적 감수성에 어긋난 것일 수도 있다. 우리가 큰 사건은 반드시 심각한 결과를 가져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무적함대의 패배와 결과를 둘러싼 인과에 대한 견해, 거기서 우리는 ‘그 이후에’의 오류(the fallacy of post hoc, propter hoc)’를 발견한다.
참고로, ‘그 이후에’의 오류가 있는 한편, ‘그 이전에’의 오류(the fallacy of pro hoc, propter hoc)도 있다. 이 오류는 단순하고 자명한 인과 법칙을 위반할 때 나타나는 잘못이다. A사건이 C사건 전에 일어났다면, C사건 때문에 A사건이 일어날 수는 없다. 당연한 말이지만 역사에는 ‘앞선’ 결과나 ‘같이 발생하는’ 원인은 없다.
큰 사건은 반드시 심각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생각에서 ‘동일시의 오류(the fallacy of identity)’라고 할 만한 오류가 생긴다. 이 오류는 원인은 그 결과와 비슷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이는 명백히 ‘치료 효과를 지닌 모든 자연물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외적 특성을 통해 그것이 고칠 수 있는 질병을 암시한다’는 민간요법의 생각을 깔고 있다. 울금(turmeric)은 황달(jaundice)에 좋다거나, 혈석(bloodstone)은 피가 날 때 효과가 있다거나 하는 따위다. 인삼이 사람 몸에 좋은 것은 인삼 형태가 사람을 닮았기 때문이라고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정작 인삼이 의학적으로 몸에 맞지 않는 필자 같은 사람도 있다).
결과는 원인을 닮는다?
동일시의 오류는 무적함대 사례뿐 아니라 가까운 데서도 찾을 수 있다. 청나라의 몰락 원인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어떤 역사학자는 “몰락이 너무 급작스럽고 예기치 못했듯이, 청나라 국운의 역전은 무언가 깊은 원인이 있었음에 틀림없다”라고 추정했다(C. P. Fitzgerald, The Birth of Communist China, 1966). 그러나 과연 ‘깊은 원인’이 있었을까.
이렇게 ‘큰 사건’에 걸맞은 ‘깊은 원인’을 찾다보면 빠지는 함정이 뭔가 절대적인 우선순위(또는 제1 원인)의 오류(the fallacy of absolute priority)다. 간단히 말해서 여러 원인 중 으뜸가는 원인 항목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A1사건이 B1사건의 원인이라면, A2사건이 B1사건의 원인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마 많은 독자가 짐작했겠지만, 아무리 모호하게 들리더라도 원래 역사의 인과에 관한 문제는 n개의 A와 n개의 B 사이의 상호관계로 이해하는 편이 무엇보다도 합당하다.
막스 베버의 명제를 살펴보자. 프로테스탄티즘이 아메리카나 유럽에서 자본주의를 급속히 발달시키는 원인이었는가. 또는 자본주의가 프로테스탄티즘의 확대에 원인이 되었는가. 역사가들은 수 세대 동안 이 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여왔다. 베버의 문제 설정이 타당한지도 문제지만, 이런 식의 논쟁은 당초 ‘제1 원인에 대한 집착’을 피할 수 없다. 아무렴, 인류사의 거대한 두 운동 사이엔 뭔가 상호작용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창세기(the Book of Genesis)’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추적할 수 있는 원형-프로테스탄티즘이나 원형-자본주의가 처음에 어떤 것이 원인이 되고 어떤 것이 결과가 됐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미국 역사학자들 사이에도 이와 비슷한 논쟁이 있다. 미국 흑인의 열등성이 흑인에 대한 편견의 원인인가, 아니면 그 편견이 열등성의 원인인가. 두 진영으로 나뉘어 논쟁이 지속됐던바, 뮈르달이 말했듯이 편견이 열등성의 원인이 됐고 그 열등성이 편견을 낳았다는 설명이 가장 설득력 있다고 생각한다. 앵글로색슨-아메리칸들 사이엔 처음부터 강력한 반(反)흑인 정서가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아프리칸 흑인의 문화적 유산의 성격과 앵글로색슨-아메리칸 문화의 성격, 두 문화 변화 과정의 성격 자체가 처음부터 흑인에게 문화적으로(인종적이 아니라) 열등한 조건과 지위를 부여했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기계론적 접근
제1 원인에 대한 집착의 사촌쯤 되는 서술 방식이 ‘기계론적 원인의 오류(the fallacy of the mechanistic cause)’다. 사회 상황이나 시스템의 다양한 구성요소를 서로 분리된 것으로, 단일한 것으로, 독립적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처리하는 설명 방식이다. 그러다보면 복잡한 인과에서 덜어내거나 더하게 되고, 따라서 그만큼 결과를 확대하거나 축소한다. 나는 이 문제를 경험한 적이 있다.
최근 필자의 책이 나오고 나서 조금 달라졌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광해군은 백성들의 세금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대동법 개혁을 추진한 임금으로 추앙됐다. 광해군은 하려고 했는데, 양반들이 반대했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내정(內政)에서는 대동법의 실패, 과중한 궁궐공사로 점수를 잃었지만 대외 정책은 명분론에 빠지지 않는 중립외교를 성공적으로 이끌어갔다고 설명하나보다. 일각에선 이런 걸 ‘균형 잡힌 시각’이라고 한단다. 그러나 나는 역사 공부는 ‘시각의 균형’을 추구하는 학문이 아니라 ‘사료(史料)가 보여주는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뿐 아니라, 이 ‘균형 잡힌 시각’이야말로 ‘기계론적 오류’의 전형적인 사례다. 광해군 때의 정책이 갖는 상호작용, 연관성을 놓친 나머지 왜곡될 수밖에 없는 해석이기 때문이다. 대동법과 궁궐공사는 공물(貢物)로 연결돼 있었다. 대동법이 공물을 합리적으로 줄이기 위한 정책이었다면 궁궐공사는 공물의 과대소비였으므로 둘은 상극의 정책이었다. 또 대동법과 계축옥사는 사람으로 연결돼 있었다. 계축옥사를 기점으로 호조판서가 이원익(李元翼)과 함께 대동법을 추진하던 황신(黃愼)에서 궁궐공사의 재정조달을 맡았던 이충(李沖)으로 바뀐다. 황신은 귀양을 갔다. 그걸로 대동법도 물 건너갔다.
이 문제는 궁궐공사에 이어 명나라의 요청으로 후금과 싸우기 위해 군대를 파견한 일과도 맞물려 있다. 심하(深河) 파병이다. 백성을 부유하게 만들기는커녕 도탄에 빠져 허덕이게 만들어 인심이 떠난 지 오래였고, 군수물자는 군비가 아닌 궁궐공사에 투여되고 있었다. 수군(水軍)은 목재와 석재를 나르는 데 동원됐고, 남한산성이나 강화에 비축했던 곡식 역시 공사비용에 충당됐다. 파병할 때 군사들은 변변한 훈련도 받지 못하고 추위를 막을 옷을 입지도 못하고 떠났다. ‘시각의 균형’ 뒤에 숨은 ‘미숙한 시각’을 구별해야 하는 이유다.
아프리칸-흑인을 납치해온 영국 배 브룩스(Brookes) 호의 ‘탑재할 화물’ 도안. 도안에는 ‘아래 갑판 292명 적재 계획. 이 중 130명은 선반 아래 적재함’ ‘2피트 7인치 이하는 가장자리 선반에 적재함’이라고 하여 여자, 남자, 아이 칸을 구분했다. 흑인의 열등성과 편견은 이러한 노예무역에서 출발한 열등한 문화적 조건과 편견의 상호작용이다.
슬픈 사실
활을 통해 ‘민초의 생명력’을 강조한 영화 ‘최종병기 활’. 후금 침략군의 앞잡이가 다름 아닌 광해군이 중립외교를 맡겼던 총사령관 강홍립이었다는 사실은 이 영화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이 영화 역시 우리가 논의하는 책임과 원인을 혼동하는 오류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는 자신의 역량을 주요 변수로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조선이 스스로 동아시아 주요 변수 또는 상수가 될 수 있는 기회를 광해군은 발로 차버린 셈이다. 후금의 강성은 조선의 피폐를 배경으로 한다. 그것이 유일한 원인은 아니겠지만, 유력한 원인이다.
더 슬프면서도 흥미로운 사료 하나를 소개한다. 심하 전투 때 장렬히 전사한 김응하(金應河) 장군 등과는 달리 도원수(총사령관) 강홍립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항복했다. 문관이었던 강홍립을 도원수로 삼은 것은 광해군이 글과 말로 오고가는 외교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한다. 광해군의 밀명을 받은 강홍립이 ‘관형향배(觀形向背)’, 즉 ‘형세를 보고 싸우든지 말든지 하는 전략(?)’을 취하다 전황이 불리해지자 후금에 어쩔 수 없이 참전했음을 알린 뒤 항복했다는 것이다. 전후 사정으로 보아 광해군의 밀지는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강홍립은 이후 광해군과 후금을 잇는 핫라인이 된다.
한 사람 더. 인조반정 이후, 이괄(李适)의 난 때 후금으로 도망친 한윤(韓潤)은 강홍립과 함께 후금의 누루하치를 부추겨 조선으로 쳐들어 갈 것을 청했다. 누루하치마저 그들이 자기 나라를 배반한 것을 미워해 꾸짖고 물리쳤다고 한다. 이후 홍타시(弘他時)가 대를 이어 즉위하자 강홍립과 한윤이 간청해 이들은 소원을 이뤘다고 한다.
결국 이듬해인 1627년(인조 5년)에 후금은 8만여 기(騎)의 군사를 거느리고 조선을 침략한바, 바로 정묘호란이다. 강홍립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침략할 땐 길잡이였고, 조선과 후금이 휴전협정을 맺을 때는 통역을 맡았다. 어떤 사람은 강홍립이 앞잡이가 됐기 때문에 황해도 백성이 덜 죽었다고 한다. 어찌 이런 해석을 할 수 있는지. 이게 광해군의 ‘중립외교’, 아니 기회주의의 종말이다.
이 점을 놓치다보니, 또 다른 해석의 오류에 빠진다. 사실 전쟁이 일어나면 원인이 무엇이든 위정자는 무한 책임을 진다. 그런 책임을 지라고 정치를 맡긴 것이니까. 그래서 임진왜란 때 선조가 파천하자마자 경복궁이 불탔던 것이다. 왜군의 손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 나라 백성의 손에 의해서. 책임을 물은 것이다. 그리고 그 책임은 당시 살았던 백성들만 묻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를 연구하고 읽는 학자나 독자들도 묻는다. 감정이 이입될수록 그 책임 추궁은 심해진다. 역사를 탐구할 때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니까 어쩔 수 없기도 하다.
인조 때 일어난 정묘호란, 병자호란의 경우도 연구자들 사이에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인조 정권, 반정(反正)세력에 책임을 묻는 것이다. 있을 수 있다. 그 극단적 해석 중 하나가 명나라에 대한 명분에 사로잡혀 현실 판단을 그르쳤다는 평가다.
책임과 원인의 혼동
현실 판단에서 명분이 배제될 수 있는 것인지 어떤지는 차치하고, 늘 원칙[理]과 형세[勢]를 함께 생각했던 사람들이 과연 그리 단순했을까 하는 의문도 차치하고, 사신으로 갔던 사람들이 명나라는 이대로 가다간 망할 것이라고 보고했는데 과연 명나라에 대한 태도가 ‘맹목성’이라는 말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인지도 차치하고, 위의 평가에서 심각한 오류는 바로 ‘책임을 원인으로 착각하는 오류(the fallacy of responsibility as cause)’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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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 말하지만, 선조든 인조든 위정자는 전쟁의 책임을 져야 한다. 그래서 정치가다. 그러나 이들 또는 이들의 정책이 전쟁의 원인은 아니다. 원인은 왜군과 후금(청)의 침략이다. 이런 점을 혼동하면 우리는 원인의 늪에 빠져버린다. 이 오류는 윤리적 문제를 수행자의 문제와 혼동함으로써 둘 다에 대한 이해를 그르친다. 원래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가?”라는 질문과 “누가 비난받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다른 것이다. 이런데 위의 오류는 이 두 가지 질문을 하고, 하나의 답을 요구한다. 이런 오류를 피하는 방법, 불행하게도 몸도 마음도 조금 떨어져서 보는 것밖에 달리 묘책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