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이 열리고 있는 민사법정
#2 김효자 씨의 아버지는 상당한 재력이 있는 70세 노인인데 최근 치매 증세가 생겼다. 김 씨는 정신이 온전치 못한 아버지가 사기라도 당해 재산을 날리면 어떻게 하나 전전긍긍했다. 그러던 중 한정치산자 제도가 있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나서 아버지에 대한 한정치산 선고 절차를 진행하기로 했다.
#3 남편 나금수 씨가 아이들에 대한 폭행은 물론 성추행까지 서슴지 않자 참다못한 아내 최비운 씨는 이혼을 했다. 최 씨는 1남1녀에 대한 단독친권자로 지정돼 홀로 이들을 키웠다. 그러던 중 최 씨는 우울증으로 자살했다. 친아버지 나금수 씨는 자신이 친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에 대해 아이들의 외할머니는 자신이 아이들을 돌보겠다고 주장하고 있다.
만 19세 대학생도 성인
민법은 모든 법의 근본 원리를 이루는 ‘법률 중의 법률’이다. 1200개가 넘는 법률 가운데 조문 수도 1118개로 가장 많다. 올해 7월 1일부터 대폭 개정된 민법이 시행됐다. 개정 민법 중 가족관계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내용이 상당수 포함됐다.
가장 눈에 띄는 개정 사항은 성년이 되는 나이가 만 20세에서 만 19세로 낮아진 점이다. 또한 금치산자, 한정치산자 제도가 폐지됐고 성년후견인 제도가 새로 도입됐다. 미성년자를 입양할 때 친부모의 동의뿐 아니라 법원의 허가도 받도록 했다.
개정 전 민법은 유효한 법률행위를 할 수 없는 사람을 무능력자로 불렀고 미성년자, 한정치산자, 금치산자를 무능력자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개정 민법은 무능력자라는 용어를 ‘제한능력자’로 바꾸었다. 사실 ‘무능력자’라는 표현엔 지나치게 부정적이고 인격을 무시하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개정 민법에서도 미성년자는 유효한 법률행위를 할 수 없지만, 미성년자의 연령대가 1년 하향 조정됐다. 만 19세는 대학교 1학년이 될 수 있는 나이인데 대학생을 미성년자로 취급하는 것은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비판이 많았다. 공직선거법은 이미 만 19세부터 선거권을 부여하고 있는 점, 청소년보호법도 만 19세부터는 청소년으로 인정하지 않는 점도 고려됐을 것이다. 이번 민법 개정으로 미성년자 제도가 보다 현실감을 갖게 됐다고 할 수 있다.
미성년자가 부모의 동의 없이 한 법률행위는 원칙적으로 취소할 수 있다. 미성년자가 법률행위를 취소하고자 할 때에는 그 이유를 가리지 않고 취소할 수 있다. 구입한 물건에 하자가 있거나 착각에 빠져 구입한 경우는 물론이고 단순 변심에 의한 취소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미성년자가가 취소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기간은 성년이 된 날로부터 3년까지다.
이러한 법적 권리는 미성년자에게는 매우 강력한 무기가 되는 반면 미성년자와 거래한 상대방은 언제 계약이 취소될지 모르는 불안한 상태에 놓이게 한다. 민법이 이러한 불균형에도 불구하고 미성년자의 취소권을 인정하는 이유는 그만큼 미성년자를 보호해야 할 필요성이 크다는 데 있다.
사례 1의 노미성 군은 만 19세가 넘었기 때문에 6월 30일 이전에는 미성년자였지만 7월 1일부터는 성년자가 됐다. 노미성 군이 6월 30일 이전에 교재를 구입했다면 노 군은 교재 구입을 취소할 수 있고 교재대금을 지급할 필요가 없다. 이미 지불한 대금이 있다면 반환을 청구할 수도 있다. 수령한 영어교재는 물론 다시 돌려줘야 한다. 그런데 영어교재와 CD를 받아 포장을 뜯고 책에 낙서를 하고 CD를 실컷 들었더라도 그 상태로 반환하면 그만이라는 점에서 다른 법의 계약철회권과 큰 차이가 있다.
그러나 노 군이 교재를 구입한 날이 올해 7월 1일 이후라면 이미 성년이 된 이후에 계약을 한 것이기 때문에 유효한 계약이 되고 원칙적으로 취소할 수 없다. 물론 속아서 구입했다거나 물건에 하자가 있다면 취소할 수 있다. 노 군의 경우에는 학교 강의실로 찾아온 판매사원과 계약을 체결한 것으로 방문판매에 해당한다. 방문판매법에 의해 교재를 수령한 날로부터 7일 이내에는 계약을 철회할 수 있다. 단순 변심에 의한 철회도 가능하지만 책이나 CD의 포장을 뜯으면 계약을 철회할 수 없다는 점에서 미성년자의 취소와는 차이가 있다.
성년후견 한정후견 특정후견
과거 민법은 정신 상태가 온전치 못하거나(심신박약), 낭비벽이 심한 경우는 한정치산자로, 자기 행위에 대한 판단능력이 거의 없는 경우(심신상실)에는 금치산자로 선고하고 이들의 법률행위는 취소할 수 있도록 해 보호해줬다.
그러나 한정치산자, 금치산자 제도는 법원의 판결을 거쳐야 하고 호적부에도 표시가 되기 때문에 이에 대한 거부감으로 거의 활용되지 못했다. 이런 사정 때문에 보호가 필요한 사람들이 보호의 사각지대에 방치돼온 셈이다.
개정 민법은 실효성이 없던 금치산·한정치산 제도를 없애고 대신 성년후견제도를 도입했다. 성년후견 제도는 피후견인의 의사와 사무처리 능력의 수준을 보다 구체적으로 반영할 수 있도록 세부화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고령화 사회로 이전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성년후견제는 3가지의 후견 유형으로 나뉜다. 사무처리 능력이 지속적으로 결여되어 대부분 법률행위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성년후견, 일부분의 법률행위에 대해서만 도움을 받는 한정후견, 일시적 또는 특정사무에 대한 후원만을 받는 특정후견이 그 유형이다.
성년후견은 질병, 장애, 노령, 그 밖의 사유로 인한 정신적 제약으로 사무를 처리할 능력이 지속적으로 결여된 사람에게 적용된다. 법원은 성년후견 개시 결정을 할 수 있다. 성년후견을 받는 사람이 한 법률행위 역시 원칙적으로 취소할 수 있다. 그러나 개정 민법은 가정법원이 취소할 수 없는 법률행위의 범위를 미리 정할 수 있게 했다. 또 법원이 미리 정하지 않았더라도 일용품 구입 등 일상생활에 필요하고 그 대가가 과도하지 아니한 법률행위는 취소할 수 없도록 했다.
한정후견은 성년후견인을 둘 만큼 상태가 심각하지 않은 사람에게 적용된다. 이 역시 미리 동의가 있어야 할 수 있는 법률행위의 범위를 정한 뒤 그 범위에 해당하지 않는 법률행위는 정상적으로 할 수 있게 한다. 피한정후견인은 피성년후견인에 비해 정상적으로 할 수 있는 법률행위의 범위가 넓다.
특정후견은 정신적 제약으로 일시적 후원 또는 특정 사무에 관한 후원이 필요한 사람에게 적용된다. 특정후견인을 선임할 때엔 특정후견의 기간 또는 사무의 범위를 정해야 한다.
일명 ‘최진실법’ 발효
이혼 후 단독으로 친권을 행사하던 아버지 또는 어머니가 사망한 경우 다른 배우자의 친권이 자동으로 부활하는가. 배우 최진실 씨의 자살을 계기로 우리 사회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던 사안이다. 사망한 부모가 자녀들에게 상속재산을 남겨준 경우 다른 배우자의 친권이 자동으로 부활하게 되면 그 배우자가 친권을 남용해 재산을 가로챌 수 있지 않으냐는 우려도 있었다. 비단 재산 문제가 아니더라도 다른 배우자의 친권 부활이 자녀의 복리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지적이 많았다.
개정 민법은 단독 친권자인 부모의 한쪽이 사망한 경우 생존하는 다른 한쪽 부모의 친권이 자동으로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가정법원이 친권자를 지정하도록 했다. 일각에선 개정 민법의 이 조항을 들어 ‘최진실법’이라고도 일컫는다.
가정법원은 생존한 다른 한쪽 부모의 양육의사 및 양육능력, 미성년자의 의사, 미성년자의 복리를 고려해 다른 한쪽 부모를 친권자로 정하지 않는 대신 미성년후견인을 지정할 수도 있다.
이에 따르면 사례 3에서 단독친권자인 친모가 사망했더라도 친부의 친권이 자동으로 부활하는 것이 아니므로 나금수 씨는 자신이 친권자임을 주장할 수 없다. 1남1녀의 외할머니 등 친족은 친부가 이혼 전에 아이들에게 했던 행태를 입증해 친부가 친권자로 지정되는 것을 막고 외할머니를 미성년후견인으로 지정해줄 것을 청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