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호

중국 무협영화의 이데올로기 코드

  • 노광우 │영화 칼럼니스트 nkw88@hotmail.com

    입력2013-07-19 16: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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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대통령의 방중으로 중국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영화 분야에서도 중국 영화, 특히 중국 무협영화(또는 시대극)는 우리나라 관객에게 친숙한 편이다. 중국 무협영화에는 어떠한 사회적, 이데올로기적 코드가 내재할까.

    최근 국내에 개봉되는 중국 무협영화와 시대극은 크게 두 가지 흐름을 보이고 있다. 첫째는 고대 중국(주로 춘추전국시대부터 진·한 교체기)을 배경으로 실제 사건이나 역사 소설을 각색한 작품들이다. 둘째는 근대 중국을 배경으로 실존한 무술 고수들을 다룬 작품들이다.

    전자를 대표하는 최근 작품들로는 병법가 손빈을 다룬 ‘전국 : 천하영웅의 시대’(금침, 2011)나 유비와 항우의 대전을 다룬 ‘초한지 : 천하대전’(이인항, 2010)이 있다. 후자의 예로는 견자단 주연의 ‘엽문’ 시리즈, 조문탁 주연의 ‘소걸아 : 취권의 창시자’(원화평, 2010)’ ‘타이치 0(풍덕륜, 2012)’가 있다.

    전자의 영화에서는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들이 주로 주연을 맡았다. 후자의 영화에서는 무술 고수들이 주연으로 발탁됐다. 또한 전자의 영화들은 개인주의를, 후자의 영화들은 중화민족주의를 이데올로기적 특성으로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개인주의 혹은 중화민족주의



    중국이 세계 자본주의에 편입되면서 중국인들 사이에선 세속적 욕망의 충족을 중시하는 개인주의가 득세했다. 중국이 G2의 위상에 오르면서부터는 중화민족주의가 강화됐다. 최근의 중국 무협영화는 이러한 중국 사회의 양대 특성을 이야기 구조 속에 반영하고 있다.

    중국의 고대사를 다룬 ‘전국’과 ‘초한지’는 권력투쟁과 권모술수, 남녀 간의 사랑을 이야기의 중심 소재로 삼는다. 이는 우리가 TV 사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형이다. TV 사극은 방영기간이 길기 때문에 다양한 인물과 사건, 반전을 끊임없이 제시할 수 있다. 이에 비해 극장용 영화는 2시간 안팎의 제한된 시간에 이야기를 마무리해야 한다. 이야기와 등장인물의 생략, 요약 및 압축의 묘를 발휘해야 한다.

    그래서 고대사를 다룬 중국 무협영화(시대극)는 중요한 사건이나 한두 건의 전투에 집중하고 나머지 부차적인 사연은 생략해버린다. 이때 관건은 대규모 전투 장면을 얼마나 화려한 스펙터클로 재현하는지다.

    중국 무협영화는 결말에서 ‘통일’이나 ‘대업’같은 대의를 좇는 이들의 비극적 최후를 보여준다. 이어 이들이 지닌 가치관의 허망함을 강조한다. 이는 실패한 로맨스 또는 비극적 사랑 이야기와 결합한다. 중국 무협영화는 외적으로는 남성성이 두드러져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로맨스를 부각해야 하므로 여성의 비중이 높은 편이다.

    고대사를 다룬 중국 무협영화는 이렇게 전투 장면과 대의라는 두 축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므로 영화가 주는 시각적 즐거움 역시 ‘대의를 구현하기 위한 거대한 전투 장면’에 집중된다. 중국 사극의 이러한 재현 방식은 장이머우가 연출한 ‘영웅’(2004)에서 본격화했다.

    영화 ‘전국’은 귀곡자의 제자인 방연(우진위)과 손빈(쑨훙레이)의 경쟁 관계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원래 역사책에선 방연과 손빈이 병법의 전수, 정치적 이해관계의 대립으로 갈등을 빚는 것으로 서술했다. 그런데 ‘전국’은 여기에 멜로드라마의 갈등요소를 추가한다. 영화에서 방연과 손빈은 전석(징톈)이라는 여성을 사이에 두고 연적 관계를 형성한다. ‘전국’은 위나라에 끌려간 손빈을 돕는 인물로 위나라 왕의 애첩 완(김희선)을 배치한다. 방연, 손빈, 전석, 완, 위나라 왕, 제나라 왕 등 여섯 인물 간 암투가 영화의 주된 흐름이다.

    글로벌 자본주의 편입 이후엔?

    위나라와 제나라 간 계릉 전투와 마릉 전투는 축약돼 계릉 전투는 아예 생략되고 마릉 전투는 원래 역사와 다르게 변형된다. 방연과 손빈의 갈등이 연적 관계로 설정됨으로써 고사에서는 기회주의자이자 악당으로 묘사된 방연이 영화에선 악당의 성격이 약화된다. 영화에서 손빈은 세상 물정을 모르는 순진하고 자폐적인 천재로, 방연은 이상을 구현하려다 점점 권력에 눈이 어두워져 타락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대신 전면에 부각되는 것은 전석과 완의 활약이다. 두 여성은 기지를 발휘하고 강인한 의지를 보여준다. 이들이 손빈, 방연과 맺는 관계는 단순한 남녀 간 로맨스라기보다는 로맨스를 매개로 한 사적 욕망의 분출에 가깝다.

    홍콩 반환 이전의 중국 영화들은 개인의 욕망을 표현하는 것을 금기시했다. 개인주의를 다루는 작품도 거의 없었다. 개인을 다루는 것은 국가 건설 과정과 관련된 개인의 이야기(‘붉은 수수밭’), 역사의 흐름에 휘말린 개인의 이야기(‘패왕별희’) 정도였다.

    중국 무협영화의 이데올로기 코드

    영화 ‘전국 : 천하영웅의 시대’ 포스터.

    그러나 홍콩 반환 이후, 그리고 중국이 세계 자본주의 권역으로 편입된 이후 중국 영화들은 개인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담아내기 시작했다. 가장 두드러진 텍스트가 로맨틱 코미디 ‘소피의 연애 매뉴얼’(에바 진, 2009)이다. 이 영화는 한국 영화 ‘엽기적인 그녀’(2001)와 미국 TV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20대 후반 직장인 여성의 사적인 고민들을 소재로 한다.

    고대 중국 역사를 배경으로 한 최근의 중국 무협영화(시대극) 역시 주인공은 황제, 황후, 장군, 협객 등 봉건적 인물이지만 스토리를 관통하는 중심 사상은 사적 욕망의 발현과 좌절 등 개인주의인 경우가 많다.

    반면 ‘엽문’ 시리즈, ‘소걸아’‘타이치 0’ 등 근대 중국을 배경으로 한 중국 무협영화는 주로 청조 말기, 중일전쟁기와 같이 외세의 침략으로 중화민족의 존속이 위태로운 시대적 상황을 앞세운다. 이어 이러한 민족 공동체의 위기 상황에서 무술인들이 외세에 의롭게 맞서는 모습을 부각한다.

    중국 사회 내면의 혼돈 반영

    장르의 측면에서 이들 무술인 영화는 개인의 일대기를 다루므로 전기물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들 영화는 주인공인 무술인이 무술을 연마하게 된 계기, 수련 과정을 보여준 뒤 무술을 사용해 악한을 무찌르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이때 악한은 서구 열강, 일본 그리고 중국 내 외세 추종 세력이다.

    중국 무술인이 외국인을 무찌르는 영화의 기원은 1970년대 초 이소룡의 쿵푸 액션 영화들이라고 할 수 있다. ‘정무문’이나 ‘맹룡과강’과 같은 영화에서 이소룡은 중일전쟁 당시 상하이를 점령한 일본인들을 무찌르거나 로마의 콜로세움에서 백인 무술인과 결투를 벌인다. 그럼으로써 중국인에게 일종의 대리만족감을 제공했다.

    이러한 ‘중화민족주의 무술인’ 인물형은 1990년대 이연걸과 조문탁이 주연을 맡은 ‘황비홍’ 시리즈로 계승된다. 이소룡이 맡은 주인공은 억압과 부당함에 맞서는 분노하는 중국인의 모습을 담아내는 데 비해 이연걸과 조문탁이 분한 황비홍은 관대함과 여유로움을 겸비한 유교적 덕목을 지닌 중국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견자단이 주연을 맡은 ‘엽문’ 시리즈의 주인공인 엽문은 중일전쟁 때 일본 무술인을 무찌르고 나중에 이소룡에게 영춘권을 가르쳐준 스승으로 그려진다.

    올해 개봉된 ‘타이치 0’는 태극권의 창시자로 알려진 양로선의 일대기를 보여주는 신세대 무협영화다. 무성영화 양식과 ‘스트리트 파이터’류의 전자게임 양식을 결합했다. 영화에서 ‘삼화취정’이라는 특이한 신체적 능력을 지닌 양로선(위안샤오차오)은 청조 말엽 천리교에 가담해 무술을 연마하지만 기력을 너무 많이 써 죽게 될 처지가 된다. 이에 양로선은 목숨을 구하기 위해 진씨 집성촌인 진가구에 들어가 진가권을 배운다.

    양로선이 배우는 진가권은 대대로 내려온 중국의 전통문화를 상징한다. 영화는 철도 등 서구 기계문명에 대한 반감을 고취하면서 대신 진가권으로 상징되는 중국식 대응방식을 찬미한다. 영화 ‘황비홍’에서 서구 문명의 부산물인 사진, 영화, 의학에 대해 황비홍과 그 주변 인물들이 보여준 반감과 유사한 것이다. G2 위상에 오른 중국은 무협영화를 통해서도 ‘만물을 서구의 세계관으로만 보아선 안 되며 그에 대척하는 중국의 세계관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중국 무협영화의 이데올로기 코드
    노광우

    1969년 서울 출생

    미국 서던일리노이대 박사(영화학)

    고려대 정보문화연구소 연구원

    논문 : ‘Dark side of modernization’ 외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외세 배격 무용담이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글로벌 체제 편입 이후 중국이 갖는 심리적 두려움을 반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중국 무협영화는 민족 차원을 초월한 인류 차원의 보편적 가치를 표현하는 데에는 아직 미숙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이렇게 최근 중국 무협영화에서 개인주의와 중화민족주의가 뒤섞여 나타나는 것은 현재의 중국 사회가 겪는 내면의 혼돈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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