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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록, 그 진실과 왜곡 사이

무적함대가 졌다 스페인은 건재했다

인과(因果)의 오류

  • 오항녕 │전주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hallimoh@hanmail.net

무적함대가 졌다 스페인은 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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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월호에서 역사적 사건은 세 방향에서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바꿀 수 없거나 상황을 제한하는 객관적 조건, 그럼에도 발휘되는 창조력이나 가치 같은 자유의지, 마지막으로 서로 다른 원인들의 충돌이 빚어내는 우연.
  • 이 셋의 변주가 역사를, 인간 세상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준다. 그래도 우리의 궁금증은 멈추지 않는다.
  • 그 일이 왜 일어났지?
무적함대가 졌다 스페인은 건재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못 믿겠다’는 속담은 상반된 상황에서 쓰지만, 원인과 결과가 상응한다는 상식적 판단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선 같다. 그런데 역사에선 이렇게 간단하지 않아 오류가 자주 발생한다.

이렇게 우리는 역사를 공부할 때 ‘그 일이 왜 일어났을까?’ 하는 궁금증을 갖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왜’는 원인(原因·cause)에 대한 탐구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원인을 ‘어떤 사물이나 상태를 변화시키거나 일으키게 하는 근본이 된 일이나 사건’이라고 정의했다. 다음(DAUM) 영영사전에는 ‘어떤 일이 시작되는 동력을 제공하는 사건(events that provide the generative force that is the origin of something)’이라고 정의했다.

‘왜?’에 대한 반발

그런데 의외로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왜’에 대해 부정적인 학자가 많다. 카프카, 사르트르, 러셀 같은 학자들도 인과론(causality)에 회의적이었다. 역사학자 중에서도 그런 경우가 많지만, 미국사의 고전인 ‘미국민중사’(유강은 옮김, 이후)의 저자 하워드 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원인과 옥신각신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원인이란 것이 문제의 핵심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면 우리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할 뿐만 아니라, 나쁜 경우에는 심지어 꼼짝 못하게 만드는 뭔가를 만들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인과관계란 단지 복잡한 것만이 아니다. 철학자들에 따르면 그것은 해결이 불가능한 문제다. 아마 그것은 우리 자신과 현실 사이에 언어의 장애물을 설치하려는 성향이 만들어낸 형이상학적 수수께끼의 하나인지도 모른다.

-The Southern Mystique, 1964



이렇게 원인이란 말을 덜어내면서 역사학자들은 대신 ‘영향(influences)’ ‘원동력(impulses)’ ‘요소(elements)’ ‘뿌리(roots)’ ‘기초(bases)’ ‘토대(foundation)’와 같은 표현을 썼다. 이밖에도 비슷한 말은 역사학자들이 다 가져다 썼을 것이다. 그렇다고 원인에 대한 향수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그것이 모호하건 불만이건 역사는 태생적으로 원인에 대한 탐구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 글은 할리카르낫소스 출신 헤로도투스가 제출하는 탐사 보고서다. 그 목적은 인간들의 행정이 시간이 지나면서 망각되고, 헬라스인들과 비(非)헬라스인들의 위대하고도 놀라운 업적들이 사라지는 것을 막고, 무엇보다도 헬라스인들과 비헬라스인들이 서로 전쟁을 하게 된 원인을 밝히는 데 있다.

- ‘역사’, 헤로도투스, 천병희 역, ‘ 도서출판 숲

헬라스인과 비헬라스인의 전쟁이란 페르시아 전쟁을 말한다. 무지막지한 왜곡을 수반한 영화 ‘300’의 모티프도 헤로도투스의 이 역사책에서 나왔다. 인류의 가장 오랜 역사서 중 하나인 ‘역사’의 출발이 바로 ①업적에 대한 기억과 ②전쟁의 원인 탐구였다는 점에서 이미 ‘원인’에 대한 오랜 유전자를 감지할 수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역사가 사마천은 달랐다.

다시 사마천과 헤로도투스

“한나라가 흥기하여 천하가 하나로 통일되고, 현명한 군주와 어진 임금과 충성스러운 신하와 정의를 보고 죽는 인물이 나왔다. 그러나 내가 태사(太史)가 되고도 이들을 논하고 기록하지 못해 천하의 역사 문헌을 폐기하였구나. 나는 이것이 매우 두렵다. 너는 이 점을 염두에 두어라.”

사마천은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소자가 영민하지 못하나 아버님께서 순서대로 정리해두신 옛 문헌을 빠짐없이 모두 논술하겠습니다.”

-‘사기’의 ‘태사공자서’, 사마천, 김원중 옮김, 민음사

사마천의 방점은 헤로도투스가 역사를 남긴 첫 번째 이유에 찍혀 있다. 이는 사마천이 ‘춘추(春秋)’의 전통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인데, 공자가 편찬했다고 전해지는 역사서 ‘춘추’에 대해 맹자는 “공자가 ‘춘추’를 완성하자 세상을 어지럽히는 자들과 어버이를 죽이는 자식들이 두려워하였다”고 말했다. 기록되는 것으로 심판받는 것, 이것이 통상 생각하는 동아시아 역사의 기능이기도 했다. 거기에 더해 사마천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백이와 숙제는 비록 어진 사람이기는 하지만 공자의 칭찬이 있고나서부터 그 명성이 더욱더 드러나게 되었다. 안연은 학문을 매우 좋아하기는 하였지만 공자라는 천리마의 꼬리에 붙어 행동이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 바위나 동굴 속에 숨어 사는 선비들은 일정한 때를 보아 나아가고 물러난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의 명성이 묻혀 세상에 일컬어지지 않는 것은 슬픈 일이다. 시골에 묻혀 사는 사람이 덕행을 닦아 명성을 세우고자 하더라도 덕행과 지위가 높은 선비에 기대지 못한다면 어떻게 후세에 이름을 남길 수 있겠는가?

-앞과 같은 책, ‘백이숙제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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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항녕 │전주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hallimo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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