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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록, 그 진실과 왜곡 사이

무적함대가 졌다 스페인은 건재했다

인과(因果)의 오류

  • 오항녕 │전주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hallimoh@hanmail.net

무적함대가 졌다 스페인은 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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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에 이름을 남긴다는 사마천의 표현을 지나친 공명심으로 해석할 일은 아니다. 이름을 남긴다는 말은 흔적을 남긴다는 말이다. 삶의 흔적을 사마천 자신이 기록해주겠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마천은 열전에 참으로 많은 인간의 모습을 담으려애썼다. 백이, 숙제부터 형가(荊軻) 같은 협객은 물론 재화에 도가 텄던 경제통들의 열전인 화식(貨殖)에 이르기까지.

요즘도 스페인 축구팀을 ‘무적함대(Armada)’라고 부른다. 거기엔 이유가 있다. 1588년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영국을 침공하려고 플랑드르에서 출동시킨 함대의 명칭이 무적함대였기 때문에 지금까지 스페인 축구팀의 애칭으로 불리는 것이다.

무적함대의 패배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이 지휘한 스페인 함대는 130척의 선박에 약 8000명의 선원, 1만9000명의 병사로 이뤄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 가운데 약 40척은 전함이며 나머지는 대개 수송선과 소형 선박이었다. 스페인 측은 자신들의 선박 가운데 최상의 것조차 영국 선박보다 느리며 중평사포의 성능도 뒤떨어진다는 점을 알았으나 영국군과 싸울 경우 상대편 전함에 올라타 상대를 무찌를 수 있는 역량을 믿고 있었으며, 그 후 영국군보다 우세한 스페인 보병이 결정적인 역할을 해줄 것으로 생각했다(‘브리태니커’).

그러나 마치 적벽대전에서 제갈공명이 조조의 군대를 혼란에 몰아넣었던 화공선(火攻船) 전략과 유사한 전법으로 영국군은 스페인군을 와해시켰고, 스페인군은 60척만이 귀환할 수 있었다. 전사한 병사만 1만5000명이었다.



어떤 역사학자들은 무적함대의 패전으로 스페인이 몰락하고 영국이 떠올랐다고 말한다. 아르마다의 패배 탓에 아메리카와의 유통망이 붕괴됐고 스페인 경제가 삐걱거리게 됐다는 관찰이다. 그러나 무적함대가 패배했던 1588년 이후, 1603년까지 스페인은 영국에서 제해권을 빼앗기지 않았다는 설이 유력하다. 개릿 매팅리는 “다른 시기 어떤 15년보다도 1588년부터 1603년까지 스페인에 도착한 아메리카 보물이 훨씬 많았다”고 논증했다(The Armada, 1959).

그런데 어떤 학자들은 아르마다 해전 이후 엘리자베스 1세 마지막 15년 동안 문학적 재능을 가진 천재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고 말한다. 매팅리는 “아르마다 패전과 엘리자베스 시대 드라마의 만개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는 주장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과연 ‘그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를 증명하는 것은 더 어렵다”고 말한다.

‘그 이후에’의 오류

신교(영국)와 구교(스페인)의 대립이 여기에 내재하기도 했고, 영국 민족주의의 성장이라는 배경도 한몫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것은, 무적함대의 패배가 무척 강력한 역사적 사건이긴 하지만 그 결과는 별것 아닐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무적함대의 패배는 싸우라고 보낸 전략의 실패를 제외하곤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이러한 사실은 영국인이 그 해전을 통해 축적한 애국주의 본능에 반하는 것일 수도 있고, 큰 사건으로부터 강한 감동을 느끼고 싶어 하는 우리의 미적 감수성에 어긋난 것일 수도 있다. 우리가 큰 사건은 반드시 심각한 결과를 가져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무적함대의 패배와 결과를 둘러싼 인과에 대한 견해, 거기서 우리는 ‘그 이후에’의 오류(the fallacy of post hoc, propter hoc)’를 발견한다.

참고로, ‘그 이후에’의 오류가 있는 한편, ‘그 이전에’의 오류(the fallacy of pro hoc, propter hoc)도 있다. 이 오류는 단순하고 자명한 인과 법칙을 위반할 때 나타나는 잘못이다. A사건이 C사건 전에 일어났다면, C사건 때문에 A사건이 일어날 수는 없다. 당연한 말이지만 역사에는 ‘앞선’ 결과나 ‘같이 발생하는’ 원인은 없다.

큰 사건은 반드시 심각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생각에서 ‘동일시의 오류(the fallacy of identity)’라고 할 만한 오류가 생긴다. 이 오류는 원인은 그 결과와 비슷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이는 명백히 ‘치료 효과를 지닌 모든 자연물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외적 특성을 통해 그것이 고칠 수 있는 질병을 암시한다’는 민간요법의 생각을 깔고 있다. 울금(turmeric)은 황달(jaundice)에 좋다거나, 혈석(bloodstone)은 피가 날 때 효과가 있다거나 하는 따위다. 인삼이 사람 몸에 좋은 것은 인삼 형태가 사람을 닮았기 때문이라고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정작 인삼이 의학적으로 몸에 맞지 않는 필자 같은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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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항녕 │전주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hallimo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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