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호

“美 국무부, 윤창중 사건 때 ‘피해자에 압력 넣지 말라’ 요구”

‘尹 스캔들’로 곤욕 치른 최영진 전 주미대사

  • 구자홍 기자 │jhkoo@donga.com

    입력2013-07-22 1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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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해자 귀국, 피해자 접촉 못해 尹 스캔들 오리무중
    • 주미 한국문화원 여직원, “근무 못하겠다” 자진 사직
    • “박 대통령 미 의회 연설, 내용과 전달력에서 탁월”
    • 무역으로 국제관계 패러다임 변해…‘가치외교’ 절실
    • “국익 앞에서 국민정서 때문에 잘못된 결정 많았다”
    “美 국무부, 윤창중 사건 때 ‘피해자에 압력 넣지 말라’ 요구”
    박근혜 대통령 취임 이후 첫 해외순방인 5월 미국 방문은 국제적 망신거리가 된 ‘윤창중 스캔들’로 얼룩졌다. 박 대통령의 미국 방문 성과가 ‘윤창중 스캔들’에 묻히는 것을 누구보다 안타깝게 지켜봐야 했던 이가 박 대통령 방미 실무를 총괄한 최영진(65) 전 주미대사다. 공교롭게도 박 대통령의 미국 방문은 최 전 대사의 41년 외교관 생활을 마감하는 마지막 소임이었다. ‘중국 당나라 측천무후 이후 유교문화권에서 배출된 첫 여성지도자’라는 논리까지 동원하며 박 대통령의 미 의회 상하원 합동연설을 성사시킨 그의 노력은 윤창중 스캔들로 빛이 바랬다. 7월 3일 서울 강남의 한 호텔 커피숍에서 최 전 대사를 만나 만감이 교차했을 한미 정상회담 뒷이야기와 41년의 외교관 생활을 마친 소회를 들었다.

    “너희 나라 통일에 기여하라”

    ▼ 외교관 생활을 마감한 소감이 남다를 것 같다.

    “외교 분야에서 40년 넘게 일하는 동안 10년 단위로 현격하게 달라진 대한민국의 위상을 실감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는 불과 한두 세대 만에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모두 이뤄내 후진국에서 선진국 대열로 진입한 드문 경우다. 원조를 받던 나라가 원조를 하게 됐고, 선진국의 충고를 들어야 했던 나라에서 다른 나라가 우리 얘기를 경청하는 나라가 됐다.”

    ▼ 외교관의 길로 들어선 계기는.



    “내가 대학에 다니던 1960년대 후반에는 물품도 그렇고 문학작품, 영화 등 모든 게 외국에서 들어온 것 일색이었다. 젊은 혈기에 ‘외국은 어떻게 해서 저렇게 발전했나’ 하는 답답함이 컸다. 처음엔 의과대학(연세대)에 다녔는데 외국 문물을 체득하고 본질을 파악해야 인생의 좌표를 세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의대 4년을 마치고 (정치외교학과로) 학사편입을 했다. 그때는 외국에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외교관이 되는 것 말고는 거의 없었다.”

    ▼ 뜻대로 외교관이 됐으니 외국 생활을 원없이 했겠다.

    “외교관으로 41년 근무하면서 해외에서 보낸 기간이 25년 정도 된다. 그 가운데 9년은 일반 외교관과는 조금 다른 업무를 담당했다.”

    최 전 대사는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초대 사무차장, 유엔평화유지군 평화담당보, 코트디부아르 담당 유엔 사무총장 특별대표 등을 지냈다. 유엔 사무총장 특별대표로 부임했을 때 코트디부아르는 우리처럼 남북분단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에게 부여된 임무는 분단된 코트디부아르에서 대통령선거를 실시해 통일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

    각고의 노력 끝에 3년 반 만에 양측으로부터 대선을 실시하고 대선에서 선출된 대통령이 통일 대통령직을 수행한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막상 실시한 대선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현직 대통령은 승리할 것을 예상하고 유엔이 제시한 조건을 받아들였는데 막상 대선에서 패하고 말았다. 낙선한 대통령은 선거 결과를 부정하고 군대를 동원해 선거 결과를 무효화하려 했다.

    “코트디부아르에서 마지막 넉 달 동안은 사무실에 포위당한 채 지냈다. 낙선한 대통령은 우리더러 ‘유엔 나가라’고 했고, 우리는 ‘낙선한 당신이 물러나라’고 대치했다. 위험하고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우리가 버티며 지속적으로 진실을 전하고, 실각한 대통령이 실수를 하기 시작하니까 결국 민심이 민주화로 돌아서더라. 덕분에 우리의 미션을 완수할 수 있었다.”

    코트디부아르의 대선 실시와 통일이라는 임무를 완수한 최 전 대사는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실각한 대통령의 친구였으니까 우리와는 정반대편에 있던 사람인데, 내게 ‘우리나라는 이제 통일이 됐으니 이젠 네 나라에 돌아가 너희 나라 통일에 기여하라’는 편지를 보내왔다. 어려움도 많았지만 그만큼 보람도 컸다.”

    ▼ KEDO 사무차장 때 직접 경험한 북한은 어땠나.

    “KEDO는 당시 경색된 남북관계를 푸는 첫 단추와도 같았다. 사무차장 자격으로 북한에 6번 다녀왔다. 3년 동안 북한을 상대했는데 지금의 개성공단 가동 중단 사태를 보며 당시와 똑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개성공단 사태는 KEDO 복사판

    ▼ 어떤 점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나.

    “경수로 사업은 당초 3년 내에 사업을 마무리 짓도록 돼 있었다. 그런데 북한이 통제하고 통솔하면서 기한이 계속 연장돼 3년 동안 3분의 1도 진행되지 못했다. 내가 떠난 직후 북한이 노동력을 모두 철수시킨 일이 있다. 내 기억으로는 ‘월급을 3배로 올려달라’고 했던 것 같다. 용인할 수 없는 수준의 요구였다. 결국 부족한 노동력을 메우려 우즈베키스탄에서 근로자를 실어 날랐다. 그런데 나중에 북측에서 ‘너희가 그렇게 할 줄 몰랐다. 원위치시키자’고 하더라. 수백 명을 이미 데려왔는데…. 북한이 통제를 계속하는 한 국제적인 사업은 지속하기 힘들다. 개성공단도 마찬가지 아닌가.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노동력을 다 빼지 않았나. 북한이 민생보다 정권의 생존을 위해 무기 개발과 군비 확충에 모든 걸 투자하는 옛 소련식으로 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 북한에 대한 미국의 태도가 과거와 많이 달라진 것 같다.

    “확실히 달라졌다. 과거 미국은 협상으로 북핵 문제를 풀 수 있을 것으로 봤다. 그런데 제네바합의(1994년)와 6자회담에 이르는 9월 합의(2005년), 그리고 지난해 2월 19일 협상까지 세 번의 협상을 거치면서 미국은 ‘북한이 핵무기를 협상용으로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체제 생존용으로 개발한다’는 확신에 거의 다다른 것 같다. 미국은 북한이 핵 문제를 협상하자면서 일부 동결하고 원조 받고, 또 협상 깨고 핵무기 발전시켜 가는 것을 세 번 당했으면 됐지, 더 이상은 안 된다는 입장이다. 북한의 전략은 더 미국에 통하지 않을 것이다.

    고민스러운 것은 북한이 우리와 대화를 하면 좋은데, 이렇다 할 변화가 없는 한 우리와 안보 문제를 논의하려 하진 않으리라는 점이다. 우리와 대화하면 자신들의 약점이 다 드러난다고 생각하니까. 그래서 우리와 미국이 중국에 계속 얘기하고 있다. ‘너희(중국)는 우리와 함께 미래를 도모할 수밖에 없으니 너희가 좀 더 책임지고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하라’고.”

    ▼ 중국이 우리와 함께 미래를 도모한다는 얘기는….

    “미국과 중국, 우리나라와 중국은 따로 떼어 존재할 수 없을 만큼 완전히 얽혀 있다. 한중 수교 당시 한 편도 없던 비행기 직항편이 이제는 일주일에 810편이나 뜬다. 한중 무역액도 지난해 2300억 달러에 달하고, 중국은 미국과 5000억 달러 무역고를 기록하고 있다. 또한 중국은 미화 2조 달러를 보유한 최대 외환보유국이다. 시장경제를 도입한 중국이 미래를 도모하려면 한국, 미국과 함께 해야지, 뒤떨어진 북한과 함께할 수는 없다는 얘기다. 냉전 시대에는 북한이 중국에 ‘자산’이었는지 몰라도 지금은 시대에 적응하지 못해 부담스러운 존재다. 탈북자가 자꾸 넘어오는 것도 중국에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다. 결국 중국이 우리와 힘을 합쳐 북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가야 하고, 그렇게 될 것으로 본다.”

    한국 외교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최영진 전 대사의 ‘가치외교’ 소신은 뚜렷했다. ‘가치외교’란 국제관계의 패러다임이 전쟁에서 무역으로 바뀐 기회를 십분 활용해 한미동맹과 한중협력을 강화함으로써 북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화제는 지난 5월 박근혜 대통령의 미국 방문 얘기로 흘렀다.

    ▼ 박근혜 대통령의 미국 상하원 합동연설이 이례적인 일이었다고 하던데.

    “외국 국가원수가 미 상하원 합동연설 기회를 갖는 일은 드물다. 일본 총리는 상하원 합동연설에 한 번도 초청받지 못했다. 원칙적으로 합동연설 기회를 잘 주지 않고, 하원의장이 연설을 들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해야 초청한다.”

    “윤창중 귀국, 說 많았다”

    ▼ 박 대통령의 연설도 어려운 과정을 거쳐 성사됐다고 들었다.

    “박 대통령 직전에 합동연설을 한 외국 국가원수가 이명박 대통령이었다. 미 의회에 박 대통령의 합동연설을 요청했더니 ‘1년 반 전에 너희 나라 대통령이 연설했는데, 어떻게 연이어 같은 나라 국가원수를 초청할 수 있겠나’ 하는 반응을 보였다.”

    ▼ 어떻게 설득했나.

    “가장 중요한 설득 논리는 ‘여성 대통령’이었다. 박 대통령이 유교문화권에서 800년대 중국의 측천무후 이후 자력으로 지도자에 오른 첫 여성 대통령이란 점을 강조했다.”

    ▼ 측천무후 얘기까지 한 걸 보니 어지간히 다급했던 모양이다.

    “우리로서는 급했다. 어려운 여건에서 다행히 연설이 성사됐다. 더 중요한 것은 딜리버리(delivery·전달)가 아주 좋았다는 점이다. 박 대통령의 연설에 감동받았다는 미국 지도자가 많았다. 과거에도 우리 대통령들이 미국에서 연설을 여러 번 했지만, 내용과 전달력 면에서 가장 뛰어난 연설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 성과도 컸지만 ‘윤창중 사건’도 빼놓을 수 없다.

    “대통령의 방미 성과 전체를 가리는 안타까운 사건이었다.”

    ▼ 사건을 언제 처음 알게 됐나.

    “(박 대통령이 워싱턴 방문을 마치고) LA로 떠나는 비행기 트랩에 올라서면서 연락을 받았다.”

    ▼ 합동연설 전날과 당일 아침에 벌어진 일인데 그때까지 모르고 있었나.

    “대통령의 일정이 좀 많았나. 대통령 곁에서 수행하고 행사 점검에 몰두하느라 다른 한쪽에서 벌어진 일은 알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 합동연설회장에서도 몰랐나.

    “대통령을 모시고 의사당 리셉션에 참가한 뒤 하원의장과 따로 만났고, 연설이 끝나고 오찬한 뒤 간담회를 가졌다. 그리고 곧바로 공항에 갔다. 대통령을 계속 수행했기 때문에 전화도 못 받을 상황이었다.”

    ▼ 국무부에서는 어떤 내용을 통보해줬나.

    “워싱턴 경찰에서 한국인 수행원이 연루된 사건을 조사 중이라고 한다, 미국 시민인 피해 여성을 접촉하거나 압력을 넣지 말았으면 좋겠다…그 정도였다.”

    ▼ 국무부에서 연락을 받았으면 가장 먼저 대통령께 보고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LA로 가는 비행기에 동승했을 텐데.

    “비행기에 탑승해서 외교부 장관과 청와대 홍보수석에게 ‘국무부로부터 이러저러한 연락을 받았다’고 얘기했다. 그런데 우리 측에서 아는 게 없더라. 진상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 윤창중 전 대변인 귀국 지시는 누가 했나.

    “누가 결정하고 지시했는지 모른다. 홍보수석이 직속 라인이니 진상을 좀 더 파악해 (대통령께) 보고드리는 것이 좋겠다는 정도만 얘기가 됐다. 그리고 LA에 도착한 다음 날 새벽, 국무부의 연락도 있고 해서 나는 워싱턴으로 바로 귀임했다.”

    “알려고 하지 마라”

    ▼ 대통령에게 보고한 것은 그 이후인가.

    “내가 워싱턴으로 귀임한 이후에 보고받으신 것으로 안다.”

    ▼ 워싱턴으로 돌아와서 국무부에 다시 확인해봤나.

    “국무부에 연락했더니 ‘워싱턴 경찰 소관이라 우리도 자세한 내용은 모른다’며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았다.”

    ▼ 누가 윤 전 대변인을 귀국시켰는지는 아직도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당시 여러 설이 있었다. 민정수석실에서 조사를 진행하던 상황이라 혼선을 줄 수 있으니 (대사관 직원은) 토를 달거나 알려고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가해자는 이미 귀국했고, 피해자에 대해서는 압력을 넣거나 교섭하지 말아달라는 국무부 요청이 있었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접촉할 수 없는 상황에서 조사 주체도 아닌 대사관이 진상을 파악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 피해자와 함께 방을 쓴 주미 한국문화원 직원은 진상을 알고 있지 않았을까.

    “국내에서 워낙 크게 문제가 돼 있던 상황이라 말 한 마디만 잘못해도 커다란 혼선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그러니 대사관으로서는 극도로 조심하는 수밖에 없었다. 대사관 직원들에게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 문화원 직원은 왜 사직했나.

    “피해 여성이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미국 경찰에 연락하는 결정을 함께 했다고 한다. 그런 결정을 하고서 계속 (대사관에) 근무할 수 없겠다고 판단한 것 같다.”

    ▼ 계속 근무하기 어렵겠다고 스스로 판단했다?

    “그런 것 같다.”

    “美 국무부, 윤창중 사건 때 ‘피해자에 압력 넣지 말라’ 요구”

    박근혜 대통령이 5월 8일 오전(현지시간) 미 의회에서 열린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연설하고 있다.

    7월 3일 인터뷰에 이어 12일 오후 최 전 대사에게 전화를 걸어 윤창중 사건과 관련한 여러 질문을 던졌지만 최 전 대사는 “아는 게 없어 말씀드릴 내용이 없다”는 일관된 태도를 유지했다.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행 의혹은 사건 발생 두 달여 만에 수사 결과 발표를 앞두고 있다. 미 워싱턴DC 메트로폴리탄 경찰은 공식 발표 이전 주미 한국대사관에 수사 결과를 알려주겠다고 최근 통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 경찰은 피해자인 여성 인턴에 대한 추가 조사와 워싱턴DC 시내 소재 W호텔 지하 바, 윤 전 대변인이 투숙했던 페어팩스 호텔 등에 대한 수사를 마무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외에 큰 파장을 몰고온 전대미문의 스캔들이 미 경찰 수사 결과 발표를 계기로 일단락될 지, 아니면 더 큰 이슈로 재점화할 지 주목된다.

    ‘대화록’에서 눈에 띈 대목

    ▼ 미국이 자국 내 외국 대사관들을 감청한 사실이 밝혀져 논란이 되고 있다. 한국대사관도 감청 대상에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모르는 얘기다.”

    ▼ 몰래 감청을 해서 그런 것 아닌가.

    “그렇다고 추정은 되는데….”

    ▼ 감청 문제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내용을 파악해야 하니 현직(대사)에게 물어보는 게….”

    ▼ 외국 대사관을 감청해서 정보를 빼내는 것은 국제법에 위배되는 것 아닌가.

    “외교 무대에서 일을 해보면 직접 만나 협상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다. 비공식적으로 취득한 정보는 보조 수단일 뿐이다. 내가 대사로 일할 때는 정기적으로 만찬 협상을 가졌다.”

    최 전 대사는 미 국무부 주요 인사들과 한 달에 한두 번꼴로 만찬을 함께하고, 미 의회 인사들과는 의원 지역구에 함께 내려가 스킨십을 강화했다고 한다. 평소 돈독히 쌓아놓은 인맥은 박 대통령의 합동연설회를 성사시키는 든든한 배경이 됐다는 후문이다.

    ▼ 외교에서도 결국 스킨십이 가장 중요한 모양이다.

    “그렇다. 그래서 정상회담이 중요하다. 태평양 시대를 열어갈 오바마▼ 시진핑 두 지도자의 만남을 세기의 정상회담이라고 하지 않나. 두 정상이 넥타이를 풀고 이틀 동안 만나 스킨십을 키운 것이 좋은 예다.”

    ▼ 최근 남북 정상회담 대화록이 공개돼 파문이 일고 있다. 외교전문가로서 정상회담 대화록 공개를 어떻게 보나.

    “의견이 없다. 전후사정도 모르고….”

    ▼ 정상 간 대화는 가장 중요한 외교활동인데, 대화 내용이 적나라하게 공개되면 이후 협상에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공개에 대한 평가보다…. 나는 (공개된) 내용 가운데 두 가지를 집중해서 봤다. 하나는 개성공단 확대 문제다. 개성공단은 북한이 변화할 단서를 제공하는 중요한 사업인데, 제2 개성공단을 몇 개 더 만들자는 우리 측 제안을 김정일 위원장이 일언지하에 거절한 것으로 돼 있더라. 그게 사실이라면 중요하게 봐야 할 대목이다. 평양 정권이 시장경제에 얼마나 민감해하고 강력하게 통제하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있다. 또 하나는 핵 문제인데, 역시 우리 측 얘기에 전혀 응하지 않았더라. ‘미국과 할 얘기’라면서. 김정일 위원장의 그 같은 대응은 예상되긴 했지만, 앞으로 전개될 방향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 같아 눈길을 끈다.”

    ▼ 북한 정권 문제가 선결돼야 대화가 가능하고 교류협력으로 나갈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한미동맹과 한중협력을 토대로 북한이 시장경제로 가게끔 유도하는 것이 제일 좋은 선택이다. 레짐 체인지(권력교체)는 위험하다. 북한이 반발하면 더 위험해질 수 있다. 레짐 체인지는 시도할 수도, 강제할 수도 없다. 결국 선택은 북한이 할 수밖에 없는데….”

    ▼ 북한을 머리에 이고 있는 우리도 불안한 것 아닌가.

    “이란, 시리아, 북한 문제를 세계 3대 난제라고 하는데, 그 가운데 하나를 우리가 안고 살아가고 있다. 북한은 지금 딜레마에 빠져 있다. 선군(先軍) 정치로 계속 가봐야 앞길이 막혀 있고, 시장경제로 가자니 위험이 크고. 딜레마에 빠져 우왕좌왕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모호성이 가득 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북한에 문제가 생기면 곧 우리의 딜레마가 된다. 북한이 통제력 상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민생과 시장경제) 선택을 주저하는 과정이 위험하기 때문에 한미동맹과 한중협력이란 틀 안에서 잘 관리해나가는 것이 현재로서는 최선이다.”

    실속 없는 피해의식

    한국 외교의 알파와 오메가는 북한 문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국가 안보와 국익이 모두 북한과 연관돼 있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분단이란 특수성이 우리 외교 역량을 키웠다는 얘기도 그래서 나온다.

    ▼ 외교관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함께 일한 동료들 생각이 많이 난다. 같이 보낸 시간도 많고, 인생을 같이 살아온 사람들이다. 믿음직하고 탁월한 동료들과 함께 일할 수 있어 좋았다.”

    ▼ 정부 조직 중 외교부가 유독 별동대 조직 같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일종의 선민의식 같은 것을 갖고 있다는 곱지 않은 시선이 쏠리기도 한다.

    “다른 부처는 국내에 지지해줄 세력과 집단이 있지 않나. 그런데 외교부는 ‘국익’이라는 추상적인 요소밖에 없다. 우리 처지를 이해하고 우리 편을 들어줄 파트너는 모두 외국에 있다. 국내에 클라이언트가 없다보니 어려움이 크다. 강대국이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우리 외교가 세계로 힘을 펼쳐 보였다면 국민의 인식이 달라졌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외교는 늘 다른 나라에서 무언가를 얻어 와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 한미 자유무역협정(FTA)도 큰 논란을 빚었다.

    “이제 어느 정도 해결된 것 같다. 어느 신문에서도 사설에 썼던데, 비준 당시의 우려는 기우로 증명됐다. 한미 FTA는 우리가 탁월한 선택을 한 것이다.”

    ▼ 어떤 점에서 그렇게 확신하나.

    “한미 FTA는 대상품목과 관세율 양허 수준에서 최고 수준이다. 미국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력체제(TPP)를 주도하고 있는데, FTA를 체결한 우리는 상대적으로 들어가기가 쉽다. 또한 미국, 유럽연합(EU)과 함께 FTA를 맺은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일본은 그 점에서 뒤처져 있다. 우리가 갈 길은 경쟁력을 키워 개혁과 개방을 진전시키는 것이다. 우리 외교의 가장 큰 장애물은 피해의식이다.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시대에 당하고 살아와서 개방이라고 하면 피해의식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 누가 피해를 본다고 주장하면 국민에게 ‘어필’이 되니까. 그런데 국제관계 패러다임이 무역으로 바뀌었다. 이제는 피해의식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

    ▼ 어떤 피해의식인가.

    “1994년 외무부 국제경제국장으로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에 참여했다. 그때 쌀시장을 개방하면 모두가 피해를 보게 된다며 삭발을 하고 데모를 하고 야단이 났다. 그런데 결국 전 세계는 우루과이라운드를 넘어 WTO, FTA로 나아가지 않았나. 어떤 면에서는 미국산 수입 쇠고기 파동과 비슷한 면도 있다. 전 국민이 반대할 일이 아니었는데도 모두가 반대하고 나섰다. 피해를 본다고 하면 제대로 따져보지도 않고 ‘피해 보면 큰일난다’는 인식에 압도돼 이성적인 얘기를 하기가 힘들어진다. 우리 외교가 한발 더 나아가려면 이처럼 너무나도 강력한 ‘국민정서’를 극복해야 한다.”

    ▼ 피해의식을 자극하면 국내 정치에 유리한 면이 있어서가 아닐까.

    “결국 손해 보는 것은 국민 아닌가. 내년에 다시 우루과이라운드 쌀시장이 개방되는 것은 모른다.”

    쌀 개방, 관세화로 해결해야

    ▼ 벌써 그렇게 됐나.

    “1994년 쌀시장 개방 때 관세화로 가느냐, 최소시장 접근으로 가느냐를 선택해야 했는데, 우리나라만 최소시장 접근을 택했다. 일본과 대만은 400% 관세화를 택해 그 문제를 영구적으로 해결했다. 최소시장 접근을 택한 우리는 의무수입물량을 1994년 4%, 10년 뒤인 2004년엔 8%로 높였다. 우리나라는 풍년이 나든 흉년이 들든 무조건 국내 쌀소비량의 8%를 수입해야 한다. 10년이 지난 내년에 다시 최소시장 접근을 고수하면 12%까지 올라갈 수 있다. 지금이라도 관세화를 택해 영구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 당시 왜 그런 선택을 했던 건가.

    “관세화로 가면 안 된다는 국민 여론이 비등하니까 ‘대통령직을 걸겠다’고 해서 그렇게 됐다. 결국 손해 본 것은 농민과 국민 아닌가. 농민은 제값을 못 받게 됐고, 국민은 비싼 쌀을 사 먹게 된 것 아닌가. 남아도는 쌀은 또 어떤가. 과거에는 북한에 주기도 했는데, 수입한 쌀을 보관하기 위해 창고 비용도 어마어마하게 든다. 우리 국민 사이에 퍼져 있는 독특한 피해의식 때문에 그 문제를 아직도 진솔하게 토론하지 못한다. 내년에라도 관세화로 가야 해결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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