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택승(74) 씨. 그는 최근 삼청교육대(三淸敎育隊)에 끌려가 저항한 사실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는 판결을 이끌어냈다. 7월 2일 서울행정법원 행정4부(부장판사 최주영)는 ‘삼청피해자동지회’ 대표인 이 씨가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위원장 김성기, 이하 심의위)를 상대로 낸 재심결정 기각처분 취소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고 밝혔다. 선고는 6월 28일 내려졌다.
이 씨는 1980년 8월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뒤 이른바 ‘순화교육’에 여러 번 저항하다 군인(교관)들의 집단구타와 가혹행위로 허리와 왼쪽다리에 장애를 입어 10개월 만에 퇴소했다.
이번 판결은 생존한 삼청교육 피해자가 민주화운동을 인정받은 첫 사례라는 점에 의미가 있다. 또한 지금도 비자금 은닉 의혹으로 논란에 휩싸여 있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원죄’ 중 하나인 삼청교육대 사건이 오래도록 잊혔다 다시 수면으로 떠올랐다는 점에서 많은 이의 눈길을 끌고 있다. 몇몇 언론매체는 ‘민주화운동의 개념을 지나치게 확장한 판결’이라는 비판적 내용의 사설과 칼럼을 내놓기도 했다.
짤막하게만 전해진 이 씨의 승소 소식 이면엔 어떤 복잡한 속사정이 숨어 있을까.
“소송만이 대안”
▼ 심의위를 상대로 소송을 한 경위는.
“2001년 12월 심의위에 1999년 12월 국회에서 제정된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민주화운동보상법)이 정한 민주화운동 관련자에 나도 해당한다’고 주장하며 보상금 지급을 신청했다. 그러나 삼청교육대 입소가 민주화운동으로 인한 게 아니란 이유로 기각당했다. 그때가 2006년 9월이다. 신청 후 무려 4년 9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당시 심의위는 2004년 1월 ‘삼청교육대 피해자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법률’(삼청교육피해자보상법)이 제정되고 그 해 7월에 시행됐으므로 그 법으로 보상받아야 한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하지만 삼청교육피해자보상법의 보상금 지급 신청 기한은 ‘법 시행 이후 1년’이었다. 기한을 넘겨 보상받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2006년 11월 심의위에 재심의를 신청했는데, 5년 3개월 만인 2012년 2월 다시 같은 이유로 기각돼 같은 해 5월에 소송을 낸 것이다. 생각해보라. 소송이 아니면 대체 무슨 방법이 있었겠나.”
▼ 소송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었나.
“나는 법을 잘 모른다. 게다가 변호인을 선임하려니 ‘심의위가 국무총리 직속기관인 데다 승소 가능성이 낮아 자신 없다’며 다들 한사코 고사하더라. 대한법률구조공단을 통해 가까스로 소송대리인을 구했다. 심의위는 기각 결정을 내리기 전 내게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항거성을 입증할 인우보증서 등 추가자료를 요구했다. 삼청교육 당시 피해자들이 죄다 격리 수용돼 있었는데 어떻게 입증자료를 스스로 구할 수 있겠나. 그래서 삼청교육대 출소 이후 삼청피해자동지회 대표로서 삼청교육의 부당성을 알리려고 행한 활동에 관한 자료들을 제출했다.”
삼청교육대에서 나온 뒤 이 씨는 삼청교육 피해자 모임인 삼청피해자동지회를 발족하고 대표를 맡아 1989년 12월 전 전 대통령 등을 직권남용, 불법체포, 감금, 폭행 및 가혹행위, 살인 및 살인교사죄로 서울지방검찰청에 고소했다. 이에 대해 검사가 ‘공소권 없음’ 처분을 내리자 서울고등법원에 재정신청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