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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균 해양경찰청장의 ‘해적 이야기’

유럽 노예시장 주무르다 미 해군 강공(强攻)에 소멸

바르바리 해적

  • 김석균 | 해양경찰청장 sukkyoon2004@hanmail.net

유럽 노예시장 주무르다 미 해군 강공(强攻)에 소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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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노예시장 주무르다 미 해군 강공(强攻)에 소멸

19세기 초 바르바리 해적의 활동영역.

바르바리 해적은 1627년 아이슬란드까지 진출해 수도인 레이캬비크(Reykjavik)를 약탈했다. ‘터키인의 습격’이라고 불리는 약탈에서 해적은 30명 정도를 죽이고 400명을 노예로 잡아갔다. 이 습격은 도시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이 사건 직후 아이슬란드에서는 터키인은 눈에 띄면 무조건 즉시 죽여야 한다는 법이 만들어졌다. 실제로 이런 운명을 맞은 터키인은 한 명도 없었지만 그 법은 이후 350년이 지나서야 폐기됐다.

해적의 노예사냥은 무차별적이었다. 신분의 차이나 사회적 지위는 상관없었다.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잡아갔다. 누구나 쓸모가 있었으므로 모두가 해적의 납치 대상이었다. 지위가 높거나 부유한 사람들은 몸값에 걸맞은 수입을 챙길 수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노예로 내다 팔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예로 잡혀간 자들 중에서 많은 수가 해적선의 노잡이로 팔려나갔다. 일단 노잡이 노예가 되면 사슬에 묶여 죽을 때까지 노를 저어야 하는 운명으로 전락했다. 운이 좋은 경우에는 집안일을 하거나 정원을 관리하는 노예로 팔려가기도 했다. 매력적인 육체를 가진 백인 여자들은 술탄의 궁정 시녀나 귀족의 첩이 돼 일부다처제하의 이슬람 사회에서 부인들이 기거하던 ‘하렘(Harem)’에 평생 갇혀 살아야 했다.

바르바리 해적의 노예사냥 대상이 돼 모로코와 알제리로 끌려간 사람은 150만 명에 달한다. 16세기 지중해에서 납치된 노예와 약탈한 물건이 거래되는 가장 중요한 시장은 알제리의 노예시장이었다. 포로로 잡힌 자들이 처음 끌려가는 곳이 알제의 감옥이었다. 17세기 초 노예시장 판매용으로 2만 명이나 되는 포로를 상시 수용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니 당시 해적이 납치한 노예의 규모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미 해군의 강력 대응



1700년대 후반 신생국 미국은 자국민이 바다에서 해적으로부터 나포돼 노예가 되는 것을 막고 초기 해상무역을 보호하기 위해 수년간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군주들에게 보호료를 바쳤다. 많은 미국인은 이것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아마 미국으로서는 이 부분을 역사에서 감추고 싶었을 것이다. 미국은 자국 선박이 바르바리 해적에게 약탈당하자 원정대를 보내 해적과의 정면대결이나 회유책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건국 초기의 사정상 원정을 할 수 있는 해군력을 갖추지 못한 미국으로서는 후자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1784년 모로코 해적은 독립한 지 1년밖에 안 되는 미국의 선박을 나포했다. 같은 해 두 척이 추가로 알제리 해적에게 약탈당했다. 납치된 선원들은 내륙으로 끌려가 요새를 구축하는 강제노역에 투입됐다. 초기에 미국은 자국 선박이 대서양을 항해할 때 해적에게 피습당하지 않도록 뇌물을 준 다른 나라의 선박에 따라붙어 항해를 하게 하거나 아예 뇌물을 제공하고 안전을 보장받는 소극적인 대응을 했다. 그러나 배는 여전히 해적에게 나포됐고 납치된 선원은 노예로 팔려갔다. 또한 중요한 화물이 강탈당하는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

1793년에는 미국 선박 12척이 다시 나포됐다. 미 의회는 지중해를 비롯한 문제 지역들에 무장한 미군을 주둔시켜 더 강력하고 본격적인 행동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1794년 3월 27일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미국 해군의 창설과 더불어 6척의 호위함을 건조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그전에 미 해군은 1775년 대륙해군으로 출발했으나 영국과의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지 2년 후인 1785년 해군 함정을 전부 팔아버려 사실상 한동안 미 해군은 존재하지 않은 상태였다.

계속되는 해적의 약탈 앞에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1743∼1826) 대통령은 해적에 대한 전쟁을 불사하는 단호한 조치를 취했다. 1801∼1805년 트리폴리 전쟁을 벌인 제퍼슨 대통령은 해적이 요구한 보상금 지불을 거절하면서 지중해에 호위함을 파견했다. 1803년에는 바르바리 해안을 봉쇄하고 폭격한 다음 상륙해 해적이 지배하는 도시들을 공격했다. 미국 호위함이 트리폴리의 항구를 순찰하다 좌초돼 해적에게 나포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4개월 후 특공대를 침투시켜 나포된 배를 불살라버림으로써 해적의 수입원을 원천적으로 끊어버렸다.

해적과의 전쟁을 통해 미 해군은 해전 경험을 풍부하게 쌓을 수 있게 됐다. 이러한 경험은 1812년 영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결정적인 요인이 됐다.

1812년 영국과의 전쟁 때문에 해적과의 싸움이 일시적으로 중단됐다가 1815년 10척으로 구성된 미군 함대가 다시 지중해에 모습을 드러냈다. 제2차 바르바리 해적 소탕작전에서 미국은 짧은 결전으로 해적을 물리쳤고 그 우두머리를 압박해 항복을 받아냈다. 해적 우두머리는 미국 선박의 항해권을 전적으로 인정하고 그 대가로 뇌물을 받지 않겠다는 내용의 조약에 서명했다.

유럽 열강은 신생국 미국이 해적에게 취한 강경한 조치를 보고는 많은 자극을 받았다. 그간 해적에게 막대한 돈을 지불한 것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라고 합리화하긴 했지만 미국의 대응방식을 보고는 자신들의 행동이 합당한 것은 아님을 깨달은 것이다.

유럽 노예시장 주무르다 미 해군 강공(强攻)에 소멸
김석균

1965년 경남 하동 출생

한양대 행정학과, 서울대 행정 대학원 석사, 미국 인디애나대 행정학 석사, 한양대 행정학 박사, 미국 듀크대 visiting scholar

37회 행정고시

남해지방해양경찰청장, 해양경찰청 기획조정관, 해양경찰청 차장

2013년 3월~제13대 해양경찰청장


이후 영국과 프랑스는 아프리카를 식민지화하기로 하고 먼저 프랑스가 1830년 군대를 알제리에 보냈다. 이러한 일련의 계획된 움직임은 해적을 공포로 몰아넣었고 군사작전이 시작되자 그들은 즉각 항복을 선언했다. 프랑스는 알제리를 132년간 통치했고 1865년 이후에는 바르바리 해변 자체를 합병했다. 이후 유럽 제국들이 바르바리 해안으로 진출을 확대하면서 오랜 세월 지속돼 오던 바르바리 해적의 활약도 종지부를 찍었다.

신동아 2014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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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균 | 해양경찰청장 sukkyoon200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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