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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으로 읽는 우리 근대문학

슬픔과 감상, 수탈의 담배

안서 김억

  • 소래섭 | 울산대 국어국문학부 교수 letsbe27@ulsan.ac.kr

슬픔과 감상, 수탈의 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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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상과 현실의 검은 담배 연기

김억에게 담배 연기는 명상의 도구이자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게 하는 가장 강력한 상징이었다. 그의 시에서 담배 연기는 현실을 지움으로써 몽상에 빠져들게 하는 동시에, 주위를 뿌옇게 뒤덮어 답답한 현실을 절감케 하는 모순적 존재다.

그래서 그는 담배 연기를 항상 검은색으로 묘사한다. 동양에서 담배 연기는 전통적으로 ‘자운(紫雲)’으로 묘사됐다. 실제로 보라색 연기를 만들어내는 담배는 없지만, 담배 예찬론자들은 담배의 신비한 매력을 강조하기 위해 자운이라는 말을 즐겨 썼고, 이는 보편적으로 통용됐다. 자운 대신 푸른색, 흰색, 노란색 등으로 표현되는 경우도 있었으나, 검은색으로 묘사하는 경우는 드물다. 자운이나 푸른색을 뿜어내는 담배 연기가 김동인이 말한 것처럼 정신을 상쾌하게 하고 몽상에 빠져들게 하는 반면, 김억이 묘사하는 검은 연기는 몽상과 현실을 교차시킨다. 그래서 담배를 피우면 피울수록 슬픔과 감상은 깊어지게 된다.

이는 김억에게서 술과 담배를 배웠다는 김소월의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다.

나의 긴 한숨을 동무하는



못 잊게 생각나는 나의 담배!

내력을 잊어버린 옛 시절에

낫다가 새 없이 몸이 가신

아씨님 무덤 위의 풀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보았어라.

어물어물 눈 앞에 스러지는 검은 연기

다만 타붓고 없어지는 불꽃.

아 나의 괴로운 이 맘이어.

나의 하염없이 쓸쓸한 많은 날은

너와 한가지로 지나가라.

-김소월, ‘담배’

김소월은 이 작품에서 담배에 관한 오랜 전설을 소개한다. “내력을 잊어버린 옛 시절에/ 낫다가 새 없이 몸이 가신/ 아씨님 무덤 위의 풀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보았어라”는 구절은, 당시 세간에 널리 퍼져 있던 담배 관련 속설을 시화한 것이다.

죽은 여인의 춘정

속설에 따르면, 옛날 중국 어느 곳에 인물이 천하절색으로 남보다 다른 뜻을 가지고 세상에 온 기생이 한 사람 있었는데, 그 이름이 담배였다고 한다. 담배는 살아서 천하의 남자를 다 만나보는 것이 소원이었지만, 그 소원의 만분의 일도 이루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그가 묻힌 무덤에서 풀이 자랐고, 그것을 ‘담배’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담배의 전래 과정을 고려하면 터무니없는 이야기이지만 당시 민간에는 이와 유사한 속설들이 널리 퍼져 있었다. 1921년 총독부가 담배 전매 정책을 시행할 것이라고 밝히자 저항이 만만치 않았는데, 전매 반대론자들은 이 속설을 인용해 ‘죽은 여인의 춘정마저 착취하려 한다’며 총독부를 비판하기도 했다. 김소월은 그와 같은 속설을 소개하면서 담배를 삶의 괴로움과 쓸쓸함을 함께하는 친구로 그리고 있다.

김억과 마찬가지로 김소월도 담배 연기를 검은색으로 묘사한다. 검은색은 내면의 괴로움과 쓸쓸함을 드러내는 동시에 전설 속 여인의 서러운 죽음과도 맞물린다. 즉 이 시에서 ‘담배를 태운다’와 ‘무덤 위의 풀을 태운다’는 같은 행위다. 담배를 피우는 것은 내면의 슬픔이나 죽음과 대면하는 행위인 동시에 그러한 슬픔을 치유하고 죽음을 무화하려는 행위와도 같은 것이다.

이 시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시간을 죽이는 일’이기도 하다. 화자의 앞에는 권태와 슬픔으로 가득 찬 세계만이 놓여 있다. 그가 할 수 있고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행동이란 그저 시간을 흘려보내는 일, 그러한 시간이 “지나가라”라고 말하는 일밖에 없다. 화자의 이러한 모습은 무용한 것들에 탐닉함으로써 예술가적 자의식을 만들어가는 댄디즘의 일면이라고 볼 수 있다.

슬픔과 감상, 수탈의 담배

1909년 촬영된 담배 공장 동아연초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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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래섭 | 울산대 국어국문학부 교수 letsbe27@ul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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