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호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지킬 게 없는 사회

  • 허태균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입력2014-03-19 16: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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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 사회는 고도성장을 이룩했지만, 여전히 가진 자는 가진 것을 잃어버릴까봐 두려움에 떨고, 가지지 못한 자는 갖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 국민 대다수가 믿는 지배 종교와 신념, 가치가 생겨날 때까지 우리 사회의 심리적 성숙도는 천천히 오를 수밖에 없어 보인다.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20여 년 전,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머나먼 타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 ‘토종 국산’ 필자는 무지에서 오는 불안감과 막연한 두려움에 떨었다. 영어 실력도 시원찮고 미국도 잘 모르기에 당장 미국 공항에 내려서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나를 고민할 정도로 당황했다. 그래서 미국에 먼저 가 있는 선배 유학생에게 도움을 청했다. 필자와 아내를 위해 아파트도 구해주고 공항으로 마중 나와 아파트까지 손수 데려다준 선배 유학생 부부는 몹시 친절했다. 고맙게도 이민 가방 6개를 낑낑거리며 같이 아파트까지 올려주고 심지어 자신들이 준비해 온 음료수를 우리 부부에게 나눠주었다.

    유교가 종교?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대화는 처음 만난 한국 사람들의 식순처럼 호구조사로 시작됐고, 선배는 자연스럽게 물었다. “종교는 있어요?”라고. 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예, 유교요.” 그 선배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유교가 종교?”라고 중얼거렸다. 내 대답이 당시엔 꽤 충격적이었나보다. 약 1년 후 지역 한인 모임에서 내 소개를 했을 때, 한 교포가 나를 보고 “아! 그 유교 믿으신다는 분”이라고 할 정도였다.

    미국 사회에서 기독교의 영향력은 어마어마해서 한인 사회도 교회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종교를 믿건 안 믿건 일상의 편안함을 위해 많은 유학생이 교회에 나간다. 물론 필자는 유학을 마칠 때까지 교회 근처에도 안 가본 예외적인 유학생이었다.

    유교가 종교냐는 의문에 대해 전문가와 일반인의 생각이 다를 수 있다. 당시 나는 어차피 누군가에게 자신이 바라는 뭔가를 비는 것이 종교라면, 조상께 비는 유교도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종교를 잘 모르는 필자의 눈에 한국 종교의 독특한 점은 기복신앙이었다. 신앙을 갖는 주요 동기가 관념적인 가치나 존재에 대한 추구보다는 현세적이고 단기적인 이익인 것이다.



    한국 사람은 자녀의 대학 입학을, 사업의 성공을, 가족의 건강을, 심지어 복권이 당첨되기를 각자 자신이 믿는 종교의 ‘그분’에게 빈다. 신앙심이 깊은 사람은 한국 종교의 기복신앙을 걱정한다. 반면 필자와 같이 믿는 종교도 없고 종교성이 약한 사람은 진실한 신앙심의 부재를 걱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많은 사람이 각자 서로 다른 그분에게 빌고 있고, 서로 다른 그분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 믿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여긴다. 그들의 종교가 유일신을 추구한다면 한쪽은 승자, 다른 쪽은 패자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통계를 통해 본 우리 사회는 명백한 다종교 사회다. 불교 22.8%, 기독교 18.3%, 천주교 10.9%, 그리고 무종교라고 스스로를 얘기하는 사람이 46.7%다(2005년도 인구센서스). 어느 한 종교도, 심지어 무종교도 과반을 차지하지 못한다. 이처럼 우리 사회에는 완벽한 종교의 자유가 있다.

    하지만 선언적이거나 법적인 관점이 아닌 실질적인 종교의 자유가 존재하는 사회는 정말 이상한 사회다. 원래 안정된 사회에서는 상대적으로 종교의 자유가 없다. 기존의 사회를 지배하는 종교가 있으며, 굳이 국가나 사회적 압력이 아니라도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친척, 친구까지 다 같이 믿는 종교를 혼자 거부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교의 선택권을 느끼기도 전에 이미 그것을 믿게 된다. 즉 모태 종교를 갖는 것이 자연스러운 환경에서 태어난다. 우리 사회에서 다양한 종교가 절묘한 균형 상태를 유지한다는 사실은 우리의 기성세대가 거의 완벽한 종교의 자유 속에서 성장했음을 의미한다.

    과반이 없는 사회

    역사적으로 보면 종교는 한 사회 구성원의 가치관과 그들이 인생에서 추구하는 바를 반영하고 동시에 규정하는 역할을 해왔다. 그래서 교육, 결혼, 장례 등의 절차와 심지어 국가의 역할, 제도, 정책, 공식 절차의 대부분이 종교적 가치를 반영하고 종교적 의미를 갖는다.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왕은 종교지도자로부터 왕위를 인정받았다. 미국의 법정에서는 성경에 손을 얹고 진실 맹세를 한다. 아랍 국가의 대부분은 아직도 법적으로 여성에게 운전을 허락하지 않고, 많은 공휴일이 종교적 기념일과 연결돼 있다. 종교가 사회를 유지하고 운영하는 데 근간이 되었다고 봐도 지나치지 않다.

    그래서 세상의 여러 나라에는 국민 다수가 믿는 지배 종교가 있다. 개신교, 천주교의 본질이 같음을 감안하면 절반 이상의 서구 주민은 기독교인이다. 미국은 무려 80%에 달한다. 인도는 힌두교도의 비율이 80%가 넘는다. 아랍 국가 대부분은 이슬람 외 다른 종교를 허락하지 않는다. 종교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일부 사회주의 국가들을 제외하고는(이들 국가는 역사가 단절됐다고 보는 것이 더 합당하다), 대부분의 나라에 지배 종교가 있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 사회에서 종교가 균형 잡힌 모습을 보이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바로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가치관과 사상이 없음을 뜻한다. 즉 우리의 기성세대가 태어나서 성장하는 동안 자신이 어떤 가치를 추구해야 하는지를 암묵적으로나 명시적으로 강제해온 사회적 규범이 강하게 존재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아마도 우리 사회는 근대에 들어서면서 그런 가치를 잃어버렸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 조상은 ‘내 목을 자르는 한이 있어도, 내 상투를 건드릴 수는 없다’와 같이 자신이나 가족의 안녕을 희생할 정도로 지키고자 하는 어떤 가치나 상징이 있었던 것 같다. 당파적이고 비효율적이고 구시대적으로 비치는 선비의 모습에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사소한(우리 눈에?) 무엇이 존재했다. 상투, 예법, 절차, 의식 등 상징적인 의미가 들어간 것은 지금의 눈으로 보면 비효율적이고 쓸데없는 짓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을 지키고 따르는 사람에게는 그들이 추구하는 무엇인가를 반영하는 것이다.

    과거에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3년 동안 묘소를 지키는 것이나 전통 결혼식에서의 수많은 의식은 지금은 말도 안 되는 구습이나 미신으로 취급받는다. 하지만 지금의 결혼식에서 신부가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어야 한다는 인식이나 입지 못한 것이 한이 된다는 생각도 과거의 경우보다 더 효율적이거나 합리적이지 않다. 사실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하는 지금이 과거보다 이혼율은 훨씬 더 높은데도….

    우리가 잃어버린 것

    한국인에게 자신과 가족의 성공과 안녕을 포기하고서라도 지켜야 하는 게 있는지 묻는다면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사실 9·11 테러와 같은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자살테러는 자신이 믿는 바를 위해 목숨을 기꺼이 내놓는 희생이다. 물론 그 방법이 옳다는 얘기도 아니고 그 목적에 동의하지도 않지만.

    아마 우리의 조상이 목숨과도 바꿀 만큼 소중하게 지키려 했던 가치를 우리는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겪으며 잃어버렸을 것이다. 흔히 식민지배나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얘기할 때 일반적으로 물질적인 것을 예로 든다. 식민지배를 통한 경제적 피해, 자원의 수탈, 노동력 착취, 문화자원 손실 등이나 전쟁을 통한 기간시설 파괴, 경제 시스템 붕괴, 발전 기회 상실, 인적 손실 등을 얘기한다. 이러한 손실은 너무나 거대하면서 동시에 명백하기에 그 규모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그래서 보통 그에 대한 보상에 명시되는 경우가 많고, 역사적인 논의도 이러한 물질적 손실에 집중하게 된다. 더러 피해 국가의 국민이 겪었을 정신적 고통이나 정신적 외상 등을 언급하며 그에 대한 보상이나 사과를 요구하기도 한다.

    하지만 식민지나 전쟁이라는 비극이 한 국가와 국민으로부터 빼앗아가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일제는 우리의 문화, 언어, 가치를 없애려 갖가지 악행을 저질렀다. 역사 왜곡과 한국적인 것들에 대한 체계적인 비난으로 우리의 과거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무려 30년 넘게.

    광복 이후 우리의 가치와 역사를 되찾기도 전에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은 한 사회의 국민 수준을 끌어내리는 결과를 낳는다. 생존이 위협받는 극한 상황에서 인간 대부분은 자신이 평소에는 절대 하지 않을 일도 한다. 아무리 고결한 사람도 상한 음식을 먹고 쓰레기통을 뒤지며 죽은 자의 물건을 빼앗고, 스스로 살기 위해 주변사람을 배신하고 버리게 된다. 서로 아끼고 소중하게 여긴다고 믿었던 사람도 총알과 폭탄, 굶주림과 두려움 앞에서는 서로를 신뢰할 수 없게 된다. 오직 자신과 가족의 생존만이 중요해지고, 그 외의 모든 것은 상대적으로 의미가 없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심지어 때로는 가족을 포기하기도 한다. 이런 경험은 그런 행동을 하는 자신과 그것을 지켜보는 모든 이에게 인간의 존엄성, 상징적 가치, 사회적 규범의 허무함과 상대적 가벼움을 느끼게 한다.

    비극적 경험의 심리적 파장

    이런 심리적 손실이 일어나는 과정은 인지부조화 이론과 태도의 중요도로 설명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자신의 신념과 태도가 행동을 결정한다고 믿는데 실제로 그런 경우가 많다. 어떤 대상이나 행동을 좋아한다면 그 태도를 반영하는 행동을 한다.

    아무런 제약 없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행동이 신념이나 태도를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때로는 상황적 제약이나 외부의 요구에 따라 자신의 태도와 다른 행동을 하기도 한다.

    자신의 태도, 믿음, 신념에 반대되는 행동은 심리적 갈등을 일으킨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려 하고, 절체절명의 상황은 좋은 핑곗거리가 된다. ‘그래 자신의 목숨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어’ ‘가족을 지키는 게 우선이야’ ‘이런 상황에서 이 정도는 받아들여질 거야’ ‘다른 사람은 더 하는데 뭐’…. 이런 합리화는 그 순간 마음을 편하게 한다.

    하지만 결국 그 어떤 숭고한 가치, 종교적 교리, 사회적 규범도 생존보다는 중요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린다. 대부분의 사람은 정말 심각한 생존의 위협을 받기 전에는 너무나 쉽게 ‘나는 죽어도 그건 못해’라고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것 때문에 죽을 처지에 놓인다면, 죽음을 택할 사람은 별로 없다. 실제로 평소 남의 물건을 훔치고, 죽어가는 사람을 모른 척하고, 썩은 음식 때문에 다른 사람이랑 싸우고, 심지어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전쟁과 같은 상황에서 이런 소신을 지키는 사람도 별로 없다. 이런 심리적 갈등과 합리화, 그리고 인식의 변화 과정이 바로 인지부조화다.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많은 사람은 지연과 학연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며 후보의 자질이 가장 중요하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갖춘 후보와 아무것도 갖추지 않은 후보 중에 선택하라는 쉬운 문제가 주어지지 않는다. 항상 충돌하는 가치 중에 무언가를 포기하면서 더 중요한 걸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선택의 결과는 인지부조화를 통해 그 중요성을 더 강화하는 선(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전통적 택시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는 영국(왼쪽)과 일본의 택시.



    생존, 물질, 성공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2013년 5월 4일 박근혜 대통령이 숭례문 복구 기념식에 참석한 후 시민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30년이 넘는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얼마나 잃었을까. 우리가 무엇을 잃었는지는 다 헤아릴 수 없지만 무엇이 남았는지는 추론해볼 수 있다. 바로 생존, 가난에 대한 두려움, 물질적 풍요와 성공에 대한 열망이다.

    지난 60년간 우리 모습에서 생존과 성공을 포기하면서 지켜온 게 있었던가? 지금의 서울에서 600년 전통을 찾을 수 있는 곳이 몇 군데나 되나. 기껏해야 몇 개의 궁궐과 4대문 정도다. 전통적인 가치를 반영하는 일상의 모습은 얼마나 남아 있나. 결혼식 때 서구의 하얀 웨딩드레스는 꼭 입어도 한복은 허례허식으로 치부된다. 우리 조상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다는 유교적 가치를 반영한 일상은 얼마나 남아 있나. 보편적이고 공익적인 가치는 사라지고 상대적으로 이기적인 가족애, 가족의 성공, 입신양명을 중시하는 태도만 남아 있다.

    어찌 보면 이렇듯 지킬 것이 없는 가치부재 덕분에 한국사회는 엄청난 경제적·물질적 성공을 이뤘다. 원래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이 제일 무섭다고 한다. 왜? 망설일 필요가 없으니까. 우리의 기성세대는 그런 마음으로 일했다. 새로운 건물을 짓기 위해 과거의 건물을 허무는 데 전혀 망설이지 않았다. 성장을 위한 효율성과 생산성이라는 명분하에 인권, 인간의 존엄성, 환경, 나눔, 정의와 같은 추상적 가치는 머릿속에서 밀려났다. 우리는 일상에서 뭐든지 너무 쉽게 바꾸면서 산다.

    일본과 영국에 갔을 때 나를 가장 놀라게 했던 것이 멋진 궁, 전통의 가옥, 문화재보다는 그들의 택시였다. 자동차산업에서 영국과 일본이 세계를 선도했거나 선도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들의 택시는 대부분 여전히 수십 년 전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한다. 분명히 더 편하거나 멋있거나 연비 좋은 택시로 쓸 자동차가 없거나 몰라서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바꾸는 것을 망설인다.

    우리는 어떤가. 신형 차가 나올 때마다 더 나은(?) 택시로 바뀐다. 과거의 것을 잃었다는 것보다는 현재에도 생존과 성공 이외의 가치를 찾지 못하는 것이 더 문제일지도 모른다. 5대, 7대에 걸쳐 60년째 같은 곳에서 같은 방식으로 운영하는 식당보다는, 조금만 잘되면 금방 프랜차이즈 사업으로 확장하는 한국에서 맛은 항상 돈보다 뒷전이다. 심지어 전 세계 전자업계 1위인 삼성전자도 언제든 더 큰돈을 벌 수 있는 다른 사업을 찾아다닌다고 한다.

    지킬 게 없는 우리 사회는 초고속 시대에 잘 맞는다. 당장 돈이 되지 않는 무형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생존과 성공을 포기할지를 망설이는 심리적 갈등이 별로 없다. 그래서 어찌 보면 우리 사회는 절대 망하지 않을 것 같다. 언제든지 잘되는 쪽으로 바꿔 탈 준비가 된 사람은 생명력이 무지하게 길다.

    지도층이 없는 한국

    진정한 지도층은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 자신과 가족의 개인적인 이득이나 생존을 초월해서 한 사회가 추구해야 할 가치를 제시하고, 그 가치를 실현할 거시적인 안목과 계획을 세울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우리 사회의 가진 사람들이 이런 사람이길 바라는 것은 너무 이상적이다. 우리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은 대부분 과거에 찢어지게 가난함을 경험했고 그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독하게 노력한 사람이다. 엄청나게 독하고 경쟁적이고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사람이다. 이들에게 이제 생존의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욕심을 내려놓고 군자처럼 살라고 하면 그게 될까?

    미국의 전직 대통령 빌 클린턴은 어렸을 때 매우 가난하고 힘든 삶을 살았다. 그래서 클린턴은 매우 현실적이고 성취지향적인 대통령이었다고 한다. 반면 앨 고어 부통령은 부유한 명문가에서 태어나 평생 생존과 물질적 성공을 걱정한 적이 없다. 실제로 앨 고어는 방이 20칸이 넘는 저택에서 살면서 1년에 전기료를 3000만 원을 넘게 낸다고 한다. 재미있는 건 앨 고어가 환경운동가로서 활동한다는 것이다. 평생 생존과 현실을 걱정해보지 않은 앨 고어 정도 돼야 관심과 고민의 내용이 추상적이고 거시적일 수 있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 앨 고어 같은 사람이 별로 없다. 돈이 많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도 여전히 생존의 두려움을 안고 있다. 그래서 아직도 배고파하고 현실적이고 단기적일 수밖에 없다. 물론 자신과 자녀의 생존과 세속적 성공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람도 있다. 불행히도 현실적으로 그런 사람은 드물다. 그래서 더욱 존경받는다.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허태균

    1968년생

    고려대 심리학과 졸업, 미국 일리노이 주립대 문학석사(일반심리학)·노스웨스턴대 철학박사(사회심리학)

    저서 : ‘가끔은 제정신’


    아마 몇 세대가 더 흘러 우리 자손 중에 평생 한 번도 생존과 세속적 성공을 걱정해보지 않은 이가 늘어나면, 그들 나름대로의 가치를 찾아 물질을 포기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자신들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돈을 기부하고 회사를 포기하고 사회에 모두 환원하면서 떠나는 멋진 모습도 자주 보게 될 것이다. 아직은 우리 사회는 가진 자는 가진 것을 잃어버릴까봐, 가지지 못한 자는 가지고 싶은 욕망과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 국민 대다수가 믿는 지배 종교(신념, 가치)가 생겨날 때까지 우리 사회의 심리적 성숙도는 천천히 오를 것이다. 이 성숙도를 속성으로 높이는 방법이 있을까. 아이를 더 빨리 자라게 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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