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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가 있는 풍경

1990년대 샐러리맨 애창곡 절규하며 부른 고향의 노래

조운파 ‘칠갑산’

  • 글·김동률 |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yule@empas.com 사진·권태균 | 사진작가·신구대 교수 photocivic@naver.com

1990년대 샐러리맨 애창곡 절규하며 부른 고향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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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래 ‘칠갑산’에는 한국인만의 근원적이고 숙명적인 한(恨)이 담겼다. ‘너만이라도 배곯지 말라’며 어린 딸의 손을 놓는 어머니의 비원, 단장의 슬픔이다. 대중가요와 국악가곡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 노래는 1990년대 샐러리맨의 고달픈 인생을 대변하며 인기를 누렸다. 그리고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해 세대를 뛰어넘었다.
  • 이 풍진 세상에, 배고팠던 그 시절이 과거가 된다는 건 너무나 쓸쓸한 일이다.
1990년대 샐러리맨 애창곡 절규하며 부른 고향의 노래

칠갑산 정상에서 내려다본 장곡사. 좁고 깊은 계곡에 자리 잡았다

“칠갑산을 즐겨 부르고 웃음도 많고 그림도 잘 그리던 소녀 같은 분인데….” 세월호 참사로 온 나라가 뒤숭숭하던 6월 초 한 일간지에 소개된 부음 기사다. 주인공은 위안부 피해자인 배춘희 할머니. 그는 91세로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냈다. 1923년 경북 성주에서 태어난 배 할머니는 19세의 꽃 같은 나이에 일본군 정신대에 자원했다. 정신대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배곯지 않는다는 말에 혹했다. 이후 중국 만주로 끌려가 끔찍한 위안소 생활을 겪었다. 광복 후 한국에 돌아왔으나 주변의 시선을 견디다 못해 다시 일본행을 택했다. 일본에서는 아마추어 엔카(일본 대중가요) 가수로 지내다 1980년대 초반 예순이 되어 귀국했다. 이후 일본군 위안부 후원시설인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다 6월 초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 기사의 요지다.

위안부 할머니의 노래

나는 이 기사를 읽으며 배춘희 할머니가 오랜 세월 홀로 ‘칠갑산’을 즐겨 불렀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 사연 많고 한 많은 할머니가 왜 유독 노래 ‘칠갑산’을 즐겨 불렀을까?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면 노래 칠갑산을 한번 들어보거나 불러보는 방법밖에는 없겠다. 기성세대에 널리 알려진 이 노래는 5월 KBS2 TV 방송 ‘불후의 명곡’에서 조성모가 불러 젊은 세대에도 알려지게 된다. 검은 정장 차림의 조성모는 이날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위중하다며 ‘칠갑산’을 부른 이유가 아버지의 애창곡이기 때문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를 위해 노래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칠갑산’은 지금의 세대에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가락과 정서가 있다. 한(恨)의 노래이기 때문이다. 대개 한국인만의 근원적이고 숙명적인 슬픔을 한이라고 한다. 영어를 비롯한 나라 밖 말로는 도대체 번역은 물론이고 설명조차 잘 안 되는 이 말은 한국인의 정서를 관통한다. 한국인의 눈물, 체념, 원망 등을 고스란히 담은 것이다. 특히 이 말은 적극적이기보다는 모든 것을 자신의 업보와 분수로 여기며 삭여버린 분노, 체념해버린 슬픔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겠다.

지금의 아이돌 그룹이 부르는 노래는 대개 경쾌한 발라드풍이거나 댄스 음악이 주류이지만, 한 시절 한국의 대중가요에는 이처럼 한 맺힌, 한 많은 노래가 풍미했다. 조용필이 리바이벌해서 부른 민요 ‘한 오백년’을 비롯해 장사익이 부른 대부분의 노래 근저에도 한이 자리 잡고 있다. 이 같은 노래들 가운데 구전민요가 아닌 창작곡으로 한국인의 한을 절창의 가락으로 묘사해 주목받은 노래가 바로 칠갑산이다. “콩밭 매는 아낙네의 베적삼이 땀에 젖고 눈물과 함께 김을 맨다”는 노랫말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한 폭의 풍경화를 연상케 하는 노래는 오랜 세월 한민족과 함께한 간난(艱難)과 이에 따르는 숙명적인 슬픔을 유현(幽玄)하게 표현한다.



노래의 무대가 되는 칠갑산은 충청남도 청양군 대치면·정산면·장평면에 걸쳐 있는 산이다. 아득한 시절, 지리 시간에 듣고 배운 차령산맥에 속하며 산정에서 방사상으로 뻗은 능선이 면계(面界)를 이룬다. 계곡이 워낙 깊고 사면은 급한 데다 산세가 거칠고 험준해 충남의 알프스로 불리기도 한다. 교통이 불편했던 옛날에는 칠갑산이 청양군을 동서로 쫙 갈라놓은 지형적 장애였고 한티고개로 불리는 대치(大峙)는 중요한 교통로이지만 워낙 험준해 지금도 겨울철에는 단절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그 옛날 절해고도의 유배지나 다름없었던 산은 옆구리에 유서 깊은 장곡사를 끼고 있다.

1978년 만들어져 90년대 히트

1990년대 샐러리맨 애창곡 절규하며 부른 고향의 노래

칠갑산 입구에서 길을 나선 할머니. 험한 밭일에 허리가 성치 않다고 한다.

노래를 풀이하자면 이렇다. 한적한, 인적이라고는 전혀 없는 이 깊은 계곡에 화전민 모녀가 찾아온다. 너무나 가난했던 그들은 하루 먹을 양식과 최소한으로 몸을 가릴 작은 삼베 조각을 얻기도 힘들다. 송홧가루 날리는 어느 여름날, 마침내 어머니는 아직은 귀밑머리가 풋풋한 어린 딸에게 시집갈 것을 권한다. ‘너만이라도 배곯지 말고 살아달라’는 어머니의 비원. 홀어머니에 떠밀려 시집가던 날, 칠갑산 산마루에 울어주던 산새소리는 어린 딸의 마음을 찢어지게 한다. 나마저 떠나면 남겨진 홀어머니가 굶어 죽지나 않을까 하는 어린 소녀의 단장의 슬픔을 노래는 곡진하게 대변하는 것이다.

노래를 짓고 만든 이는 원로 음악인 조운파 선생이다. 운파(雲坡)는 호다. 구름 운, 언덕 파쯤 되니 상당히 낭만적인 분으로 짐작된다. 시인이기도 한 조운파는 테너 박인수가 부른 ‘달빛’ 등 여러 편의 창작 가곡도 발표하는 등 아직도 현역으로 맹활약한다. 386세대에게 널리 알려진 노래 ‘연안부두’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 ‘옥경이’ 등도 그의 작품이다. 조씨는 칠갑산의 노랫말과 관련해 “논이 아닌 산비탈 밭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콩밭은 우리 민족의 곤곤했던 삶의 터전이며 포기마다 눈물 심는다는 것은 ‘가난한 이들의 한을, 슬픔을 갈무리한다는 의미’라고 설명한 바 있다. 지금의 세대가 누리는 풍요 저 뒤편에 자리한 처절한 아버지 세대의 삶의 쓰라린 고통을 풍경화처럼 묘사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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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김동률 |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yule@empas.com 사진·권태균 | 사진작가·신구대 교수 photocivic@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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