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활’
미술과 마음이라는 이 연재 제목을 생각할 때, 현실에 대한 마음의 대응에서 매너리즘은 이채로운 양식입니다. 화가를 포함한 예술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시대, 자기 삶에 대한 해석과 재현일 것입니다. 시대와 자아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시대가 불안하면 자아는 그 시대의 불안을 무의식적으로 반영하는 동시에 창조적으로 해석합니다. 바로 이 점에 엘 그레코의 작품이 주는 예술적 감동과 공감이 있습니다.
또 하나의 엘 그레코의 작품을 소개하려 합니다.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에 있는 ‘부활(The Resurrection·1590년대 후반)’입니다. 이 그림이 기독교에서 갖는 의미는 각별합니다. 부활이란 새로운 시작, 즉 새로운 생명의 획득을 의미하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 교리입니다. 이 그림은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갖는다면 영원히 죽지 않는 천국에서의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말해줍니다.
이 그림에서도 엘 그레코 특유의 화풍이 잘 드러납니다.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에서처럼 그는 화면을 위와 아래로 분할했습니다. 위는 부활한 그리스도의 빛나는 모습을 담았고, 아래는 혼돈스러운 현실의 풍경을 묘사합니다. 길게 늘어진 신체, 군상의 역동적인 몸짓, 강렬한 색채, 그리고 환상적인 장면은 매너리즘의 방식으로 인간의 불안한 심리를 잘 드러냅니다.
심리적으로 불안이란 위험에 직면해 무력감과 두려움을 느끼는 상태를 말합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이 불안을 현실적인 불안(realistic anxiety)과 신경증적인 불안(neurotic anxiety)으로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전자가 외부의 실제적 위험에서 생겨나는 것이라면, 후자는 대상 상실 등의 경험을 통해 인간의 내면 안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느끼는 불안이든 내면의 상처로부터 경험하는 불안이든 개인의 불안 경험 강도가 너무 커지면 극단적인 정신적 혼란이 나타나는데, 이런 혼란을 공황상태라고 합니다. 공황상태가 될 때 인간은 극심한 무기력과 두려움에 빠지게 되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 몰두함으로써 불안 극복을 모색하게 됩니다. 상담학을 공부하는 제가 보기에 엘 그레코는 앞서 다룬 그림과 마찬가지로 ‘부활’에서도 역시 기독교 신앙만이 이러한 공황적 불안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해주리라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내면의 믿음, 부조리한 현실
삶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요. 구약성서 전도서 작가의 한탄처럼 이 세상 모든 것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된 것’일까요. 결국 두려운 죽음으로 가는 고난의 과정일까요.
안타깝게도 지상에서 벌어지는 풍경들을 바라보면 희망보다는 절망이 앞섭니다. 엘 그레코가 살았던 16세기에도 돈과 힘과 이익을 얻기 위한 인간의 투쟁과 경쟁은 현재와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그림 속의 일그러진 얼굴, 과장된 몸짓, 무수한 비명은 바로 시대를 초월해 존재하는 지상의 풍경으로 보입니다. 그림 속에서 드러나는 이 이상한 불안함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세상에서도 비슷한 모습으로 곳곳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엘 그레코는 이러한 현실에 맞설 수 있는 치유의 힘으로 기독교 신앙을, 다시 말해 절대자인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자신의 작품에 담았습니다. 그는 지상의 것보다 천상의 것을 중시함으로써, 외면적 대상을 객관적으로 재현하는 것보다 내면의 믿음을 주관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부조리한 현실에서 오는 불안과 고통을 이겨내려 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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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에선 엘 그레코의 작품을 통해 시대의 불안과 그것을 치유하는 구원으로서의 종교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마침 4월 5일은 부활절입니다. 삶의 유한성을 넘어서는 영원한 세계에 대한 동경은 모든 사람이 갖는 소망일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은 그 영원성으로 가는 출발점이겠지요. 그래서인지 몰라도 해마다 부활절이 되면 저는 엘 그레코의 화집을 찾아 들춰보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