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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글자로 본 중국 | 안후이성

동부의 富 떠받치는 중부의 휘상(徽商) 후손들

皖 ‘와호장룡’ 무대

  • 글 · 사진 김용한 | 중국연구가 yonghankim789@gmail.com

동부의 富 떠받치는 중부의 휘상(徽商) 후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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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의 강남과 강북을 잇는 요충지 안후이성은 ‘삼국지’의 주요 무대였다. 이곳 사람들은 험준하면서도 수려한 황산과 닮아 생존의지가 투철하면서도 유학을 숭상했다. 중국 근대의 문을 연 리훙장을 배출한 땅이지만, 개방 이후에는 상하이 등 인근 도시에 저임 농민공을 공급하는 배후 지역으로 전락했다.
동부의 富 떠받치는 중부의 휘상(徽商) 후손들
무협영화 ‘와호장룡(臥虎藏龍)’ 무대로 유명한 안후이(安徽)성 훙춘(宏村)에 오니 개성적인 옷차림의 여성이 눈에 띄었다. 검정 재킷에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흰 블라우스와 핑크 손가방으로 포인트를 줬다. 홍춘의 동선은 무척 단순해서 그녀와 나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구경하다 한 벤치에 앉아서 쉬었다.

그런데 그녀가 잠시 전화통화를 하더니 갑자기 펑펑 울기 시작했다. 그녀의 휴지가 금세 다 떨어졌길래 내 휴지를 건넸다. 중국에서 흔한 10장들이 휴지 한 통에서 2장을 쓰고 8장이 남아 있는 거였다. 그녀는 8장의 휴지를 단숨에 다 써버렸다. 한국에서라면 한두 장쯤 빼서 눈물을 닦고 돌려줬을 텐데, 역시 대륙의 기상이 다른가보다. 휴지 한 통을 놓고 한중 간 문화 차이에 대해 진지한(?) 고찰을 마칠 때쯤 그녀도 울음을 그쳤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남자친구랑 여기서 만나기로 했는데 남자친구가 바쁘다며 언제 올지 모르겠다고 했단다. 어딜 가나 남녀의 일은 비슷하구나.

안후이는 청대(청代) 정치의 중심 안칭(安慶)과 경제의 중심 후이저우(徽州)를 합친 말이다. 안후이성의 약칭인 ‘땅 이름 환’ 자는 안칭의 옛 이름. 이곳은 삼국시대 최고의 미녀 자매 대교 · 소교의 고향이다. 천하를 통일하고 대교와 소교를 얻으려던 조조의 야심은 적벽대전으로 좌절됐다. 적벽의 불길은 이미 오래전에 사그라졌지만 남녀상열지사의 불길은 ‘휴지녀’에서 보듯 여전히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태산보다 황산!

안후이는 강남과 강북, 중원과 동부 해안 지역을 잇는 요충지다. 유방과 항우의 최후 결전인 해하전투가 여기서 벌어졌다. 한신은 십면매복(十面埋伏)으로 항우의 군대를 격파했고, 장량은 한 자루 퉁소로 초나라 병사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사면초가(四面楚歌)를 부르게 했다. 항우와 우미인은 죽음의 작별[패王別姬]을 나눴다.



삼국시대 안후이 북부는 난세의 간웅 조조, 신의(神醫) 화타, 일급책사 유엽을 낳았고, 남부는 오나라의 대도독 주유, 노숙, 여몽을 배출했다. 안후이의 성도 허페이(合肥)에서 조조와 손권은 몇 차례나 격전을 벌였다. 허페이는 ‘강남의 머리이며, 중원의 목구멍(江南之首 中原之喉)’이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안후이는 원술이 황제를 참칭한 수춘, 장강을 낀 요충지 여강 · 환 등 삼국지의 팬들에게 친숙한 지역이 많다.

격동의 현장 안후이는 판관 포청천, 명태조 주원장, 청나라 북양대신 리훙장(李鴻章) 등 선 굵은 인물을 여럿 배출했다. 후진타오 전 주석, 주룽지 전 총리는 안후이 출생은 아니지만 본적지가 이곳이라 안후이에 대한 애착을 드러내곤 했다.

황산 등산의 전초기지 툰시(屯溪)에서 마트에 들렀다. ‘참이슬’ 소주가 매장 한 코너를 가득 채웠다. 작은 마을에 이토록 많은 소주라니, 한국인이 얼마나 많은 소주를 마셔대는 걸까. 다음날 황산에 가자 관광버스 단위로 온 한국 등산객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안후이에는 산의 지존 황산과 4대 중국 불교 성산 중 하나인 구화산이 있어 등산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황산의 가파른 바위와 소나무, 구름이 어우러진 풍경은 속세에서 벗어난 듯한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황산이 없으면 하늘의 신선들이 내려올 곳이 없”으며, “오악(태산, 화산, 형산, 항산, 숭산)을 보고나면 다른 산을 보고 싶은 생각이 없어지고, 황산을 보고나면 오악마저 보고 싶은 생각이 사라진다.” 구화산은 중국 불교의 성지로 청말 전성기에는 300개의 절과 4000명의 승려가 있음을 자랑했다. 신라 성덕왕의 장남인 교각대사가 지장보살로 추대된 곳이라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그러나 황산과 구화산은 안후이의 많은 산 중 일부일 뿐이다. 중원의 평야는 장강을 넘지 못한다. 험한 장강을 기껏 건너면 거친 산이 겹겹이 놓여 있다. 한족에게는 그다지 매력이 없는 땅이었다. 후한말 전란을 피해 강남으로 내려온 한족 이주민은 거칠고 야성적인 원주민을 만난다. 한족은 그들을 ‘산속에서 살아가는 야만인’, 즉 산월족(山越族)이라고 불렀다.

산월족은 장쑤 · 안후이 남부부터 장시 · 저장 · 푸젠 · 광둥에 이르는 광대한 산악지대에서 살았다. 이 영역이 어디인가. 바로 손권의 오나라 땅이다. ‘천하의 3분의 1을 차지했다’고 하지만, 실상 오나라는 통치하기가 매우 어려운 지역이었다. 위로는 토착 호족세력이 강했고, 밑으로는 산월족 등과 민족갈등이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미개척지를 개발해야 했고, 군사적으로는 위와 촉에 대비하는 것 말고도 산월족의 내란을 토벌해야 했다. 220년 위 · 촉 · 오 삼국이 정립된 후에도 오나라는 산월족에 시달렸다. 234년 제갈각이 단양군(안후이 쉬안청)의 산월족을 토벌하겠다고 했을 때, 오나라의 신하들은 모두 단양군 평정을 만류했다.

리훙장의 고군분투

“외지고 깊은 산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 모두 들녘에서 무기를 쥐고 있으며 마지막에는 수풀 속에서 늙어 죽습니다. 도망자나 오랫동안 사악한 행위를 한 자는 모두 함께 이곳으로 달아나 숨어 있습니다. (…) 그곳 습속은 무예를 좋아하고 싸움을 익히며 기력을 높이 숭상합니다. 그들이 산을 오르고 험난한 곳을 넘으며 가시덤불을 뚫고 지나가는 것은 마치 물고기가 연못 속에서 질주하고 원숭이가 나무에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 그들은 싸울 때는 벌이 이르는 것처럼 하고 지면 새처럼 사방으로 달아나 버립니다.”

- 진수, ‘정사 삼국지 : 오서’,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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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사진 김용한 | 중국연구가 yonghankim78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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