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곳에선 ‘승정원일기’와 ‘조선왕조실록’ 번역팀이 핀셋으로 콩알을 집어 옮기듯, 한 자 한 자 선조들의 지혜를 한글로 옮기고 있었다. 승정원일기는 조선 인조대(代)부터 순종대까지 288년간 임금과 신하의 대화 등을 기록한 일기. 올해로 22년째 번역 중이다. 조선왕조실록은 1993년 완역했지만, 당시의 번역 오류를 바로잡고 직역투의 번역을 현대 어법으로 바꾸기 위해 2011년부터 재번역에 매달렸다.
연구원들은 원본 영인본(影印本)과 전산화(DB)한 텍스트를 비교한 뒤 문헌들을 참고하면서 번역한다. 양반 자세를 하고 고문헌을 뒤적이거나 한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생각에 잠긴 연구원들의 이마에는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혔다. 추가 취재를 위해 두 차례 더 번역원을 방문했을 때도 그들은 같은 자리에서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문헌 속 시간 여행

최 실장의 설명처럼, 연구원들은 번역을 하다가 낯선 한자와 마주치면 손을 이마에 대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조선시대 법전이나 당시 사회상을 담은 옛 문헌을 뒤적이기도 하고, 혼자 힘으로 안 되면 서로 원고를 검토하는 ‘공동번역’ 시간에 논의하거나 선배 연구원에게 자문을 구하면서 고비를 넘겼다.
번역에 앞서 초서(草書)로 쓰인 원문을 해서(楷書, 정서)와 비교하기도 했다. 임금의 말 한마디 놓치지 않으려는 기록자의 빠른 필기체 초서는, 평소 한자를 좀 안다고 자신하던 기자에게도 ‘외계 문자’로 보였다. 김태훈 승정원일기 번역팀장의 말에서는 비장감마저 묻어났다.
“오역(誤譯)은 어쩔 수 없는 한계이지만, 최소화하려고 노력합니다. 전산화를 거친 원문 1만 자 가운데 보통 6자 정도의 오류가 나옵니다. 역자(譯者)가 아무리 심혈을 기울인다고 해도 오역은 나오게 마련입니다. 1년에 두 차례 ‘번역 평가’를 하는데, 여기에서 오역이 나오면 15점, 어색한 표현의 번역은 3점 감점하는 식으로 평가해 85점을 못 넘으면 전체를 재번역해야 합니다. 재번역에서 또다시 85점을 넘지 못하면 역자 위촉을 중단하죠. 최고 수준의 전문가들이 역자 자격증을 회수당하면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겠죠. 그러니 거의 전쟁 수준입니다.”
역사문헌번역실에서 기자의 눈길을 끈 것은 승정원일기다. 연구원 10명과 프리랜서 전문 역자 34명 등 44명의 고전 전문가들이 번역에 뛰어든 승정원일기는 왕명 출납을 관장하던, 지금의 대통령비서실 격인 승정원에서 남긴 그날그날의 일기다. 정7품 주서(注書)가 임금을 시종하면서 국정 전반에 관한 보고와 이에 대한 임금의 명령과 대화 등을 빠짐없이 기록했다. 임금과 신하가 경연(經筵)에서 학문을 토론하는 대목, 내의원에서 임금을 진료하면서 문진(問診)하는 대목, 국정을 논하는 대목 등을 들여다보면 역사를 거슬러 당대의 현장에 와 있는 듯하다.
2억4000만 字!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는 이순신의 유언도 승정원일기 인조 9년 4월 5일 기사에 보인다. 여기에 나오는 인조와 이원익(李元翼·1547∼1634)의 대화를 살펴보자. 1631년 4월 5일 인조는 경희궁 흥정당(興政堂)에서 이원익을 만났다.
이원익 : 고(故) 통제사(統制使) 이순신 같은 사람은 얻기 어렵습니다. 요즘에는 이순신 같은 자를 보지 못했습니다.
인조 : 왜란 당시에 인물이라고는 이순신 하나밖에 없었다.
이원익 : 이순신의 아들 이예가 현재 충훈부 도사로 있는데 그도 얻기 어려운 인물입니다. 왜란 때 이순신이 죽음에 임박하자 이예가 아버지를 안고서 흐느꼈는데, 이순신이 적과 대치하고 있으니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예는 일부러 그의 죽음을 알리지 않고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전투를 독려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