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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로 만난 이순신과 조선

치유와 소통의 수단 그러나 탐닉하지 않다

이순신의 음주가무

  • 박종평 | 이순신 연구가 goldagebook@naver.com

치유와 소통의 수단 그러나 탐닉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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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순신은 조선의 여느 양반처럼 음률(音律)을 즐겼다.
  • 그러나 절도(節度)가 있었다. 여색을 탐하지도 않았다.
  • 자신의 고통을 씻고 부하와 소통하기 위해 격조 있게 즐겼다.
치유와 소통의 수단 그러나 탐닉하지 않다
‘난중일기’는 이순신이 1592년 1월 1일부터 노량에서 전사하기 이틀 전인 1598년 11월 17일까지 7년 동안 쓴 것이다. 임진왜란 기간이라 전투와 관련된 기록이 많다. 그러나 전투가 늘 있었던 것은 아니기에 그 시대의 문화와 생활을 보여주는 이야기도 더러 나온다.

어떤 대목은 우리의 평범한 일상과 똑같다. 술을 마시거나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그것이다. 이순신이 술을 마신 이유, 놀이를 한 이유, 노래를 부른 이유도 우리와 다를 게 없다. 사람들과 소통하고, 맺힌 분노와 한(恨), 스트레스를 씻어내기 위해서였다. 명절과 기념일을 기리고, 부하들의 생일과 송별연을 위해서였다. 그럼에도 이순신은 평범한 우리, 혹은 그 시대의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격(格)을 보여준다.

어느 화창한 봄날

술에 대한 기록은 1592년 2월 1일에 처음 나온다.

1592년 2월 1일. 안개비가 잠깐 부슬부슬 내렸다. 늦게 갰다. 선창으로 나가 쓸 만한 판자를 골랐다. 때마침 수장 안에 물고기가 구름처럼 모였다. 그물을 쳤다. 2000여 마리를 잡았다. 장관이었다. 그대로 전선(戰船)에 앉아, 우후(이몽구)와 술을 마셨다. 더불어 새봄의 경치를 구경했다.



2월 1일은 양력 3월 14일이다. 따뜻한 봄이 왔을 때다. 그즈음에 선창에 나갔다가 수장에 모여든 물고기들을 잡는 광경을 지켜보며 술을 마셨다. 이순신에게 물고기는 군량이었다. 많이 잡을수록 수군의 군량을 더 많이 확보할 수 있기에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물고기를 안주 삼아 편안하게 술을 마시며 봄날을 즐길 수 있었다.

그가 물고기를 어떻게 먹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 시기의 다른 이들이 쓴 일기를 토대로 유추한다면 오늘날처럼 회(膾)나 탕으로 먹었을 것이다. 이순신과 같은 시대를 산 정경운은 1594년 7월 4일 일기에 시냇가에서 물고기를 잡아 회를 쳐 술을 마셨다는 기록을 남겼다. 같은 시대 인물인 박계숙의 1606년 9월 2일 기록에는 두만강에서 물고기를 잡아 회를 뜨고 탕을 끓여 먹었다고 쓰여 있다.

바닷고기는 물론 민물고기까지 회를 떠 먹는 식문화로 인해 조선시대 사람들은 간(肝)디스토마에 시달리기도 했다. 서울대 의대 신동훈 교수가 16~18세기에 사망한 조선시대 미라 18구를 연구한 결과, 5구에서 간디스토마와 폐디스토마가 발견됐다고 한다.

술에 관한 마지막 기록은 1598년 11월 8일 일기다. 9월 말~10월 초 순천 왜교성 전투가 끝난 뒤 군대를 휴식시키며 정비하고 있다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머물던 순천 봉쇄작전을 시작하기 전날이다. 그리고 19일 노량에서 그는 전사했다.

전략적 음주

1596년 5월 5일. (…) 여러 장수들과 회례(會禮)를 했다. 그대로 들어가 앉았다. 위로하면서 술잔을 네 번 돌렸다. 경상 수사가 술잔 돌리던 중에 씨름(角力)을 시켰다. 낙안의 임계형이 으뜸이었다. 밤새 즐겁게 놀도록 한 것은 내가 즐기려고 한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고생한 장수와 군사들의 노고를 후련하게 씻어줄 계획 때문이구나.

이순신은 이렇듯 술도 전략적으로 활용했다. 5월 5일은 단오 명절이지만, 이순신은 1596년을 제외하고는 단오라고 군사들을 특별히 배려해 잔치를 연 경우가 없다.

1593년 5월 5일엔 “우수사와 순천 부사, 광양 현감과 낙안 군수 등의 영공(令公)들과 같이 앉아 술을 마시며 이야기했다. 또한 군관 등을 편을 나누어 활을 쏘게 했다”고 했다.

1594년 단오엔 이런 기록이 나온다. “비바람이 크게 불었다. 지붕이 세 겹이나 벗겨져 조각조각 높이 날아갔다. 삼대 같은 빗발이 쏟아졌다. 몸뚱이조차 비바람을 피할 수 없었다. 우스운 일이다. 사도 첨사가 와서 인사를 하고 갔다. 큰 비바람이 미시(未時)에 조금 멈췄다. 발포 만호가 떡을 쪄 보냈다.”

1595년엔 “활 3순을 쏘았다. 우수사와 경상 수사, 여러 장수들이 합쳐 모였다. (…) 몸에서 한기가 나고 불편했다. 앓다가 토하고 잠들었다”고 썼다. 이순신은 1596년 말고는 7년 동안 단오를 명절처럼 보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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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평 | 이순신 연구가 goldageboo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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