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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바티칸 수교 임박?

프란치스코 교황, 주교 임명권 양보하며 中에 구애

  • | 최창근 객원기자 caesare21@hanmail.net

중국-바티칸 수교 임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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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뉴스1]

프란치스코 교황. [뉴스1]

그리스도의 대리인, 로마의 주교, 으뜸 사도(성 베드로)의 후계자, 보편 교회 최고 대사제, 이탈리아 교회 수석 대주교, 바티칸시국(市國) 국가원수, 하느님의 종들의 종…. 

이렇게 긴 호칭의 주인공은 로마 가톨릭교회 수장, 로마 교황이다. 교황은 콘클라베(추기경단 비밀회의)에서 참석자 3분의 2 이상 찬성으로 선출된다. 교황은 가톨릭 세계에 군림한다. 권위는 절대적이다. 

‘신(神)의 대리인’ 교황이 가진 대표적 권한은 사제·주교(主敎) 임명권이다. 하느님을 대리해 교회를 영도하는 교황이 행사하는 ‘신성불가침’ 영역이다. 로마 가톨릭교회 ‘주교’는 각 교구(敎區) 책임자다. 교회법에 의하면 그리스도 열두 제자의 사도(使徒)적 사명을 주교들이 이어받는다. 교황만이 교구의 주교를 임명할 수 있다. 이는 전 세계에 통용돼온 ‘보편 원칙’이다. 

한데 최근 교황의 절대 권위가 깨졌다. 교황은 주교 임명권을 양보했다. 상대는 중국. 교황청은 중국 정부가 임명한 주교 7명에 대한 파문을 철회했다. 동시에 교황청이 ‘합법적’으로 임명한 중국 내 주교 2명에게 주교직에 대한 양위를 요구했다.

신성불가침 對 주권 침해

지난 1월 홍콩 매체들은 좡젠젠(莊建堅·88) 광둥(廣東)성 산터우(汕頭) 교구장과 궈시진(郭希錦·60) 푸젠(福建)성 민둥(閩東) 교구장 등 두 주교가 교황청에서 퇴위 요구를 받았다고 전했다. 교황청은 이들에게 중국 정부가 임명한 황빙장(黃炳章·51), 잔스루(詹思祿·49) 주교에게 교구를 넘길 것도 요구했다고 한다. 



2006년 교황청은 좡젠젠을 비밀리에 산터우 교구장으로 임명했다. 중국 당국의 협박과 회유가 이어졌다. 그는 의연하게 버텨왔다. 문제는 2013년 3월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Jorge Mario Bergoglio) 추기경이 제266대 교황으로 착좌 후 발생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취임 후 중국에 대한 유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내보냈다. 임기 내 중국과의 관계 정상화도 시사했다. 

교황청과 중국 관계 개선의 걸림돌은 주교 임명권이다. 교황청은 보편 원칙을 들어 ‘중국도 예외 없음’을 고수해왔다. 중국은 ‘자선자성(自選自聖·스스로 성직자를 선출)’ 원칙을 내세워 맞서왔다. 교황청이 ‘자국’ 내 ‘자국인’ 성직자 임명에 관여하는 것은 주권 침해라고 주장했다. 양보할 수 없는 두 원칙 때문에 교황청과 중국은 관계 정상화에 이르지 못했다. 

중국에 전향적인 현 교황 취임 후 교황청 입장이 바뀌었다. 이 속에서 지난해 10월 좡젠젠은 교황청으로부터 퇴위 요구를 받았다. 연말 베이징으로 압송돼 중국 당국, 교황청 대표단과 면담도 했다. 교황청 대표단은 그에게 퇴임과 양위를 요구했다. 80대 고령의 좡젠젠은 눈물로 저항했다. 궈시진 민둥 교구장 처지도 피차일반이다. 궈시진은 지난해 부활절 즈음 구금됐다. 한 달 후 풀려난 그는 중국 정부가 임명한 잔스루에게 교구장직을 넘기고 보좌주교로 물러나겠다는 성명서에 서명할 것을 강요받았다. 그리고 교황청의 결정으로 교구를 넘겨야 하는 처지로 몰렸다. 그들은 상급 성직자에게 순명(順命)해야 하는 가톨릭 성직자다. 

중국과 가톨릭의 인연은 16세기 시작된다. 1534년 예수회를 창립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 Xavier)는 동방 선교에 주력했다. 인도와 일본 복음화에 성공한 그는 1551년 중국 선교를 시도하지만 입국하지 못한다. 이듬해 11월 광둥성 상촨(上川)섬에서 열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하비에르가 못다 이룬 사명은 후배 선교사들이 이어받았다. 명(明) 왕조 후반,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는 27년간 중국에 체류하며 중국인들을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었다. 1601년 명 만력제(萬曆帝)로부터 베이징 정주(定住)도 윤허받았다. 1603년 리치는 유교적 관점에서 가톨릭 교리를 해설한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집필한다. 이로써 가톨릭은 ‘천주교(天主敎)’로 동양에 자리 잡았다. 리치 사후 아담 샬(Johann Adam Schall von Bell), 페르디난트 페르비스트(Ferdinand Verbiest) 등 예수회 사제들은 중국에서 하느님의 사명을 다했다.

“폐하란 돌층계를 가리킵니까?”

예수회 선교사들의 활약에 힘입어 중국 내 가톨릭은 성행했다. 명·청 교체기 신자 수는 15만 명, 리치가 세상을 떠날 무렵 27만여 명의 신자가 있었다. 중국 지도층에만 2000여 명이 ‘천주’를 믿었다. 샤머니즘을 신봉하던 만주족과 유일신교 가톨릭이 맞지 않았음에도 청(淸)의 중원 지배가 시작된 후에도 가톨릭 신자는 증가일로였다.
그러나 1701년 교황청은 “예수회의 적응주의 선교는 잘못됐다”고 선언하고 배공제조(拜孔祭祖·공자에 대한 공경과 조상 제사), 위패 안치 등 일체 유교적 행위를 금지했다. 교황 특사 샤를 드 투르농(Charles Maillard de Tournon) 주교는 1705년 베이징에 도착, 강희제(康熙帝)를 접견했다. 배공제조와 위패 안치를 우상숭배라 주장하는 투르농에게 강희제는 반박한다. 

“공자는 중국인들의 위대한 스승이기에 존경받는다. 다만 우리는 행복, 벼슬, 재물을 얻으려 공자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기도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조상의 위패를 모시지만 그 안에 조상의 영혼이 거(居)한다고 믿진 않는다.” 

샤를 매그로(Charles Maigrot) 주교도 화를 부추겼다. 장기간 중국 내 선교를 했지만 중국 문화와 관습에 무지했다. 간단한 한자도 몰랐다. 황제의 존칭 ‘폐하(陛下)’라는 말을 듣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섬돌(陛)에 존경을 표하는 말입니까?” 

분노한 강희제는 매그로를 추방했다. 예수회가 제시한 적응주의 선교 정책을 따르지 않는 외국 선교사들도 중국 땅을 떠나라고 명령했다. 예수회를 제외한 기타 교단의 선교도 금지했다. 이로써 가톨릭교회의 중국 선교는 사실상 종언됐다.

국공내전 때 선교사들 살해

로마 가톨릭교회의 ‘제2차 중국 복음화’는 서구 열강의 포함외교와 함께 재개됐다. 

제1·2차 아편전쟁에서 패한 청나라는 강제로 문호를 개방했다. 가톨릭 선교사들도 다시금 중국 땅에 발을 디뎠다. 교세는 확장일로였다. 청나라 멸망,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과 이듬해 중화민국(中華民國) 건국 후에도 가톨릭 교세는 계속 확장됐다. 중화민국은 아시아 첫 민주공화정 정부였다. 사상·종교의 자유도 보장했다. 

가톨릭교회가 다시금 장벽에 부딪힌 것은 1949년. 그해 10월 1일 마오쩌둥(毛澤東)이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언했다. 중국 주재 교황청 대사는 중화민국(대만) 정부를 따라 타이베이(臺北)로 대사관을 옮겼다. 중국 정부는 1951년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라 교황청과 단교한다. 

유물론(唯物論)·무신론(無神論)의 공산주의와 종교는 대립할 수밖에 없다. 중국 본토가 붉게 물들어가던 무렵, 중국 내에는 300만 명의 가톨릭 신자, 3000명의 사제가 있었다. 성당의 수는 1만6000개였다. 중국 공산당은 국·공 내전 시기 기독교에 대해 적대감을 드러냈다. 공산당 점령 지역에서 교회와 성당을 파괴하고 사제, 목사, 선교사들을 테러했다. 때론 목숨을 빼앗았다. 1946년 재개된 국·공내전 중 100명 이상의 가톨릭 및 개신교 선교사들이 살해됐다. 

중국 공산당 입장은 단호했다. “서구 제국주의자들이 종교를 문화침략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을 더 이상 용인하지 않겠다”고 천명했다. 이 연장선상에서 종교 자유는 허용하나 스스로 관리하고[自治], 자급자족하고[自養], 스스로 선교[自傳]하며 국가에 충성하라는 이른바 ‘삼자운동(三自運動)’을 추진한다. 4000명 개신교 선교사 중 절반가량이 신변 위협 때문에 중국을 떠났다. 

교황청은 “공산 정부에 굴복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사제 2000여 명은 명령에 따랐다. 중국 당국은 1950년 마오쩌둥 살해 음모 개입 죄목으로 타르치시오 마르티나(Tarcisio Martina) 주교를 체포, 종신형을 선고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전국기독교협의회를 설립했다. 중국인 신자들에게 외국인 접촉 금지령을 내렸다. 크리스천들은 교회, 시장, 경찰서에서 심문당하고 배교를 강요받았다. 선교사들을 가택연금하고 교회·성당을 점령해 군인 숙소나 양곡 창고로 사용했다. 선교사들에게 고율의 세금을 부과했다. 선교사업 단체는 하나둘씩 도산했다. 

거세지는 중국 내 가톨릭 탄압 속에서 교황 비오 12세(Pope Pius XII)는 1954년 ‘중국 민족에게’라는 서신을 보냈다. 서신에서 교황은 삼자운동을 질책하며 “누구도 교회가 강권(强勸)에 복종할 것이라고 믿지 않으며, 누구도 교회에 복종을 강요할 수 없다”고 했다. 중국 가톨릭 교회 내부는 순교를 각오하고 교황 지시를 따르자는 파와 중국 정부 정책에 따르자는 파로 갈라져 충돌했다. 이즈음 중국 당국은 가톨릭교회를 위협하기 위해 최대 도시 상하이에서 수천 명의 신자를 체포·구금하고, 사제와 신자 17명을 총살했다.

한국 오는 길에 중국에 ‘인사’

마테오 리치와 서광계를 그린 그림. 이탈리아 출신 마테오 리치는 명 왕조 후반, 중국에 장기간 체류하며 선교 활동을 벌였다. 정치가 서광계는 가톨릭으로 개종한 인물. [wikimedias commous]

마테오 리치와 서광계를 그린 그림. 이탈리아 출신 마테오 리치는 명 왕조 후반, 중국에 장기간 체류하며 선교 활동을 벌였다. 정치가 서광계는 가톨릭으로 개종한 인물. [wikimedias commous]

1957년 7월 중국 정부 주도로 중국천주교애국회(中國天主教愛國會)가 공식 성립됐다. 전국 26개 성(省) 교구 대표 241명이 참석한 제1차 전국천주교대표회의에서 선언문이 발표된다. 

“교황청은 미(美)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세계를 위해 일하며 사회주의를 원수로 간주한다. 따라서 교황청의 명령은 정치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을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종교 메시지의 형식을 빌렸으나 실제는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명령을 우리는 받아들일 수 없다.” 

중국천주교애국회는 “교황청과 순수한 종교 관계는 유지하되 정치·경제적 관계는 철저히 단절한다”고 밝혔다. ‘신권(神權)은 로마에, 속권(俗權)은 베이징에’라고 입장을 정리했다. 천주교애국회는 또한 주교를 스스로 선출하는 자선자성 원칙도 확립, 교황청과 공식 결별했다. 중국 정부는 주교 후보는 “반드시 사회주의를 열렬히 사랑하고 사회주의에 유리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지침을 내렸다. 중국 정부와 천주교애국회를 거부하는 성직자와 신도들은 박해를 피해 지하로 숨어들었다. 이후 중국 내 가톨릭교회는 천주교애국회와 ‘지하교회’로 양분돼 오늘에 이른다. 

2018년 현재 중국 내 공식 가톨릭 신자는 570만 명, 지하교회 신자까지 합치면 120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교황청으로서는 이들을 방기(放棄)할 수 없다. 무엇보다 중국은 세계 최고 인구대국이다. 교황청은 중국을 포용함으로써 복음화를 기대한다. 세계 인구 60%를 차지하는 아시아 인구 중 가톨릭 신자 비율은 12%에 그친다. 그중 13억 인구의 중국은 교황청으로서는 포기할 수 없는 곳이다. 

중국과 관계 정상화는 교황청의 오랜 난제다. 문제의 한가운데는 주교 임명권이 자리한다. 교황청도 중국 정부도 물러설 수 없는 딜레마다. 현 프란치스코 교황은 취임 후 피에트로 파롤린(Pietro Parolin) 추기경을 교황청 국무원장으로 임명했다. 파롤린 추기경은 교황청 내 대표적 중국 전문가다. 메시지는 분명했다. 

교황청과 중국은 2014년 1월 로마에서 첫 회동 후 관계 개선 논의를 이어왔다. 중국도 교황의 메시지에 화답했다. 그해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訪韓)하는 길에 중국은 이례적으로 영공을 개방했다. 그가 탑승한 전세기가 중국 상공을 지날 때 교황은 시진핑(習近平) 주석과 중국인들에 대해 안부 메시지를 전했다. 8월 16일 서울 광화문에서 집전한 미사에서는 “탄압받는 교회를 위해 기도하자”는 강론을 했다. 중국인 사제가 ‘중국어’ 기도문도 읽었다. 그 후로도 프란치스코 교황은 “중국 땅을 밟는 첫 교황이 되기를 바란다”며 중국과 관계 개선 의지를 피력했다. 

사제 및 주교 서품권 문제 조율에도 진전이 있었다. 교황청과 중국은 지난해 네 차례 회담을 열고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뤄 접점을 찾았다. 합의점은 천주교애국회와 지하교회가 함께 참여하는 ‘중국주교단’이 주교 추천권을 행사하고 교황이 최종 임명하는 방식이다. 실리는 중국, 명분은 교황청으로 양분하는 방식. 같은 사회주의 국가 ‘베트남 모델’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베트남은 정부가 교황청에 제출하는 주교 후보자 명부 동의권을 행사하고 교황청이 추인(追認)하는 과정을 거친다. 형식상 최종 주교 임명은 교황이 한다. 

오랜 난제에 대한 합의점을 찾은 양측은 조만간 주교 임명 합의문에 서명할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 양회(兩會·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와 전국인민대표대회) 폐막 후인 3월 말, 중국 고위 사절이 교황청을 찾아 공식 서명할 것이라고 이탈리아 언론은 보도했다. 

중국과 교황청의 ‘관계 정상화’ 소식이 들릴 때마다 ‘벙어리 냉가슴’을 앓는 것은 대만이다. 중국-교황청 수교는 대만과의 단교를 의미한다. 2018년 3월 현재 20개 수교국이 남아 있는 대만에 바티칸의 교황청은 유럽 유일 외교 교두보다. 중화민국 수립 이후 1922년부터 현재까지 100년 가까이 외교관계를 이어온 우방(友邦)이다.

3월 말 바티칸에서 합의할 듯

대만의 ‘샤오펑유(小朋友·작은 친구라는 뜻의 소국)’의 다수는 중남미 가톨릭 국가. 교황청이 대만과 단교할 경우 이들과의 연쇄 단교 우려도 높다. 대만은 교황청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며 공을 들이고 있다. 2005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장례 미사에 천수이볜(陳水扁) 당시 총통, 2013년 프란치스코 교황 취임 미사엔 마잉주(馬英九) 당시 총통이 참석했다. 가톨릭 신자인 천젠런(陳建仁) 부총통은 2016년 9월 마더 테레사 시성(諡聖) 미사 참석을 명분으로 교황청을 방문, 우호 관계를 재확인했다. 

성(聖)과 속(俗), 명분과 실리, 종교와 정치가 한데 뒤엉킨 교황청과 중국의 관계 정상화의 귀추가 주목된다. 대만의 힘으로 거대한 물줄기를 바꿀 순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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