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 갈등, 계층 갈등, 세대 갈등…. 그중에서도 남녀 갈등이 가장 심각함.’
갈등은 중첩적이지만, 온전히 모두를 불행하게 하지는 않는다. 방향 없는 갈등은 무엇보다 원기 왕성한 바보들을 풍요롭게 만든다. 그들만의 잔치 속에 영웅이 탄생하고, 희희낙락한 교주가 등극한다. 딱히 원해서 그렇게 되진 않은 것 같은 어릿광대들의 심기일전한 역할극도 있다. 이 땅 위에서 숨 쉬는 그들도 사느라 몸부림이다.
#미투 운동이 미국에서 시작될 때만 해도 할리우드의 일이거니 했다. 서지현 검사가 방송 뉴스에 출연해 피해를 폭로했을 때도, 여러 맥락이 얽혀 있는 사건이려니 했다. ‘할리우드가, 우리 사회와 조직 문화가 그런 줄 언제는 몰랐나’ 싶어 무심하게 넘겼다. 한 독립 언론 매체의 ‘총수’가 #미투 운동 여파가 공작을 통해 진보진영으로 넘어올 수 있다며 정치적 견제구를 던지는 걸 봤을 때, 그때야 비로소 무언가가 나의 무신경한 회로를 멈추게 했다.
‘잠깐,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소셜미디어에 글을 올렸다. 개개인의 성폭력에 앞서, 이 사회의 왜곡된 권력관계와 그 속에 만연한 ‘권력변태’들이 좀 더 근본적인 문제라고.
이 짧은 공화국의 역사와 사회는 의기양양한 권력변태의 욕망을 소리 소문 없이 키워왔고, 표리부동한 영웅과 교주도 너무 많이 생산해 왔다. 가학과 위선으로 촘촘히 아로새겨진 권력의 그물망 속에서, 이름을 알 듯 모를 듯한 수많은 이가 최면에 홀린 듯 변태의 규칙에 굴종하며 하루하루 생활을 연명했으려니, 비명 없던 아우성은 행여 이들의 것이었을까.
수많은 기억으로 아로새겨진 대한민국의 중·고등학교, 군대는 남자가 같은 남자를 성추행할 수 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진리를, 바로 눈앞에 벌어지는 사실로 훈육했다.
대학에 가서야 접한 미셸 푸코의 ‘성의 역사’ 따위가 설파한 ‘성은 권력의 한 표현이자 양태’일 뿐이라는 금언은 한국 남녀의 일상 속에선 그저 싱거운 이야기일 따름이었다. 그렇게 싱겁도록 온몸과 영혼이 깎이고 깎여 이곳의 틀에 맞춰졌지만, 이제라도 외칠 수밖에. 우리의 형제자매 중 그 누구에게도 더 이상 손대지 말라고.
‘신동아’에서 투고 제의를 받고 잠시 망설였지만, #미투에 대한 내 나름의 소회를 정리하고 싶었다. 훗날 언젠가, 경악과 분노와 당혹감이 가라앉고 나서, 내가 그리는 보다 이상적인 사회상과 남녀관계에 대해 미리 피력하고 싶다. 아직 이런 말을 하기엔 이를지 모르지만, 난 #미투 이후의 사회에서는 한국 남녀들이 서로를 좀 더 성의 있게 잘 ‘꼬시려고’ 노력하게 되기를 희망한다.
지금처럼 주고받음 혹은 체념의 이유가 돈, 권력, 위계의 조건으로 간단히 환원되지 않았으면 한다. 남녀관계가 보다 순수하고, 건강하고, 현대적으로 변모하기를 바란다. 남녀 모두에게, 자신의 숭고한 인간됨의 값어치만큼 그 책임이 있다.
이런 얘길 내가 하고 있으니 좀 우습긴 하다. 청년 시절 다른 관심사에 매몰돼 있었고, 요령과 숫기도 없었던 나 같은 사람이 보다 평등하고 당당한 상호관계 속에 젊음의 에너지가 넘치는 기쁨의 땅에서 ‘짝짓기’를 제대로 할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다. 저승사자님, 여기 ‘홀로 생을 마감할 독거노인’ 한 명 추가요.
그래도 희망한다. 적어도 우리 아이들만이라도, 이기심과 권력에 대한 갈증이 아닌, 자신과 다른 타자를 새롭게 경험해보고자 하는 열린 마음과 상호 신뢰로 사랑의 모험을 떠날 수 있게 되기를. 인격적 삶에 대한 냉소를 품은 ‘현실적 조건’이 아닌, 가능성에 대한 자신감과 서로의 성장에 대한 가슴 두근거리는 ‘꿈’을 실현해나가기를. 그리 멀지 않은, 훗날 언젠가.
김도훈
● 1976년 서울 출생
● 연세대 인문학부 졸업
● 영국 런던정경대(LSE) 석사, 서섹스대 박사
● 성균관대 소비자가족학과 겸임교수
● 데이터 기반 전략 컨설팅 업체 ‘아르스 프락시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