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속과 무관한 것은 하나도 없다. 현대인이 좀체 이해하기 어려운 ‘형사취수(兄死娶嫂)’, 즉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는 고대의 풍습도 상속과 깊은 관련이 있다. 비교적 가까운 19세기 중반까지도 이혼이 사실상 금지됐는데, 그 이면에는 ‘지참금’이라는 또 다른 관행이 숨어 있다.
바실리 페로프, ‘불평등한 결혼(The Unequal Marriage)’, 1862,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소장
고대 유대 사회도 예외가 아니다. 유대의 전통에 따르면, 형제의 아내와 성적으로 관계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된다(‘레위기’ 18장 16절). 그러나 예외적인 경우에는 형사취수가 허용된다. ‘신명기’ 제25장 5,6절에 다음과 같은 취지의 글이 있다.
형제 가운데 누군가 죽었는데, 아들이 없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죽은 형제의 아내는 시집을 떠나 다른 가문에 시집가는 법이 없다. 남편의 형제들 가운데 한 사람이 그 형수를 아내로 맞이하는 것이 옳다. 그리하여 그 여성이 재혼관계에서 얻은 큰아들은, 이미 죽은 형제의 아들로 삼아야 한다. 이로써 죽은 형제의 혈통이 대대로 보존되게 할 일이다.
알고 보면 히브리 사회에서 형사취수의 전통은 뿌리가 매우 깊다. ‘창세기’ 제38장 8절에도 유사한 내용이 발견된다. 유다의 둘째 아들 오난은 자식을 두지 못하고 일찍 죽은 형의 혈맥을 이어주기 위해 미망인이 된 형수와 관계를 맺는다. 이러한 행위는 유대의 오랜 전통이었다.
성서 연구자들은 형사취수 제도의 경제적 의미를 강조한다. 이 결혼에서 태어난 큰아이는 사망한 혈통상의 아버지가 가졌던 세습 권리를 물려받았다. 정확히 말해, 망자(亡子)가 큰아들이었을 경우에 그 아이의 상속분은 망자가 받을 몫의 두 배로 오히려 확대된다. 이로써 망자의 가문이 별문제 없이 유지될 수 있었다. 망자의 부인 역시 시동생과 재혼함으로써 여생을 걱정 없이 살 수 있다.
형사취수 제도가 강제 결혼은 아니었다. 형수든 시동생이든 어느 한쪽이 그 결혼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으면 ‘할리차(halitzah)’라는 의식을 거행함으로써 형수에 대한 부양 의무를 포기할 수 있다.
일종의 ‘사회보장’ 제도
유대 사회도 그렇지만, 형사취수 제도는 족내혼의 전통이 강한 사회에서 성행했다. 그런데 유대 사회와는 달리 대개의 경우 망자의 부인이 죽은 남편의 형제들 가운데서 배우자를 선택할 권리를 가졌다. 누구든 망자의 부인의 점지를 받으면 반드시 그녀와 결혼해야 했다.이 점에서 2세기말, 고구려 왕실에서 일어난 한 가지 사건이 주목된다. 고국천왕(재위 179~197)이 후계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당장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잡음이 크게 일어났다. ‘삼국사기’는 그 책임을 왕비 우씨에게 전가한다. 우씨는 왕의 사망 소식을 숨긴 채 야밤에 시동생 발기와 연우의 처소를 차례로 방문했다. 자신의 재혼 상대자를 스스로 물색한 것이다.
‘삼국사기’는 우씨의 이러한 처사를 맹비난한다. 발기의 입을 빌려, 우씨는 남녀 간의 예절도 모르고, 왕위의 결정이 하늘의 뜻에 달려 있다는 이치도 모른다고 했다. 그날 밤 발기는 우씨의 결혼 제의를 거절했기 때문에 왕좌를 놓치고 만다.
우씨의 처사를 유교적 도덕 기준으로 재단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우씨의 입장에서 보면 억울할 만하다. 그녀의 심야 방문은 왕비족 전체의 정치적 명운이 달린, 그야말로 막중한 협상이다. 고국천왕의 둘째 아우 연우(산상왕· 재위 197~227)는 옥좌에 오르면서 우씨를 왕비로 선택했다. 말 그대로 형사취수한 것이다.
권력 싸움에 진 발기는 형수의 패륜을 탓하며 반란을 꾀했지만 실패한다. 그는 적국 한나라로 망명해 재기를 노리지만, 그것 역시 실패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런 비극의 씨앗이 우씨라는 여성의 잘못이라고 할 순 없다. 그것은 당사자 개개인의 이해관계와 한·중 양국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맞물려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은 독립된 경제 주체로 활동하기가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남편이 일찍 사망했고, 설상가상으로 단 한 명의 아들도 남기지 못했다면, 여간 큰 타격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형사취수 제도는 망자의 부인을 위한 든든한 사회보장제도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느 나라에서든 형사취수 결혼에서 태어난 장남은 망자의 가계를 계승했다. 그는 망자의 상속분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생부(生父)의 재산에 대해서는 상속권이 없었다. 예외는 있다. 만약 생부가 별도의 재산을 그 아들에게 주기를 원할 경우 사회가 이를 허가했다.
형사취수 제도는 일차적으로 혈손이 끊어진 형제의 가문을 지속시키려는 사회적 장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뜻밖에 경제적 위기로 내몰린 여성의 생존권을 보장하려는 공동체의 노력이기도 하다. 이 문제를 더 깊게 파고들면, 여성의 결혼지참금에 관한 사회적 합의이기도 하다. 신부가 결혼 당시 가져온 지참금이 끝까지 신랑 집안의 재산으로 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서양에서도 이혼은 쉽지 않았다. 이혼은 공공의 이익에 반대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부부 중 일방이 ‘순결의 의무’를 저버렸다는 점이 명백할 때만 이혼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하늘이 맺은 것을 사람이 풀지 못한다.’ 이런 기독교 정신이 지배적이었다. 이혼을 가로막는 현실적 장애 요인은 신부가 결혼식 때 가져온 막대한 지참금이었다. 누구도 그 재산을 선뜻 돌려주려고 하지 않았다.
헨리 8세가 이혼하려던 까닭
헨리 8세와 앤 불린을 그린 풍자화, 1728, 영국박물관 소장
그들의 결합은 교회법상 근친상간에 해당한다. 그런데도 로마 교황 율리우스 2세(재위 1503~1513)는 한쪽 눈을 감았다. 그들의 결혼은 합법적인 것이 되었다. 그러나 얼마 뒤 중대한 문제가 발생한다. 왕비 캐서린의 소생은 메리 공주만 살아남았다. 게다가 캐서린은 나이가 들어 왕자의 출생을 기대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헨리 8세와 측근들의 고뇌가 깊어졌다. 만일 메리 공주를 유럽의 다른 왕가에 시집보내면 장차 영국의 왕위 계승권이 그쪽으로 넘어갈 것이었다. 헨리 8세가 후사를 정하지 못하고 사망한다면, 왕위계승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영국은 왕위를 물려받을 왕자가 필요했다. 헨리 8세는 이혼을 서둘렀으나, 교황청의 입장은 난처했다. 첫째, 전임 교황이 예외적으로 그들의 혼인을 허락했는데, 이를 번복하자니 교황청의 체통이 손상된다. 둘째, 캐서린의 친정 조카 카를 5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스페인 국왕이다. 그가 이혼에 반대했기 때문에, 교황청은 정치적으로 부담을 느꼈다.
애당초 헨리 8세는 교황파로 분류됐다. 독일의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자 이에 강력히 반발한 이가 헨리 8세다. 당시의 교황 레오 10세(재위 1513~1521)는 헨리 8세의 태도에 감명을 받아, ‘신앙의 보호자’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그러나 이혼 문제로 사정이 달라졌다. 헨리 8세는 종교개혁을 원하는 일부 성직자 및 귀족들의 지지에 기대 ‘수장령(Acts of Supremacy)’을 선포했다. 이에 일부 귀족들이 반발했다. 대법관으로서 신교도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토머스 모어와 존 피셔 주교가 대표적이었다. 모어는 ‘유토피아’의 저자로 우리에게 알려진 유명한 작가다. 성난 헨리 8세는 모어 등을 처형했다. 크게 실망한 교황 클레멘스 7세(재위 1523~1534)가 헨리 8세를 파문했다.
영국 왕도 가만있지 않았다. 그는 영국의 가톨릭 수도원을 해산했다. 국토의 6분의 1을 차지했던 수도원의 토지가 한순간에 교황의 통제를 벗어나 국왕에게 귀속됐다. 교황청과 왕권의 대립은 극한에 도달했다.
사실 헨리 8세의 종교적 성향은 무난했다. 그는 인문주의자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와 유사했다. 교리상으로는 교황청과 충돌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이혼 문제로 교황청과 대립하다 ‘영국국교회’의 독립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그는 자신의 마음대로 앤 불린(재위 1533~1536)과 재혼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헨리 8세는 전후 6명의 왕비를 맞이해 둘은 참수하고 둘은 추방하는 등 결혼 생활이 순탄하지 못했다. 그토록 염원하던 왕자도 얻지 못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열 명의 왕자보다 믿음직한 한 명의 공주가 있었다. 처녀왕 엘리자베스 1세(재위 1558~1603)다. 그녀가 통치한 45년 동안 영국은 유럽 최강국의 지위를 확보했다.
여성의 ‘이혼권’ 보장한 이슬람
유대 사회 등 족내혼 전통이 강한 사회에서 형사취수가 성행했다. 렘브란트의 작품 ‘유대인 신부’(1665~1669, 암스테르담국립박물관 소장).
1670년 영국 의회는 존 매너즈 경과 앤 피에르퐁 부인의 이혼을 인정했다. 1752년 프러시아(독일)의 계몽군주 프리드리히 2세(재위 1740~1786)는 결혼을 사적인 계약이라 못 박았고, 이혼을 허락하는 법률도 제정했다. 프랑스에서도 대혁명 이후에는 이혼이 합법화됐다. 1809년, 나폴레옹 황제(재위 1804~1815)는 황후 조세핀과 이혼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상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이혼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영국에서는 이혼소송비가 200파운드였다. 평범한 시민들로서는 만져보지도 못할 거금이었다.
게다가 19세기 중반까지도 유럽의 여성들은 법적, 경제적으로 독립된 존재가 아니었다. 법률은 배우자의 간음, 유기 행위, 또는 잔인함을 이유로 이혼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그러나 사회적 약자인 여성들로서는 법의 혜택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이슬람문화는 달랐다. 그들은 중세부터 여성에게도 이혼할 권리를 인정했다. 여성도 얼마든지 이혼 소송을 제기할 수 있었다. ‘코란’이 보장하는 떳떳한 권한이었다. 여성은 이혼에 따른 물질적 보상을 요구할 수도 있었다.
배우자인 남성이 생활비를 제대로 가져오지 않거나, 성적으로 나태할 경우에 이혼을 요구할 수 있었다. ‘성적 나태한 경우’란 부부 사이에 4개월 이상 성관계가 없을 때를 말한다. 이 밖에도 남편이 아내를 정신적, 육체적으로 학대하거나 남편이 다른 여성과 결혼을 원하는 것이 분명할 때도 아내는 이혼 소송을 청구할 수 있었다.
‘이슬람 성법’(샤리아)은 이혼의 범주를 다양하게 정의했다. 의절을 비롯해 협의 이혼, 재판상이혼, 또는 서약으로 세분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혼이 법률적 효력을 발휘하기에 앞서 3개월의 숙려 기간을 설정하기도 했다. 이슬람 문화에는 우리가 전혀 상상하지 못한 놀라운 점들이 있다.
지참금을 지켜라
생각해보면 영국 왕실은 스페인 공주 캐서린이 가져온 막대한 지참금을 탐냈기 때문에 남편이 죽은 그녀를 헨리 8세와 결혼시킨 거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부의 지참금은 여성의 이혼 및 재혼을 가로막는 사회적 장치였다.전통 시대 중국에서는 시집가는 딸에게 다양한 형태의 지참금을 지급했다. 지참금은 토지, 보석, 현금, 의복, 바느질 도구, 생활용품 등 매우 다양했다. 지참금은 딸에게 주는 일종의 상속이었다. 지참금을 지급하고 남은 재산은 아들들에게 골고루 나눠주거나, 그들이 공동으로 이용하게 했다.
중국 여성들은 지참금으로 가져온 재물을 처분할 권리가 있었다. 그들은 시집이 경제적 위기에 처하면 그것을 매각해 집안을 도왔다. 가져온 지참금이 많으면 많을수록 가정 내에서 여성의 지위는 높았다. 조선 시대에도 이와 같은 풍속이 있었다.
사정은 유럽도 비슷했다. 각국의 왕실과 명문 귀족들은 딸에게 막대한 지참금을 줬다. 1661년 포르투갈 왕실은 캐서린 공주를 영국의 찰스2세(1660~1685)에게 시집보내면서 지참금으로 인도와 모로코의 2개 도시를 주었다. 수녀원에 딸을 들여보낼 때도 지참금을 들려 보냈다. 또 집안을 계승할 아들이 없으면 사위에게 집안의 토지를 몽땅 물려주면서 대신에 처가의 성(姓)을 쓰도록 요구했다.
시집갈 딸에게 지참금을 지급하지 않으면 약혼이 취소된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슬픈 리어왕’에도 당시의 그런 풍습이 반영돼 있다. 극 중 리어왕이 막내딸 코딜리어에게 의절을 선언하자 공주에게 청혼했던 버건디 공작은 지참금 없는 그녀를 데려갈 수는 없노라고 한 것이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인들은 지참금이란 딸에게 미리 재산을 상속하는 것쯤으로 이해했다. 미처 지참금을 받지 못한 딸들은 어떻게 됐을까. 그들은 아버지가 사망하면 영지를 상속할 수 있었다. 만약 결혼한 부부가 자손을 낳지 못했을 경우, 아내의 지참금은 그들의 사후에 친정에 귀속됐다. 이 점은 조선 시대의 풍습과 일치한다.
흥미롭게도 크리스마스 때 선물을 나눠주는 것으로 유명한 니콜라스 성인은 본래 양말에 황금을 넣어줌으로써 가난한 여성이 결혼지참금을 마련할 수 있도록 도왔다고 한다. 니콜라스는 터키가 아직은 기독교 사회였을 당시 자선 행위로 이름난 가톨릭교회의 주교다.
산업혁명이 풀어준 ‘족쇄’
일찍이 맹자는 ‘일정한 재산이 있어야 사람의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有恒産 有恒心)’고 말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가난한 사람들로서는 꿋꿋한 지조를 지키기가 어렵다는 뜻이다.과연 물질적 안정은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다. 생산성이 낮은 사회일수록 재산 상속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산업혁명 이후 생산성이 꾸준히 개선되고 소득이 대폭 증가한 것은 참으로 다행이다. 그로 인해 인권의식이 강화돼 우리는 과거의 족쇄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게 되었으니 말이다.
백승종
● 1957년 전북 전주 출생
● 독일 튀빙겐대 철학박사
● 서강대 사학과 교수, 독일 튀빙겐대 한국 및 중국학과 교수,
프랑스 국립고등사회과학원 초빙교수
● 現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 저서 : ‘백승종의 역설’ ‘마흔 역사를 알아야 할 시간’
‘금서, 시대를 읽다’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조선의 아버지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