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호

명사에세이

좋은 추억이 만든 속 편한 밥상

  • 입력2018-06-13 17: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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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자연주의자다. 도시에서 텃밭을 가꾸고 직접 기른 채소로 요리하는 걸 즐긴다. 얼마 전엔 비건 오트밀 쿠키를 만들었다. 오트밀을 섞어 식감이 고소하고, 포만감을 주는 쿠키였다. 그런데 한동안 식단 관리를 제대로 못 해서인지 밀가루가 들어간 그 쿠키를 먹자 곧 속이 더부룩해졌다. 작은 쿠키 3개를 먹은 뒤 소화가 잘 안 돼 저녁 내내 기분이 불쾌했다. 

    바로 다음 날 함께 요리 이야기를 자주 하는 동네 친구를 만났다. 마침 오트밀 쿠키가 남아 친구에게 대접했다. 그런데 그가 맛있게 먹는 걸 보고 있자니 속이 불편할 걸 알면서도 자꾸만 눈이 갔다. 더 참다가는 친구 이야기가 하나도 들리지 않을 것 같아 결국 쿠키에 손을 댔다. 신기하게도 이번엔 배가 아프거나 속이 더부룩하지 않았다. 몸이 마법을 부린 것처럼 신기했다.
     
    나는 파스타나 피자 같은 밀가루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역시 소화가 잘 안 될 것 같아서다. 그런데 한번은 전 직장 동료를 만나러 파주 출판단지에 갔다가 ‘핫하다’는 브런치 카페에 가게 됐다. 테이블에 오른 파니니와 필라프를 보며 ‘저걸 먹으면 속이 불편할지도 몰라’ 하고 내심 걱정했는데, 그날은 평소와 달리 정말 속 편하게 모든 메뉴를 먹어치웠다. 심지어 평소보다 좀 많이 먹었는데도 소화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

    마음이 즐거워야 속도 편하다

    나는 살면서 이처럼 앞뒤가 맞지 않는 몸의 반응을 자주 느끼곤 했다. 같은 메뉴도 어디서 누구와 무슨 대화를 하며 먹느냐에 따라 소화 정도가 달라진다. 대체 내 몸의 반응은 왜 한결같지 않고 이렇게 변덕스러운 걸까. 

    ‘음식의 심리학’이라는 책에는 ‘마음에 이르는 길은 위장을 경유한다’는 대목이 있다. 나는 ‘위장에 이르는 길’ 또한 ‘마음’을 경유한다고 믿는다. 우리의 소화력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음식 온도, 영양소, 재료의 궁합, 조리법, 염도 등이 전부가 아니다. 입으로 들어가 위장에서 소화되지 않는 것들, 예를 들면 함께하는 사람, 장소, 분위기, 대화 주제, 식탁에 놓인 꽃, 향, 음악 같은 것들이 소화에 많은 영향을 미치곤 한다. 

    예민한 사람이라면 음식 외의 요인이 소화에 더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매력적인 장(腸) 여행’이라는 책에 따르면 모든 스트레스는 소화 방해 신경을 자극한다. 스트레스에는 걱정도 포함된다. 혼자서 뭔가 먹을 때는 걱정할 일이 많아진다. 내가 ‘밀가루 음식인데 소화가 잘 안 되지 않을까?’ ‘고기를 먹으면 체하지 않을까?’하고 우려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 공포는 같이 먹는 사람이 있을 때 상대적으로 옅어진다. 대화 주제가 즐거운 것이면 더욱 그렇다. ‘매력적인 장 여행’의 저자는 장은 비슷한 상황에서 느낀 기분을 저장했다가 필요할 때 꺼내 쓴다고 말한다. 그래서 가정에서 밥을 먹을 때는 사랑이 가득 느껴지는 분위기가 필요하다. 어린 시절 특정 음식을 먹던 날 식탁 분위기가 강압적이고 무섭다고 느낀 아이는 어른이 된 뒤에도 그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될 수 있다. 그것이 건강에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아도 말이다. 

    직장인이라면 상사와 밥을 먹다 체할 것 같은 기분을 느껴본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런 경험을 집이나 직장에서 자주 한 사람은 식사를 즐길 수 없게 된다. 그럴수록 자극적인 맛을 찾고 결국 식습관이 나빠지게 마련이다. 

    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니 대한민국 직장인 절반 이상이 가족이나 직장 동료와 식사하면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10분도 채 되지 않는다고 한다. 요즘엔 스마트폰 때문에 대화 부족이 더 심해졌다. 치즈나 매운 소스로 범벅이 된 요리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뒤덮은 것을 보면 사람들이 더 이상 삼삼한 식사에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에 좋은 추억을 선물하는 법

    나는 20년 넘게 쌀밥을 좋아하지 않았다. 돌아보면 20대 후반까지 쌀에 대한 좋은 추억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서 요리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평범한 쌀과 반찬에 대한 좋은 추억이 많이 생겼다. 햇살이 비치는 책상에서 밥을 먹거나, 갓 지은 쌀밥을 남편과 먹으며 즐겁게 이야기하던 순간 같은 것들 말이다. 이후 나는 속을 편안하게 하는 식습관을 갖게 됐다. 

    좋은 사람과 나누는 따뜻하고 즐거운 대화는 우리 장에 좋은 추억을 선물한다. 그리고 우리는 때때로 그 상황에서 먹은 것과 비슷한 음식을 먹을 때 다시 그것을 즐겁게 맞이할 준비를 하게 된다. 

    식탁에서 나누는 대화가 식사에 대한 집중력을 떨어뜨릴 수 있을 것이다. 말하면서 먹다 보면 입으로 공기가 평소보다 많이 들어가 방귀나 트림 등을 발생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공기가 들어올까 입을 다무는 것보다는 좋은 사람과 즐거운 대화를 하며 밥을 먹는 것이 우리에게 더 큰 즐거움과 생명력 넘치는 삶을 선물해줄 것이라고 확신한다. 

    가수 자이언티의 노래 중 ‘꺼내 먹어요’가 있다. ‘배고플 땐 이 노래를 아침 사과처럼 꺼내 먹어요. 피곤해도 아침 점심 밥 좀 챙겨 먹어요. 그러면 이따 밤에 잠도 잘 올 거예요’라는 노랫말을 나는 자주 중얼거리곤 한다. 

    이 노래처럼 우리에게도 장이 맛있게 꺼내 먹을 식사의 추억이 필요하다. 그런 추억이 너무 까마득해서 잘 기억나지 않는다면 이제부터라도 좋은 추억을 차곡차곡 쌓아보는 것이 어떨까. 좋은 추억이 많아지면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것도 많아진다. 식사가 더는 두렵지 않게 된다. 그리고 언젠가 밤에 잠이 잘 오고, 소화가 잘되고, 사는 게 행복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분명 올 것이다.


    박민정
    ● 1987년 광주 출생
    ● 조선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 서울대안학교 ‘성장학교 별’ 별지기
    ● SNS ‘꾸미의 맛있는 이야기’ 운영, ‘서른의 식사법’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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