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호

금융 이슈

자금세탁방지 ‘비상’ 걸린 은행들

“특명! 미국이 오케이할 때까지”

  • 입력2018-06-24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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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깐깐해진 美 금융당국…국내 은행들, 감사 앞두고 ‘초긴장’

    • 앞다퉈 자금세탁방지 조직 키우고 인력 늘리고

    • 기업은행 연루 이란자금 불법 유출이 촉발한 사태?

    • 은행에 전문 인력 부족? “금융 당국에도 전문가 없어”

    “국내 일부 은행이 외국에서 벌금을 맞았는데, 이는 국내 한두 은행의 문제가 아니다. 최고경영진부터 경각심을 갖고 자금세탁방지(AML·Anti-Money Laundering) 체제를 갖추는 데 힘써달라.” 

    5월 28일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서울 명동 은행연합회관에서 은행장들을 만나 이같이 당부했다. ‘외국에서 벌금 맞은 국내 은행’은 NH농협은행이다. 지난해 연말 NH농협은행은 미 뉴욕 금융감독청(DFS)으로부터 자금세탁방지 의무 위반으로 1100만 달러(약 118억 원)의 과태료를 부과받았다. 

    자금세탁방지란 금융기관이 불법자금 세탁을 적발·예방하는 활동을 말한다. 각 금융사는 자체적으로 자금세탁방지 체제를 갖추고 금융·사법당국, 그리고 국제사회와 협력한다. 한국은 2001년 금융위원회 산하에 금융정보분석원(FIU)을 설립하며 자금세탁방지제도를 도입했다. 2008년에는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FATF·Financial Action Task Force)에 정회원으로 가입했다. FATF는 자금세탁방지 관련 국제 기준을 제정하고, 세계 각국의 기준 이행을 감독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산하 독립기구다. 

    국제적으로 자금세탁방지 기준이 강화되고 관련 제재 또한 엄중해지자, 국내 은행들은 자금세탁방지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요즘이다. 금융감독원은 올 초 ‘자금세탁방지실’을 신설하고, 2018년 중점 검사사항 중 하나로 자금세탁방지 체제 점검을 꼽았다. 금융회사들의 자금세탁방지 업무 체계 및 운영 실태뿐만 아니라, 해외 점포의 현지 자금세탁방지 법규 준수 여부, 본점의 해외점포 관리 실태 등을 검사하겠다는 것이다.

    2년치 수익, 과태료로…

    자금세탁방지 체제를 강화하는 움직임은 특히 뉴욕 금융시장에 진출한 은행 위주로 두드러진다. NH농협은행이 뉴욕 DFS로부터 과태료를 부과받자 비상이 걸린 것. 뉴욕 DFS는 오는 7월부터 한국계 은행 현지 점포를 대상으로 전면적인 감사를 벌일 예정이다. 현재 KB국민, 신한, KEB하나, 우리, 기업, NH농협은행과 산업은행, 수출입은행이 뉴욕에서 현지 법인 혹은 지점을 운영하고 있다. 



    이들 은행은 본점의 자금세탁방지 담당 인력을 많게는 10명까지 늘렸다. 신한은행과 우리은행이 32명으로 가장 많고, KB국민은행 26명, KEB하나은행 21명, NH농협은행 21명, 기업은행 17명 수준이다. KB국민은행은 법무실 산하 자금세탁방지팀을 별도 ‘자금세탁방지실’로 격상했다. NH농협은행은 준법감시부 내 자금세탁방지단을 ‘자금세탁방지센터’로, 기업은행은 준법지원부 내 자금세탁감시팀을 별도 ‘자금세탁감시부’로 확대했다. KB국민은행은 아예 금융위 출신 변호사를 신규 채용해 법무실이 아닌 자금세탁방지실에 배치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이 같은 은행의 노력이 “내년 실시되는 FATF 평가에 대비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미국 금융당국의 눈높이를 맞추기 위한 고육지책”이라고 전했다. 한국의 은행들이 미국 금융당국 측에 ‘뉴욕 점포의 규모가 작아 미국 금융회사 수준으로 자금세탁방지 체제’를 갖추기 어렵다고 호소했더니, 봐주기는커녕 한국 본점의 자금세탁방지 체제의 미비함을 거론하며 본점부터 강화할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금감원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은행들이 미국 시장에서 벌어들인 당기순이익은 7200만 달러(약 780억 원). 총 당기순이익(11조2000억 원)의 0.67%에 불과하다. 그러나 미 금융당국은 이익 규모에 관계없이 모든 은행 점포에 동일한 수준의 자금세탁방지 체제를 요구한다. 이를 따르지 않을 경우 과태료는 어마어마한 수준이다. NH농협은행이 물어낸 과태료 1100만 달러는 이 은행 뉴욕지점의 2년치 수익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알려진다. 미 금융당국은 2016년 8월 대만 메가뱅크(Mega Bank)에 역시 자금세탁방지 체계 미흡을 이유로 NH농협은행보다 16배 많은 1억8000만 달러(약 1950억 원)의 벌금을 부과한 바 있다.

    기업은행, “아직도 조사받는 중”

    미국은 자국 소재 금융회사에 자금세탁방지 의무 준수를 강하게 요구하고 검사를 엄격하게 실시한다. 그간에는 주로 글로벌 대형 은행이 주요 검사 대상이었고, 명백하게 의무 위반 행위를 한 사실이 드러날 경우 강력한 제재를 해왔다. 대표적인 예가 이란 등 제재 대상국과 거래한 사실이 적발된 BNP파리바와 HSBC에 각각 89억7000만 달러(약 9조7000억 원·2014년)와 19억2000만 달러(약 2조700억 원·2012년)의 벌금을 부과한 것이다(이 두 금융회사가 받은 벌금을 합친 금액은 국내 은행들의 1년치 당기순이익 총합과 맞먹는다). 

    이러한 미 금융당국의 ‘레이더망’은 2,3년 전부터 아시아계 은행을 대상으로 확대되는 추세다. 미국에서 점포를 운영하는 이들 은행이 자금세탁방지 관련 내부통제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고, 운영 수준이 적합한지 등을 검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FIU는 지난해 11월 간담회를 열고 “미 당국은 한국계 은행의 일부 뉴욕 지점 혹은 법인이 내부통제 시스템을 보완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보는 것 같다”며 각 은행 준법감시인들에게 주의를 당부했다.
     
    일부 국내 금융계 전문가는 미국에서 존재감이 미미한 한국계 은행들에까지 미 금융당국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게 된 계기에 대해 자신들이 조사 중인 1조900억 원대 '이란자금 불법유출 사건'에 기업은행이 이용됐다는 의혹이 일면서부터라고 말한다. 국내 시중은행 준법감시 책임자 A씨는 “DFS가 이 사건에 대한 미 연방검찰 수사에 협조하면서 기업은행의 자금세탁방지 체제를 들여다보기 시작했고, 그 수준이 미 당국의 기준에 못 미치자 감사 대상을 전체 한국계 은행으로 확대하면서 자금세탁방지 체제 강화에 비상이 걸린 것”이라고 전했다. 

    사건은 이렇다. 2011년 미 시민권자인 재미교포 정모(70대) 씨는 두바이 대리석을 이란에 판매하는 중계무역 형식을 가장해 기업은행에 예치된 이란 측 자금 1조948억 원을 수령했다. 그리고 그중 1조700억 원을 자신의 아들 명의 미국 회사 등 여러 군데로 나눠 송금했다. 이란 측 자금이 불법적으로 미국 등지로 빠져나간 것이다.
     
    2010년 미국은 ‘세컨더리 보이콧(Secondary Boicott)’을 발효했다. 이란 원유를 수입하는 제3국과 미국 기업이 거래할 수 없도록 하는 제3자 제재 조항이다. 그러나 이란으로부터의 원유 수입량이 10~15%에 달하는 한국은 예외다. 미국의 승인을 얻어 ‘이란 원화결제 시스템’이 새로 도입됐다. 한국-이란 간 무역 상품(원유, 전자제품 등)은 국경을 오가지만, 거래대금은 한국 내 개설된 이란 측 원화 계좌에 쌓일 뿐, 한국 밖으로 송금되지 않는다. 그런데 정씨가 가짜 무역 서류를 동원해 이 원화 계좌에 있는 거액을 반출, 미국 등으로 유출한 것이다. 

    한국 검찰은 2013년 정씨를 외국환거래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 기소하고, 기업은행에 대해서는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은 보도자료를 통해 “기업은행 관계자들이 공모하거나 범행을 묵인한 것은 없는 것으로 파악되었고, 결국 정씨에게 속아서 업무를 처리해준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그러나 미 연방검찰은 기업은행 수사에 대한 결론을 아직 내리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다. 기업은행 측은 “미국 금융당국이 이란 송금 건에 대해 현재도 조사하는 중이며, 기업은행은 미 당국이 자료를 요청하면 성실하게 제공하고 있다”며 “이 사건과 관련해 미 현지에서 기업은행이 재판을 받는 일은 없다”고 말했다.

    美에서 퇴출? 절대 안 될 일

    뉴욕 월가. 뉴욕 금융감독청(DFS)은 최근 한국계 은행들을 대상으로 자금세탁방지 의무 관련 감사를 강화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뉴욕 월가. 뉴욕 금융감독청(DFS)은 최근 한국계 은행들을 대상으로 자금세탁방지 의무 관련 감사를 강화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국내 은행들이 자금세탁방지 관련 조직과 인력 규모를 확대하고는 있지만, 글로벌 수준에 이르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자산 규모가 국내 은행보다 한참 작은 한국씨티은행이나 SC제일은행은 자금세탁방지 업무에 100여 명의 인력을 투입한다. 한국씨티은행 측은 “준법감시본부 산하에 26명으로 구성된 준법감시부와 AML팀이 있고, 별도 AML 조직인 자금세탁방지모니터링팀에서 80여 명이 근무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자금세탁방지 의무는 금융기관이라면 필수적으로 준행해야 하는 업무”라며 “비용을 떠나 해당 국가 감독기관이 요구하는 수준을 만족하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내 금융계에선 자금세탁방지 전문인력 양성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2000년대 중반부터 자금세탁방지 등 준법감시 업무를 해온 한 인사는 “3~5년마다 본점과 영업점을 오가는 순환근무 때문에 오랫동안 자금세탁방지 업무를 맡아온 전문인력이 매우 드물다”며 “은행의 인사제도부터 달라져야 한다”고 말했다. 금융당국의 역량 강화도 필요한 대목이다. 한 시중은행 임원 출신은 “금융위원회나 FIU 담당자가 1,2년마다 교체되는 것이 현실”이라며 “자금세탁방지 분야를 발전시켜 나가려면 정부와 금융업계가 일관되고 지속적으로 소통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금융당국자의 전문성 강화가 필수적”이라고 지적했다. 

    국내 은행들의 자금세탁방지 체제 강화는 ‘미국이 오케이(OK)할 때까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한 준법감시 전문가는 “미국 금융당국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해 최악의 경우 미국 금융시장에서 퇴출된다면 미 달러, 즉 기축통화를 취급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전 세계 금융시장 어디에서도 사업을 할 수가 없다”며 “비용이 얼마가 들든 미 금융당국을 만족시키는 것이 국내 시중 은행들의 당면 과제”라고 말했다.

    TIP
    자금세탁방지(AML) 체제의 구성

    자금세탁방지 체제는 크게 3가지로 구성된다.
    ▲고객주의 의무 ▲혐의거래 보고 ▲고액 현금거래 보고다.

    고객주의 의무(CDD·Customer Due Diligence)
    금융기관의 서비스가 자금세탁 등 불법행위에 이용되지 않도록 고객의 신원, 실제 당사자 여부, 거래 목적 등을 금융기관이 확인하는 것.

    혐의거래 보고(STR·Suspicious Transaction Report)
    특정 범죄의 자금세탁과 관련된 혐의 거래, 탈세 목적의 혐의 거래, 혹은 합리적인 의심이 들 경우 해당 금융거래를 FIU에 의무적으로 보고하는 것.

    고액 현금거래 보고(CTR·Currency Transaction Report)
    한 은행에서 1일 현금 거래량이 2000만 원 이상일 때 보고하는 제도. 혐의거래 보고를 보완한다. 금융기관은 이 세 개의 체계가 효율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내부 규정, 조직, 관련 감사 체계 등을 수립해 구축·운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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