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안 마누엘 산토스 콜롬비아 대통령과 나는 영어본과 스페인어본 형집행협정에 서명했다. 아뿔사. 나중에 확인하니 영어본에는 없는 내용이 스페인어본에 들어 있는 게 아닌가. 외교 문서를 변조하는 작태에 어안이 벙벙했다. 국제형사재판소 소장으로 세계 각국에 출장을 가 받은 인상은 사람들의 태도나 수준이 1인당 국민소득과 대체로 비례한다는 것이다. 내가 방문한 나라를 흉보려는 게 아니라 한국은 어떠한지 알 수 있는 지표이기에 되돌아본다.
2010년 5월 내전 피해가 큰 우간다의 글루를 방문했다.
2010년 방글라데시라는 대어를 낚았다. 내가 물밑에서 계속 진행한 회원국 배가 노력이 결실을 본 것이다. 2011년엔 말레이시아 필리핀 몰디브를 회원국으로 확보했다. 체코, 몰도바 등 동유럽 국가가 꾸준히 가입했으며 아프리카의 세이셸과 카리브해의 그레나다도 합류했다.
2011년에는 튀니지가 가입해 마그레브(리비아 ·튀니지 ·알제리 ·모로코 등 아프리카 북서부 일대) 지역에서 첫 테이프를 끊었다. 이집트, 카타르와 접촉하면서 아랍 국가의 로마조약 비준을 위해 노력 중이다.
생명의 위험 무릅쓴 아프리카 출장
국제형사재판소 소장으로서 유일하게 ICC 관할 범죄가 일어난 나라와 지역을 찾았으며 현장사무소를 방문해 우리 직원들을 위로했다. 아프리카는 회원국 수가 가장 많은 반면 ICC에 관한 잘못된 지식이나 과잉 기대를 토대로 우리를 비난하는 일이 비일비재해 참 다루기 어렵고 신경을 써야 하는 지역이다.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방문해야 하는 곳도 적지 않다.2009년 6월에는 국제형사재판소를 지지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시작으로 탄자니아, 보츠와나, 레소토를 방문했다. ICC가 수단의 현직 대통령에게 구속영장을 발부한 것과 관련해 서구의 앞잡이라느니, 이중 잣대로 처벌한다느니 하는 비난이 아프리카에서 거세게 일어날 때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넬슨 만델라의 정신에 따라 대체로 국제형사재판소를 지지해왔으며 보츠와나도 ‘왕따’를 무릅쓰고 아프리카에서 가장 강력하게 ICC에 대한 지지를 천명했다. 레소토도 보츠와나와 견해가 같았다. 다만, 보츠와나·레소토가 너무나 작은 나라여서 아프리카에서 영향력이 약하다는 게 흠이었다.
남아프리카 지역 순방을 끝내고 수개월 뒤 현지 직원들이 위험하다면서 반대하는데도 콩고민주공화국, 우간다 등을 방문했다. 각 나라 고위층과 전쟁범죄로 피해를 입은 주민에게 국제형사재판소를 올바르게 알리고 전쟁 탓에 피폐해진 이들을 위로하기 위한 여정이었다. 병을 옮기는 모기와 세균, 유엔에서 빌린 낡은 비행기와 헬리콥터의 추락 위험, 반군의 저격 위험, 음식과 숙박시설의 불편함을 무릅쓰고 방문을 강행했다.
2010년은 국제형사재판소가 탄생한 지 7년째 되는 해다. 로마조약은 7년마다 회고와 전망을 하는 ‘리뷰 콘퍼런스’를 개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필이면 전쟁 범죄가 발생한 우간다가 이 회의를 개최하겠다고 한 게 마뜩지 않았으나 5월 31일부터 6월 12일까지 우간다에서 열린 리뷰 콘퍼런스는 성황리에 마무리됐다.
나는 CICC, PGA, HRW 등 세계적 NGO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으며 그들을 이용하거나 그들의 도움을 받아 국제형사재판소의 위상을 강화하고자 노력했다. 유엔, EU(유럽연합), OAS(미주기구), La Francophonie(전 프랑스 식민지 국가들의 연합), Commonwealth(전 영국 식민지 국가들의 연합)와의 관계 강화에도 힘을 쏟아 이들의 도움도 많이 받았다. 오랫동안 껄끄럽던 AU(아프리카연합)와도 ICC 관련 회의를 공동으로 주최하는 등 조금씩 관계를 개선하고 있다.
국제형사재판소 회원국들은 여러 가지로 ICC에 수시로 간섭하고, 부탁하고, 문의한다. 그러나 나는 헤이그에서 열린 회원국들의 각종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했다. 행사를 주최한 나라에서는 참석자가 적더라도 국가원수급인 ICC 소장이 참석해주면 아주 크게 생색이 난다. 나는 이처럼 ICC를 담당하는 국가와 외교관들의 마음을 얻으려 노력했고 성과도 거뒀다.
안보리, ICC에 ‘리비아 사태’ 회부
한국에서 연말 휴가를 보내고 2011년 1월 9일 헤이그로 돌아왔다. ICC 회원국들이 헤이그 주재 대사를 통해 보낸 자그마한 선물이나 카드가 사무실에 쌓여 있다. 특기할 것은 회원국이 아닌 러시아, 이란, 중국, 사우디, 대만의 대사들도 선물과 카드를 보낸 점이다. 개인적으로 친분을 쌓은 이들이 보낸 것이어서 반가웠다.1월 12일 네덜란드 베아트릭스 여왕의 신년하례식에 아내와 함께 참석했다. 우리 내외는 신년하례식마다 항상 한복에 두루마기를 입었다. 한국대사 부부와 권오곤 ICTY(舊유고슬라비아국제형사재판소) 재판관도 때대로 한복을 입어 어느 해에는 한국 전통 의상을 입은 귀빈 부부가 3쌍인 경우도 있었다. 여왕은 참으로 지적 호기심이 많은 분이어서 나에게 ICC에 관해 많은 질문을 했다.
3월 동남아시아를 다시 찾았다. 최초의 아시아 출신 소장으로서 재임 중 아시아 국가를 효과적으로 설득해 더 많은 나라가 로마규정을 비준하도록 해야 할 책무가 있었다. 그것은 한편으로 후임자의 부담을 줄여주는 일이기도 했다. 출장 일정이 나온 후 내 비서실의 대외관계담당팀(external relations team)이 바빠졌다. 비준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필리핀과 말레이시아를 방문하기로 결정하고 이 기회에 한 나라쯤 더 들르자고 한다. 내가 브루나이에 근무한 적이 있는 한명재 공사에게 부탁해 이 나라를 추가하기로 했다.
출장길에 오르기 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만장일치로 국제형사재판소에 회부한 리비아 사태를 어느 예심 재판부에 배정할지 나로서는 퍽 고민했다. 신속하게 결정해야 하는데 휴가 중인 부소장 한 분이 스키장에서 장거리 전화를 걸어와 순서대로라면 예심 1부로 당연히 가야 할 사건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며 궤변을 한참 늘어놓았다. 자기가 속한 예심부가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는 사건을 맡겠다는 욕심에서다. 소장단의 일원인데도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물불 안 가리고 나서는 꼴이 꼭 보기 좋은 것은 아니다. 다른 부소장과 함께 그를 설득해 예심 1부에 사건을 배당했다.
50세 ‘총각 대통령’ 아키노
2010년 3월 15일 디푸 모니(왼쪽) 방글라데시 외무장관과 회담했다.
이동할 때마다 따라붙은 경호가 거추장스럽기도 하고 수고하는 모습에 미안하기도 하다. 복잡한 시내 교통을 헤치면서 일행을 선도하는 오토바이 탑승 경찰관 2인, 자동차 앞좌석에서 밀착 경호하는 군 장교, 별도의 SUV차량에 탑승한 군인들을 비롯해 10여 명이 나를 경호한다.
필리핀의 가장 큰 방송국인 ABS가 생방송 인터뷰를 제안했다. 출장 목적이 국제형사재판소의 존재를 알리는 데 있으므로 언론 홍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예상 질문 중 하나는 유엔 안보리가 리비아 사태를 ICC에 회부한 상황에서 리비아에서 일하는 필리핀 노동자들의 안전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앵커의 질문이 날카롭고 다양했는데 관전하던 주변에서 내가 답변을 잘했다고 평가해 기분이 좋았다.
3월 7일 마침 그곳에 온 호주 외무부 최고법률고문인 리처드 로와 조찬 모임을 가졌다. 헤이그와 뉴욕에서 이따금 만났고 지난해 우간다 캄팔라에서 열린 국제형사재판소 리뷰 콘퍼런스에서도 면담한 사이다. 내년 2월 시드니에서 개최되는 ICC 10주년 기념 세미나에 그를 초청했다. 이 세미나에 태평양 섬나라 16개국을 참석시켜 파급 효과를 극대화하겠다고 나의 복안을 밝히니 그가 전적으로 동의한다.
필리핀 상원에서의 일정은 후안 폰세 엔릴레 의장을 만나는 것으로 시작됐다. 1986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을 축출하는 국민혁명이 성공할 때 국방장관으로서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이다. 나와 면담할 때 87세였는데 나이에 비해 아주 건강했으며 국제형사재판소에 대한 질의도 아주 예리했다. 그와 대화한 후 상원 외교위원회가 주최한 공청회에 참석해 필리핀이 ICC에 가입해야 하는 이유를 역설했다.
오후 1시 30분으로 예정된 베니뇨 아키노 3세 대통령과 면담하기 위해 대통령궁으로 급하게 차를 몰았다. 대통령궁은 시내 중심가의 너른 땅에 자리 잡았다. 야자수를 비롯한 각종 수목으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으며 경호가 엄했다.
아키노 대통령은 50세의 독신이다. 상원의원이던 부친을 공항에서 암살로 잃고 대통령에서 퇴임한 어머니까지 암으로 잃은 점이 나의 할아버지(고하 송진우)를 연상시켰다. 언론에 따르면 50세의 총각인 그가 몰래 궁을 빠져나가 여자친구와 밤을 보내고 오는 일이 잦은데 이것이 파파라치에게 포착돼 항상 시끄럽고, 최근에는 중고 포르셰 자동차를 산 것이 입초시에 올랐다고 한다.
30개 가문이 정부 요직 독점
아키노 대통령의 비서실장은 80세가 넘은 분이다. 어머니가 대통령으로 일할 때 봉직하다가 퇴직한 분을 다시 불러들였다고 한다. 대통령 비서로서 잘 보살펴주었고 그 또한 아저씨라고 하면서 따랐다고 한다.아키노 대통령이 시내에서 오찬 후 나를 만나러 돌아오고 있다고 했다. 2시 15분이 돼서야 회담이 시작됐다. 회담장 배치를 보니 대통령 주위에 국방장관, 법무차관, 외무부 고위관리 등 정부 요인과 함께 NGO 인사들도 배석한다. 아키노 대통령은 내게 비준동의안에 2월 28일 서명했고 이후 절차에 따라 상원에서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국제형사재판소 현황을 열심히 설명했다. 그들의 머릿속에 ‘국제형사정의’의 중요성을 각인시켰다고 생각한다.
아키노 대통령이 인도네시아를 국빈 방문차 떠나야 할 시간이 돼 회담이 종료됐다. 좋은 인상에 아무리 대통령이라고 하더라도 부모도 안 계시고 결혼도 안 한 처지라 측은하다는 생각도 든다. 상원으로 되돌아가 상원의원 여러 명과 일일이 인사한 후 외교위원회에서 연설했다.
필리핀은 어느 가문 출신인지가 입신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한다. 30개가량의 가문이 세습으로 돌아가면서 정부 요직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혁명으로 쫓겨난 마르코스의 아들이 상원의원이고 그의 악명 높은 모친 이멜다는 하원의원이라고 하니 기가 찰 노릇이다.
상원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기자회견을 한 후 리셉션에 참석하고자 유서 깊은 ‘클럽 필리피노’로 향했다. 1986년 마르코스 정권을 무너뜨린 후 민중의 힘으로 당시 상원의원이던 코라손 아키노를 대통령으로 추대한 역사적 장소다. ‘클럽 필리피노’의 벽에는 코라손 아키노의 취임식을 서양의 종교화처럼 그려놓은 그림이 걸려 있다.
이튿날 오후 7시 말레이시아항공 MH705를 타고 말레이시아의 수도 쿠알라룸푸르에 도착했다.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알자지라’가 親북한적이라니…
말레이시아 공식 일정의 첫날인 3월 9일 국회의사당을 찾았다. 영국식 의원내각제 국가다. 왕은 9개 주의 족장이 모여 선거를 거친 후 5년씩 돌아가면서 맡는다고 한다.의회에서 열린 국제 의원 세미나에서 내가 연설한 후 토론이 무르익는 과정에서 몰디브 대표(야당 대표 의원)가 일어나 “정부가 6개월 전 비준안을 국회에 상정했으나 내가 속한 야당의 반대로 심의를 못하고 있다”면서 “국제형사재판소장의 연설을 듣고 나니 몰디브의 가입이 반드시 필요하다. 내가 솔선해 반대를 철회하겠다”고 선언했다. 망외의 소득이라고나 할까. 나의 연설을 유심히 듣고 보니 로마조약 가입이 자기네 나라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돼 마음을 바꾸었다는 것이었다.
3월 10일 오전 말레이시아 대학에서 강연했다. 수백 명이 모였다. 국제형사재판소의 기능과 중요성에 대해 밝힌 후 학생들과 유쾌한 토론을 했다. 젊은이들과 소통하면 언제나 기분이 상쾌해진다. 강연 후에는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던 ‘알자지라’ 방송과 인터뷰했다. 이 언론과 대담을 길게 한 것은 생전 처음이다.
알자지라 소속 기자는 곧 서울지국을 개설한다면서 나에게 호감을 표시했다. 며칠 전 서울에서 정부 관료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는데 알자지라가 친(親)북한적이며, 아랍 미디어여서 회견 요청을 거부한다는 답을 들었다고 한다.
알자지라는 카타르의 자금력을 바탕으로 한 영향력이 큰 방송사다. 믿을 만한 언론 매체로 성장하고자 BBC, 뉴욕타임스(NYT) 등 일류 언론의 중견 언론인을 스카우트해왔다. 수준 높은 매체로 쑥쑥 커나가는데 그 기자가 전한 한국 관료의 말을 듣고는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한국 관료들이 선입관 탓에 사고가 고정돼버린 예인 것 같아 안타까웠다.
유럽에서는 NYT, CNN보다 유로뉴스, BBC가 영향력이 훨씬 크다. 알자지라도 심층 보도와 다면 분석을 통해 시청자가 급속히 늘었으며 영향력도 크게 증대했다. 한국에서는 이러한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는 듯하다. 관리나 여론 주도층이 무조건 미국의 NYT와 CNN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하다. 정책 결정자나 여론 주도층이 미국에서 공부한 경우가 많아 미국 언론에 영향을 받는 것 같다.
알자지라에 이어 말레이시아 신문 ‘더 선’과 인터뷰했다. 어제 호텔에서 내가 바람맞힌 터라 더 성실하게 대담에 응했다. 자크히아 코야라는 이름의 기자인데 베일로 머리를 단정하게 가리고 이슬람 스타일 옷을 아주 깔끔하게 입었다. 강연이 대환영을 받은 것은 물론 기자들과의 대화도 무난하게 마무리됐다. 이제 정부 요인들을 만나 담판할 일만 남은 것이다.
관료 수준도 국민소득에 비례
나즈리 압둘 아지즈 말레이시아 법무장관을 예방했다. 어제 만나기로 했는데 의회 일정이 길어져 그가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지난해 5월 28일 우간다 캄팔라의 아프리카 법률구조회의에서 만나 인사한 일이 있다. 그는 국제형사재판소 지지자이므로 비준 여부를 재론할 필요는 없었다. 그가 휘하 검찰총장을 설득할 수 있는지 재확인했다. 로마조약 비준은 이 나라의 정치적 역학 관계가 달린 문제였다.오후 5시에는 나집 라작 총리를 만났다. 라작 총리는 풍채가 좋은 데다 인자하고 유식했다. 그는 다음 주 수요일 각의에 상정해 비준안을 통과시킨다고 말했다. 각국 정부 최고책임자들의 말과 행동이 다른 것을 하도 많이 경험했기에 100% 안심한 것은 아니지만 총리의 인품과 약속을 믿었다.
당시 기준으로 필리핀의 1인당 국민소득은 2000달러, 말레이시아는 7000달러 수준이다. 국민소득이 그 나라의 수준을 어느 정도 나타내는 것 같다. 말레이시아는 필리핀보다 질서가 잡혀 있었으며 관료들의 언행이 다소 일치하는 듯 보였다. 말레이시아는 생활수준도 낮지 않았다. 적빈(赤貧)은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이슬람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는 것 같으면서도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목적인지 관대한 면도 있었다.
3월 11일 생전 가본 일 없는 브루나이를 방문하고자 공항으로 향했다. 동남아 출장을 나서는데 오직 두 나라만 방문하면 출장비를 효율적으로 쓰지 못하는 것이라면서 내가 우겨 추가한 나라다. 오후 3시 50분 브루나이 수도 반다르스리브가완에 도착했다. 김대식 대사가 공관원을 데리고 출영해주었다. 용모 단정하고 점잖게 생긴 분인데 인상이 좋다. 내가 말레이시아에 있는 동안에도 헤이그나 마닐라에 연락을 계속 취해 내 일정과 취향 등을 물어보는 등 애를 많이 썼다고 한다.
이슬람 국가에서 금요일은 공휴일인 터라 방문 첫날 공식 일정은 없었다. 토요일인 이튿날 오전 10시부터 외교부, 법무부 고위직이 모인 자리에서 국제형사재판소에 관한 설명과 질의응답을 했다. 법무부에 근무한다는 왕의 둘째 따님이 임석하기를 기다린 후 이슬람 성직자가 기도를 한 다음 내가 강연을 했다. 1시간 남짓에 걸친 모든 행사가 끝난 다음에도 같은 성직자가 기도했다. 질의응답이 끝난 후 간식이 나왔다. 공주와 헤드테이블에 동석했다. 머리를 베일로 싸맸지만 귀엽게 생긴 공주는 미소만 지을 뿐 별로 말을 하지 않았다.
“국제형사재판소의 아버지여! 더욱 건강하소서”
11시 반께 행사가 종료된 후 왕의 동생으로서 제1외무장관을 맡고 있는 무함마드 볼키에르 공과 회담하러 외무부로 이동했다. 왕의 동생은 키가 작고 머리가 희끗한 1947년생 신사였다. 영국에서 교육을 받았으나 나에게는 말레이어로 얘기했다. 음색이 갈라진 듯한 발음이었다. 나중에 김대식 대사에게 들으니 왕족들은 사촌과 결혼해 유전적 문제점이 있는 경우가 있는데 음성이 이상한 것도 그런 영향일 수 있다고 한다.반다르스리브가완 시내에는 깨끗하고 잘 지어진 건물이 즐비하다. 특히 모스크가 웅장하고 규모가 크다. 점심을 먹은 후 여성 각료인 법무장관을 만났는데 태도가 융통성이 있으면서 온화했다. 로마조약에 관한 대강의 지식도 갖췄으나 말레이시아로부터 전염된 논리, 즉 왕의 면책 등과 관련한 법적 문제점을 앵무새처럼 언급해 실망스러웠다. 3월 13일 브루나이를 출발해 이튿날 아침 5시 30분 네덜란드 스히폴 공항에 도착했다.
5월 12~20일 방문한 트리니다드토바고와 콜롬비아는 국제형사재판소와 이런저런 인연이 얽힌 나라다. 카리브공동체(카리콤·14개국)가 트리니다드토바고에서 주최한 ICC 세미나에 참석하고자 방문한 것이지만 이 세미나는 트리니다드토바고 정부가 심혈을 기울여 조직한 회의다. 트리니다드토바고의 수도는 포트오브스페인(Port of Spain)이다. 포트오브스페인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카리콤 회원국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국제형사재판소의 기능과 역할에 대해 연설하고 로마조약 비준 절차와 관련해서도 발언했다.
1989년 냉전 종식 후 유엔 총회에서 국제형사재판소 창설을 제의함으로써 수십 년간 동면 상태였던 논의를 부활시킨 이 나라의 전 대통령 아서 로빈슨이 세미나에 참석해 감개가 무량했다. 내가 연설에서 그를 ‘국제형사재판소의 아버지’라고 치켜세웠더니 곧 사람들이 그 말을 따라 했고 현지 신문에서 대서특필했다. 로빈슨 전 대통령이 회의장에서 즉석으로 한, 자기의 철학과 회고를 담은 연설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똑똑한 정신력에 비해 80대 중반의 나이를 감안하더라도 걷지도 못하고 신체적으로 불편한 것이 이상해 병환 중인지 물었더니 어느 분이 1990년 이슬람군대의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의 6일 천하에서 총리로서 충격을 받은 후유증이라고 귀띔한다. 로빈슨 전 대통령은 내가 2003년 네덜란드에서 재판관 취임식을 할 때 현직 대통령으로 참석했고 그가 기증한 금박의 기념패는 지금도 재판소 건물 15층에 걸려 있다. ICC 대법정은 그의 이름을 따서 ‘로빈슨 룸(Robinson Room)’이라고 불린다. “국제형사재판소의 아버지여! 더욱 건강하소서”라고 기원했다.
극성스러운 콜롬비아 언론
‘코파 에어라인’ 항공기를 타고 포트오프스페인을 떠나 파나마를 거쳐 콜롬비아에 도착했다. 밤에 체크인 하는데 호텔 직원이 백인인 내 대외보좌관 마티아스(핀란드 출신)가 보스이고 유색인인 나는 수행원인 줄 알았는지 그에게는 응접실이 딸린 10층의 큰 스위트룸을 주고 나는 6층의 작은 방을 배정했다. 마티아스가 일을 바로잡아 방을 제대로 바꾸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나로서는 큰 경험이다. 더구나 앞으로 함께 일할 대영제국 대사 출신 영국인 비서실장과 동반 여행할 때에는 이런 일이 더 자주 발생할 것이다.콜롬비아 정부가 짜놓은 일정은 살인적이었다. 장관들과의 면담을 하루에 7~8개씩 잡아놓았다. 보통의 출장 때는 현지 정보를 상세히 파악한 뒤 고위직들과 면담에 나섰는데 이틀 내내 틈이 거의 없다.
8시 조찬에 맞춰 하루 일과를 시작하려는데 6시부터 현지 언론사의 인터뷰 요청 전화가 불이 나게 울린다. 침대에서 첫 전화를 받았는데 웬걸 라디오방송기자다. 5분만 하자던 인터뷰가 35분이 걸렸다. 계속 전화가 걸려온다. 응대를 멈췄더니 호텔 직원이 방으로 찾아온다. 방문을 두드리면서 중요한 정보가 있으니 전화를 꼭 받으란다. 세상에 이렇게 무례한 경우가 있나. 호텔 직원도 내 방으로 전화를 걸어 많은 전화가 계속 걸려오는데 안 받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불평한다. 겉은 일류 호텔인데 이렇게 주객이 전도된, 서투른 호텔은 처음 본다. 그야말로 기가 막히다. 통상의 호텔은 투숙객이 누군지와 방 전화번호를 투숙객 본인 동의 없이 가르쳐주지 않는다. 콜롬비아 외교관의 답변이 걸작이다. 기자들이 호텔 직원을 매수한 것 같다는 것이다.
국제형사재판소장의 방문이 관심을 끄는 것은 좋은 현상이나 가는 곳마다 기자들이 구름같이 몰려서 사진을 찍어대고 인터뷰를 요청한다. 대개의 기자들은 별 준비도 없이 사진 한 컷을 찍으면 그냥 달아난다.
첫 공식 일정은 대법원장 예방이다. 사법부 수장을 방문하는데 외무부 직원들이 따라붙었다. 면담에까지 참석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점을 은근히 암시했으나 알아듣지 못했는지 막무가내로 따라온다. 사법권 독립에 대한 개념이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대법원장은 24명의 대법관을 모두 법복을 입혀서 대회의실에 소집하고는 나를 소개했다.
협정서 ‘변조한’ 콜롬비아
콜롬비아 언론은 내가 도착하기도 전부터 국제형사재판소가 콜롬비아의 사법제도와 정의 및 평화를 위한 각종 프로그램 운영을 평가하고자 방문하는 것이라고 사실과 다른 보도를 내보냈다. 그래서 나는 후안 마누엘 산토스 대통령과 형집행협정에 함께 서명하고, 안데스 대학에서 공개 강연하는 단 두 가지 목적으로 방문했노라고 가는 곳마다 강조했다.대법원과 헌법재판소는 100여m 떨어졌는데 수많은 기자가 카메라를 들이대고 대기하는 것을 보고는 자동차로 이동했다. 헌법재판소장은 프랑스에서 공부한 사람이다. 헌법재판소 일정을 마친 후 하이라이트라고 할 대통령과의 회담을 위해 대통령궁으로 갔다. 조금 전 만난 대법원장과 헌법재판소장 및 여러 각료는 물론 기자들이 방을 꽉 채우고 있었다. 내가 앞서 만난 사법부 수장들은 올 필요가 없는데 왜 왔는지 의아했다. 사법부 수장들이 대통령의 비위를 맞추러 온 것 같았다.
나는 대통령과 단독회담을 하면서 엊그제 수해로 사망하거나 이재민이 된 분들을 위로하는 말을 먼저 건넸다. 그러곤 우리 재판소의 현황을 간략하게 브리핑하고 의견을 교환했다. 별실로 이동해 모든 참석자와 기자들이 보는 앞에서 산토스 대통령과 나는 형집행협정의 영어본과 스페인어본에 서명하고 교환한 다음 악수했다. 기자들의 질문은 생략하기로 했다. 산토스 대통령과 오찬을 하면서 다시금 콜롬비아의 6·25전쟁 파병에 감사했으며 전쟁 범죄가 다시는 재발하지 않도록 하고자 국제형사재판소가 출범했다고 말했다.
콜롬비아 정부가 잡아놓은 빡빡한 일정에 따라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쉴 새 없이 정부 고위관료들을 만났다. 그런데 이동 중 마티아스가 동승한 콜롬비아 외교관에게 항의한다. 서명한 협정 원본을 헤이그 본부에 송부했는데 영어본에 없는 표현이 스페인어본에 들어 있다는 연락이 바로 온 것이다. 인생을 살다가 별일을 다 본다지만 어이없었다. 더욱 한심한 것은 자기네들이 한 짓의 심각성을 모르는 듯한 태도다. 외무부 관리들이 대통령과 나를 속인 셈이 아닌가. 중대한 외교적 결례를 범해놓고 향후 어떻게 이 문제를 마무리할지 그들의 태도가 궁금하다.
‘대영제국 대사’ 출신 비서실장
앞서 언급했듯 국제형사재판소 소장으로서 세계 각국에 출장을 가 받은 인상은 사람들의 태도나 수준이 대체로 1인당 국민소득과 비례한다는 것이다. 내가 방문한 나라를 흉보려는 게 아니라 한국은 어떠한지 알 수 있는 지표이기에 되돌아본다.콜롬비아의 경우 외교 문서를 변조하고 상의도 없이 면담 일정을 잡았다 말았다 하는 태도, 경호원이나 운전기사들의 건성건성 일하는 모습, 각 부처 장관들의 엉성한 준비 등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한국 외교관들이 선진국 수준으로 깔끔하게 일처리를 잘하는지 궁금하다.
올해도 어김없이 여름이 왔다. 린 파커가 내 비서실장으로 일을 시작한 지 3개월이 넘었다. 대영제국 대사로서 사람을 부리고 위에서 큰소리만 치다가 국제형사재판소장 비서실장으로 손수 많은 일을 하게 된 그가 어떻게 처신할지 궁금했다. 나는 감정을 보이지 않고 그의 자존심과 판단을 존중하려고 노력했다.
린은 지금껏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었다. 누구나 장단점이 있게 마련이다. 어느 한 면에서 실수를 하더라도 다른 면에서는 도움을 주는 경우도 있다. 장단점을 전반적으로 검토해 사람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게 리더십의 중요한 일부일 것이다. 대영제국의 엘리트인 린의 처지에선 잘 알지도 못하는 아시아 국가에서 온 사람 밑에서 비서실장 노릇을 하는 게 내키지 않았을 수도 있다.
린은 옥스퍼드대 법과 출신으로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60세 전에 영국 외무부를 퇴직해 국제형사재판소로 옮겨왔는데 얼마간 마음을 가다듬는 과정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는 ICC의 재판부, 검찰부, 행정처 3개 기관의 갈등에 잘 대처했다. 부드럽고 협조적인 태도로 말썽 많은 재판관들과의 관계 개선에도 성과를 거뒀다.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비서실장을 잘 구한 셈이었다.
ICC 분담금 체납한 한국 어이할꼬
2011년 5월 12일 네덜란드 헤이그 국제형사재판소 사무실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국제형사재판소 분담금 중 체납액이 450만 유로였는데 최고액 체납국인 스페인이 이번 주 140만 유로를 완납하면 한국이 최고 체납액 국가로 우뚝 선다. 12월 11일부터 뉴욕에서 열리는 ICC 당사국총회 때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면 국제적 망신을 당할 뿐 아니라 의결권도 정지된다. 이기철 대사 등이 외교부 장관과 외교부 본부에 촉구했는데도 돈이 없다면서 조치하지 않아 할 수 없이 총리에게 전화한 것이다. 한국이 낼 돈이 105만 유로인데 과연 완납해줄지 궁금했다.
국회에서 예산을 통과시킬 때 국제기구 분담금을 한몫에 승인해준다. 그러나 외교부가 이를 집행하는 과정에서 몫을 나눠 미리 납부하지 않고 중간에 이런저런 용도로 다 써버리고는 연말에 돈이 없다고 발을 뻗고 체납하기 일쑤라고 한다. 예산 관리를 이렇게 하면 국제 활동에 얼마나 지장을 주는지 한국 정부가 알기나 하는지 모르겠다. 유엔의 각종 분담금 중에도 적체가 있다고 들었는데 한국 정부는 ICC 분담금마저 체납하고 버틸 생각인가. ICC 소장을 배출한 국가가 동냥을 못 주나마 쪽박이라도 깨지 않았으면 좋겠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합리적이고 절차를 존중하는 김황식 총리가 대통령과 상의해 분담금을 완납해줬다고 들었다.
12월 12일 뉴욕에서 열리는 국제형사재판소 당사국총회에 참석하는 길에 서울에 들렀다. 12월 9일 세계인권선언기념일에 정부가 나에게 주기로 한 무궁화대훈장을 받는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원래 과거에는 이런 최고의 훈장은 대통령이 직접 청와대에서 수여하고 오찬을 내는 법인데 주무관청인 국가인권위원회가 그렇게 하라고 아무리 청와대에 상신해도 들은 척도 안 한다고 한다.
대통령은 물론 비서실장과 수석비서관들도 자유무역협정(FTA), 예산 및 기타 사안과 관련해 야당의 거센 공세에 위축돼서인지 인권에는 관심조차 없다고 한다. 참 가엽고도 머리가 안 돌아가는 리더십이다. 정치나 경제에 관한 문제는 한마디 더 하나 안 하나 이해관계로 움직이지만 인권의 중요성에 관해서는 대통령으로서 한마디 하면 자신의 이미지를 세계적으로 개선하는 효과가 있을 텐데 그런 계산조차 못할 뿐만 아니라 본인이나 그의 참모들이 인권에 대한 인식이 전무하다. 이럴 거면 훈장을 현지 공관으로 전수해 수여하도록 할 것이지 바쁜 사람을 한국에 오게 만들어놓고 국가인권위원회에 수여를 미루는지 답답하다.
임기 말이어서 마음의 여유가 없는지 판단이 흐려진 것인지 알 수 없으나 한국은 경제성장만 내세우고 인권, 법치, 민주 등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무시하면서 거만한 태도를 계속 보이다가는 언젠가 한번 국제사회에서 크게 망신당할 날이 있을 것 같아 늘 조마조마하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인권에 대해 대통령은 물론 정부의 고위관료가 하나같이 인식이 없으니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서 존경받는 나라로 국격이 격상되기는 요원한 것 같다.
주마등 같은 70년 삶
2010년 1월 20일 국제형사재판소 신규 재판관들이 선서식을 마치고 기념촬영을 했다.
개막한 지 사흘이 지났는데도 재판관 선거가 지지부진하다. 새로 임명할 6명 재판관 중 3명만 결정됐다. 재판관 선거가 미뤄지는 바람에 12월 19일까지도 예산 심의가 난항을 거듭했다.
12월 21일은 내 생일이다. 매년 생일을 기념하지만 70회는 남다른 의미가 있다. 70회 생일에 객지에서 숨죽이며 예산안 심의 결과를 기다리는 내 모습을 보면서 여러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날 당사국총회 말미에 당사국총회 의장인 티나 인텔만(에스토니아 대사 출신)이 오늘이 내 생일이라고 공표하는 게 아닌가. 당사국 대표들이 박수로 축하해줘 감격스러웠다. 회의를 마치자 수많은 대사가 생일을 축하한다면서 악수를 청한다. 미국 대표단과 각종 NGO 대표들이 추가로 3년간 나와 함께 일하기를 원한다고 반복해 말해 흐뭇했다.
어느덧 만 70세가 됐다. 살아온 세월이 비교적 덤덤하게 주마등같이 지나간다. 동시에 내가 과연 앞으로 얼마나 더 살까 하는 의문도 든다. 아버님은 일흔이 갓 넘으셔서 걸리신 심각한 뇌졸중으로 5년 반을 식물인간으로 계시다가 돌아가셨으니 나도 그처럼 얼마 못 살고 갈지, 아니면 어머니는 90세까지 사셨으니 나도 그만큼 살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누가 사람의 앞일을 알 수 있으랴.
회고해보면 올곧은 환경에서 태어나 돈이나 가정사에 복잡하게 얽매이지 않은 채 살았다. 판·검사, 변호사, 관료가 될 수도 있었지만 교수로 부임한 후 학문적 업적의 성취에만 전력을 기울였고 그 나름대로 상당한 업적을 인정받았다. 넉넉한 가정에서 돈 걱정하지 않고 살아온 것은 부모님의 근검절약 덕택이고, 육아나 가정의 대소사에 깊이 관여할 필요 없이 학문 활동에만 전념한 것은 주로 아내의 덕택이다. 아이들도 잘 자라주어서 고마울 따름이다.
나는 법학 교수로서 권력 주변을 기웃거리지 않으면서 학문적·도덕적·인간적 자세를 바로 하는 데 힘썼다. 그 결과로 적어도 법조계에서는 귀감이 되는 명성과 신뢰를 쌓았다고나 할까. 학문 분야에서는 담당인 상법과 민사소송법은 물론이고 한국에서 처음으로 해상법을 강의하고 국제거래법, 지적재산권법, 기업도산법, 법률구조, 법경제학 등을 한국학계에 도입했다. 또한 제자들과 관계를 돈독하게 유지하면서 연년세세 정기적으로 만나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참으로 큰 축복이요, 자산이다. 은퇴를 얼마 안 남겨놓은 어느 날 국제기구에 진출하는 행운을 잡았고, 최근에 불꽃같이 일어나는 새로운 국제법질서인 국제형사정의 시스템에 편승해 국제형사재판소의 초대 재판관으로 근무하다가 동료들의 추대로 그 국제기구의 소장으로 선출됐다.
인류 평화와 정의의 실현에 자그마하게나마 기여하면서 분에 넘치는 영광을 차지했으므로 살아오면서 도움을 주신 많은 분에게 감사한 마음이 그득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