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 수십 번씩 무의미한 ‘잠금 해제’
산만한 환경에 적응한 뇌는 정적인 활동 못 견뎌
실리콘밸리 사람들이 명상하는 이유
전화 통화 문자 전송만 되는 ‘라이트 폰’ 인기
국내 사용자만이 아니다. 영국에서도 비슷한 조사가 있었다. 2000명을 상대로 살펴보니, 하루 평균 28차례 스마트폰 잠금 해제를 했다. 그 가운데 3분의 1인 10번 정도는 꼭 할 필요가 없는 잠금 해제였다. 계산해보면 1년에 3000번 넘게 무의미한 스마트폰 잠금 해제를 한다는 얘기다.
이 결과를 보고서 가만히 세봤다. 나는 하루에 몇 번이나 잠금 해제를 하는지. 무심코 잠금 해제를 할 때마다 세봤더니 50번 정도나 됐다. 버스, 지하철을 타고 이동할 때는 횟수가 더욱 늘었다. 예전에는 버스, 지하철을 타면 자리를 잡든 말든 일단 책부터 폈는데 지금은 스마트폰만 꼼지락거리는 식이다.
버스, 지하철에서 나란히 앉아 거북이처럼 웅크리고 스마트폰에 머리를 박고 있는 모습을 보자면 문득 오싹한 기분이 든다. 이들이 모두 스마트폰 ‘중독’은 아니겠지만, 나만 보더라도 스마트폰에 일상생활의 상당 부분을 잠식당하고 있다. 디지털 시대에 감수할 수밖에 없는 일일까? 그렇게 숙명처럼 받아들이기에는 사정이 간단치 않다.
스마트폰이 뇌를 바꾼다
해외 논문에 따르면 5일 동안 매일 1시간씩 인터넷 검색을 하는 것만으로도 뇌 활동이 변화한다.
전화번호를 외우는 일은 포기한 지 오래다. 스마트폰에 곧바로 전화번호를 입력하지 않으면, 몇 초 만에 번호가 헷갈리곤 한다. 지인 수십 명의 전화번호를 머릿속에 담아두고 있다가 필요할 때마다 곧바로 떠올린 적이 있나 싶다. 그러면서 이게 다 나이가 한 살, 두 살 먹어간 탓이라고 자위했다. 그런데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2014년 노벨 생리의학상은 영국의 존 오키프, 노르웨이의 부부 과학자 마이브리트 모세르, 에드바라 모세르 등에게 돌아갔다. 이들은 이른바 ‘몸 안의 GPS’로 비유되는 뇌의 위치 확인 시스템을 발견했다. 특히 이들은 뇌의 해마와 그 부근에 공간 인지 기능을 담당하는 신경세포가 모여 있음을 확인했다.
실제로 도로가 복잡하기로 유명한 런던에서 택시를 2~42년 동안 운전한 택시 기사 16명의 뇌를 스캔해봤다. 그들은 보통 사람과 비교했을 때 해마 뒤쪽이 훨씬 넓고 앞쪽은 좁았다. 지도 없이 도시 안에서 길을 찾아가는 방법을 익히면서 공간 인지 기능을 담당하는 해마 뒤쪽이 눈에 띄게 발달한 것이다.
택시 기사 뇌 연구를 이끈 과학자 엘리노어 맥과이어는 “내비게이션 사용이 택시 기사의 뇌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단언한다. 택시 기사가 길 찾기를 내비게이션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복잡한 길을 기억해야 하는 부담이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그런 부담과 함께 그들의 해마 역시 쪼그라들 개연성이 높다.
이렇게 우리 뇌는 자극에 따라 특정 부분이 강해지거나 약해진다. 그렇다면 이런 가설이 가능하다. 전화번호부터 시작해 예전에는 머릿속에 담아뒀던 여러 정보를 네이버나 구글 같은 검색 사이트에 맡기기 시작하면서 우리 뇌가 이런 정보를 더는 수용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변하지 않았을까.
실제로 그런 연구 결과가 있다. 2008년 과학자 몇몇이 ‘인터넷 검색이 뇌에 미치는 영향’을 확인하는 연구를 진행했다. 이들은 인터넷 검색에 능숙한 12명과 인터넷 검색을 거의 하지 않은 12명을 찾았다. 24명의 참여자에게 구글 검색을 시키고 나서 뇌를 스캔했다. 짐작하다시피 평소 인터넷 검색에 능숙한 12명은 뇌의 특정 부분이 활성화됐다.
더 놀라운 일은 6일 후 똑같은 실험을 다시 했을 때 나타났다. 과학자는 실험을 쉬는 5일 동안 평소 인터넷 검색을 하지 않았던 12명에게 매일 1시간씩 검색을 하도록 권했다. 그랬더니 애초 인터넷 검색에 능숙한 12명뿐 아니라 나머지 12명도 뇌의 똑같은 부분이 활성화됐다. 불과 5일간 하루에 1시간씩 인터넷 검색을 했을 뿐인데도 뇌가 변한 것이다.
책을 읽거나 그림을 볼 때와 비교하면 인터넷 검색을 할 때 뇌 활동이 복잡한 양상을 띠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인터넷 검색은 끊임없이 새로운 신호 자극 속에서 정보를 찾는 행동이다. 뇌가 이런 산만한 환경에 익숙해지면 책을 읽거나 그림을 보는 것 같은 정적인 활동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
어릴 때부터 네이버, 구글 같은 검색 사이트에서 정보를 찾거나, 유튜브 같은 동영상을 통해 정보를 전달받은 이들이 책 읽기에 익숙해지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책 읽기의 중요성이 끊임없이 강조되는데도 정작 학교 현장에서 책과 친한 아이를 찾지 못하는 건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한 가지 긍정적인 신호도 있다. 인터넷 검색처럼 웹 서핑을 할 때 쏟아지는 자극적인 신호는 늙어가는 뇌를 자극하는 데 쓸모가 있다. 치매 예방을 위해 노인에게 웹 서핑을 권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지금 스마트폰에 머리를 박고 검색에 열을 올리는 이들 대부분은 노인이 아니다.
‘디지털 성지’의 반동
미국 실리콘밸리 ‘테크샵’에서 하드웨어 분야 창업가들이 생산 장비를 이용해 시제품을 제작하고 있다. [동아DB]
이런 식이다.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는 이들이 회의할 때 책상 위에는 아이패드 같은 태블릿 PC 대신 종이 노트가 있다. 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노트는 어니스트 헤밍웨이, 브루스 체트윈 같은 작가가 사용했다고 홍보하는 몰스킨 브랜드다. (정확히 말하면 몰스킨 브랜드는 그런 작가들이 사용한 노트의 모양과 이미지를 차용한 제품이다.)
실리콘밸리의 성공한 디지털 기업 옐프(Yelp) 사례도 있다. 이곳은 본사를 다시 꾸미면서 화이트보드 대신 디지털 스마트 보드를 도입하려다 말았다. 프로그래머 등 엔지니어들이 화이트보드가 없는 근무 환경에 극도로 거부감을 보였기 때문이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대로 마음껏 써놓을 수 있는 화이트보드가 꼭 필요하다고 고집했다나!
실리콘밸리의 또 다른 아날로그 유행은 명상이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명상 애호가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심지어 성공한 디지털 기업 어도비는 회사 안에 명상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어도비 직원은 업무 중에 팀을 짜거나 개인적으로 명상 공간에 들어가 조용히 명상을 즐기곤 한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순투성이다. 잡스는 자신이 만든 아이패드를 자녀들이 가지고 놀지 못하게 했다. 또 다른 디지털 사상가로 ‘롱테일 경제학’ 등을 쓴 크리스 앤더슨은 스마트폰을 포함한 아이들의 테크놀로지 이용 시간에 제한을 뒀다. 트위터 등을 공동 창업한 에번 윌리엄스는 책으로 가득 찬 서재가 있는 ‘테크놀로지 없는’ 집에서 산다.
이렇게 디지털 혁명의 최전선에 있는 이들이 오히려 디지털을 멀리하는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어쩌면 그들은 삶의 진실을 포착했기 때문이다. 디지털 세상은 1과 0으로 구성된다. 그들은 그런 1과 0을 조합해서 엄청난 수익을 남기고 또 개인적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부를 축적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1과 0으로 환원될 수 없다. 디지털이 아니라 아날로그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런 아날로그 세상에 발을 딛고 서 있지 않으면 1과 0으로 이뤄진 디지털 세상은 단 한순간도 유지될 수 없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에 전원을 연결해 켜는 일은 디지털이 아니라 아날로그니까.
실리콘밸리의 그들은 바로 이것을 안다. 모두가 디지털 세상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때, 정작 그것을 만든 그들은 오히려 아날로그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실천하는 이유다. 지금 우리도 게임, 페이스북·인스타그램·트위터 같은 소셜미디어 등 스마트폰에 시간을 허비할 게 아니라 오히려 아날로그의 가치에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게 아닐까?
디지털 피로를 거부하라!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 ‘인디고고’에서 ‘라이트 폰 2’를 소개한 화면. [indiegogo 캡처]
라이트 폰은 제품 이름과 같은 회사 ‘라이트’에서 2015년 5월 처음으로 선보였다. 처음 라이트 폰이 등장했을 때 대다수의 반응은 냉소였다. 애플, 삼성, LG 등이 온갖 기능으로 무장한 최신형 스마트폰 마케팅에 열을 올리는 상황에서 전화 통화와 문자메시지 기능만 제공하는 휴대전화의 등장이 어처구니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이트 폰은 시장에서 약 1만 대를 판매하며 생존했다. 매출은 미미했지만 그 존재감을 세상에 확실히 각인시켰다. 여러 언론과 소셜미디어가 앞다퉈 시대에 뒤떨어진 기능의 라이트 폰에 주목했다. 라이트 폰은 ‘디지털 피로감’을 호소하는 사회의 징후를 정확히 포착한 제품이었다.
지금 라이트는 2015년의 라이트 폰을 개선한 ‘라이트 폰 2’를 조만간(2019년 4월) 선보일 예정이다. 이번 전화기는 전화 통화와 문자메시지만 제공하던 전작에 비하면 다소 똑똑해졌다. 음악 플레이어, 날씨 정보, 지도, 계산기 등의 기능이 들어갈 예정이다. 최소한의 의사소통과 일상생활에 필요한 기능을 추가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소셜미디어, 뉴스, e메일 등은 지원하지 않는다. 라이트는 “이런 기능은 앞으로도 라이트 폰에서는 서비스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라이트 폰을 사용하면서 시도 때도 없이 페이스북·인스타그램·트위터 등을 들락거리고, 뉴스 리스트를 검색하고, e메일 리스트를 끊임없이 새로 고침 하는 일만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
라이트 폰 2는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 인디고고(Indiegogo)에서 애초 목표치의 6배를 뛰어넘는(616%) 166만1048달러(약 18억 원)의 투자를 유치했다. 펀딩 기간이 지나 투자에 동참하지는 못했지만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알루미늄 재질 몸체에 단순함의 미학이 돋보이는 디자인이 소유욕을 자극한다.
라이트 폰에 대한 관심은 레코드판(LP)의 부활과도 궤를 같이한다. 레코드판도 스마트폰으로 상징되는 디지털 시대에 사라지는 듯했다. 그런데 북미, 유럽을 중심으로 이상한 일이 진행 중이다. 미국의 통계를 보면, 레코드판의 판매량은 2007년 99만 장에서 2015년 1200만 장 이상으로 늘었고, 연간 성장률은 20%를 웃돈다.
아날로그 붐에 따라 음악시장에서도 레코드판이 부활하고 있다.
라이트 폰도 마찬가지다. 디지털 세대가 압도적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의 열기에서 확인할 수 있듯, 라이트 폰에 열광하는 이는 복잡한 스마트폰의 기능에 적응하지 못하는 ‘한물간 세대’가 아니라 항상 최신 유행에 민감한 젊은 세대다. 이들이 지금 스마트폰으로 상징되는 디지털의 가치에 반기를 들고 있다.
라이트의 창업자 조 홀리어는 라이트 폰이 주목받는 상황을 이렇게 해석했다.
“라이트 폰이 스마트폰을 대신하리라고 보지는 않아요. 하지만 라이트 폰이 스마트폰으로 피곤한 삶을 보내는 사람에게 휴식의 도구가 될 것입니다.”
맞다. 지금은 디지털 피로감을 회복할 휴식의 도구가 필요한 시점이다. 마지막으로 역설적인 사실 하나만 덧붙이자. 라이트 폰을 구매하고, 투자하는 이들은 무엇을 이용해서 그 정보를 접하고, 구매나 투자 버튼을 눌렀을까? 틀림없이 스마트폰이다. 100% 확신하건대,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버스나 지하철에서 거북이처럼 스마트폰에 머리를 처박고 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아, 이 역설을 어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