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낙하산 인사는 적폐”라며 근절을 약속했지만 허언이 된 듯하다. 심지어 공공기관이 아닌 민간 영역까지 ‘캠코더’(문재인 캠프, 코드, 더불어민주당) 낙하산 인사가 이뤄져 반발을 사고 있다. 10년 동안 굶주린 탓일까, 과거 보수 정부 때보다도 더 심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먼저 눈에 띄는 게 IPTV 업종이다. 한국인터넷진흥원(KISA)이나 한국정보화진흥원(NIA) 등 공공기관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한국케이블TV방송협회와 한국IPTV방송협회, 한국TV홈쇼핑협회는 이름 그대로 관련 기업과 전문가들이 모인 민간단체다. 한국IPTV방송협회는 전임 회장이 박근혜 정부 청와대 출신이긴 했지만, 한국케이블TV방송협회와 한국TV홈쇼핑협회는 전임 회장이 모두 관련 기관에 종사한, 정권과는 무관한 전문가들이었다.
지난해 말 한국IPTV방송협회장에 취임한 유정아 전 KBS 아나운서는 노무현시민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지난해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 국민참여본부 수석부본부장(시민캠프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지난 3월 한국케이블TV방송협회 회장에 취임한 김성진 전 여성부 차관은 김대중 정부 시절 대통령비서실 국내언론1비서관 등을 역임했으며, 지난해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 정책자문단 ‘10년의 힘 위원회’에서 활동했다. 같은 달 취임한 조순용 한국TV홈쇼핑협회장도 김대중 정권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낸 정치인 출신으로, 지난해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 정책자문단 ‘10년의 힘 위원회’에 이름을 올렸다.
은행 CEO 자리는 집권 세력의 전리품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낙하산 인사는 적폐”라며 근절을 약속했지만 문재인 캠프 출신, 더불어민주당 출신들이 협회 등 민간 영역까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동아DB]
지난해 9월 취임한 김지완 BNK 금융지주 회장은 지난해 대선 당시 문재인 캠프 경제고문으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노조로부터 ‘낙하산 인사’라는 격한 반발을 샀다. BNK 금융지주는 부산은행, 경남은행 등을 거느린 동남권(부산, 울산, 경남 등 영남지방을 지칭) 최대 금융그룹이다.
KB부동산신탁은 지난해 12월 말, 부회장직을 새로 만들어 김정민 전 KB부동산신탁 사장을 선임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산상고 7년 후배인 김 부회장은 노 전 대통령의 불법대선자금 의혹과 관련해 검찰 조사를 받은 바 있다. 2012년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 캠프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지난 4월엔 외국환 매매 등을 전문으로 하는 서울외국환중개㈜ 전무로 민주당 당직자 출신인 김범모 전 국회 정무위 수석전문위원이 취임했다. 서울외국환중개㈜는 10개 은행이 공동으로 설립한 비영리 사단법인 금융결제원의 자회사로, 정부와는 무관한 기업이다.
민간 협회까지 무더기 투하
SK에너지, GS칼텍스, S-OIL, 현대오일뱅크 등 국내 주요 정유사와 석유개발회사들로 구성된 대한석유협회도 정권의 낙하산 인사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지난해 대선 당시 문재인 캠프 공동 선거대책위원장을 지낸 김효석 전 의원이 지난해 11월 회장으로 취임했다. 대한석유협회 회장은 과거에도 정치권 인사들의 자리였다. 반면, 유관 단체인 한국석유화학협회는 허수영 롯데그룹 화학부문 부회장 등 관련 업계 경영인이 회장을 맡아왔다.지난해 12월 소상공인연합회 상근부회장으로 취임한 이제학 전 양천구청장은 민주당 출신이다. 취임 전부터 정권 실세의 개입 소문이 파다했다.
지난해 11월 선출된 김용덕 손해보험협회장은 2007년 노무현 대통령비서실 경제보좌관을 지냈으며 건설교통부 차관, 금융감독원장을 하다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2008년 3월 퇴임했다. 이후 관직을 떠난 그는 지난해 대선에서 문재인 캠프 정책자문단 ‘10년의 힘 위원회’에서 활동했다. 공공기관인 코트라(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와 달리 순수 민간단체인 한국무역협회장 자리에도 지난 12월 김영주 전 산업자원부 장관이 취임했다. 김 회장은 노무현 정부 때 경제정책수석비서관, 국무조정실장을 역임했으며 2012년 문재인 대선 캠프 경제정책 자문단에 참여한 바 있다.
보수단체, 민간 언론사까지
의외의 곳에서도 낙하산 인사들이 눈에 띈다. 지난 4월 대표적인 보수단체인 한국자유총연맹 회장에 취임한 박종환 전 충북경찰청장은 문재인 대통령과 경희대 법학과 동기이자 절친으로 알려져 있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사퇴한 김경재 전 회장을 대신해 총재권한대행을 하던 이세창 씨는 기자회견을 열어 “현 정부에서 박 총재를 앉히려 지속적으로 외압을 행사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전두환 정부 시절 동생 전경환 씨가 회장을 맡아 유명한 새마을운동중앙회에도 문재인 정부 낙하산 인사가 내려앉았다. 올 2월 취임한 정성헌 회장은 1970년대부터 농민운동을 해온 진보 진영의 ‘원로’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스스로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 등 과거 운동권 후배들이 새마을운동중앙회의 변화를 이끌어달라는 요청을 해온 게 사실”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서울신문은 과거 공기업이었으나 2002년 민영화된 사기업이자, 정부를 견제해야 할 언론사다. 그런데 지난 5월 취임한 고광헌 사장은 언론인 출신(전 한겨레 대표이사)이기는 하지만, 지난 대선 때 공개적으로 문재인 지지선언을 한 바 있는 친문(親文) 인사다. 고 사장도 ‘사장 공모 경영비전 공개발표회’에서 청와대와의 교감을 부인하지 않았다. 서울신문 우리사주조합은 청와대 앞 1인 시위까지 벌이는 등 반발했지만 소용없었다.
낙하산 인사가 민간 영역까지 확대되는 것에 대해 윤창현 서울시립대 경영학부 교수는 “지배구조가 불분명한 곳, 준(準)공공영역에 낙하산 인사가 이뤄진다. 이런 곳이라도 회원 투표로 수장을 뽑는 곳은 건드리지 못한다”며 “업계가 자율적으로 좋은 수장을 선출할 수 있도록 ‘룰’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 교수는 또한 “캠프에서 일한 후 좋은 자리를 차지하면 순수성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당사자들은 자신도 충분한 전문성이 있다며 ‘낙하산 인사’라는 말이 섭섭할지 모르지만 자신이 아닌 중립적인 분들을 모셨으면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는 진정성이 더 돋보였을 것”이라고 충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