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김정은을 정점으로 한 서기실 중심 통치 구조
태영호 前공사 ‘3층 서기실의 암호’ 출간… 실체 드러나
수령 ‘뇌’ 역할 하면서 막강한 ‘문고리 권력’ 행사
‘3층 서기실’이 일하는 북한 노동당 본관.(왼쪽)
‘김정은의 비선실세 3층 서기실’ 제하 기사 서두는 이렇다.
“북한 조선중앙TV는 평일 오후 5~11시, 일요일 오전 9시~오후 11시 전파를 송출한다. 오후 11시가 되면 어김없이 3층 높이 노동당 청사 한 곳을 클로즈업해 보여주는 것으로 방송을 끝낸다. 도대체 이 3층 건물이 뭐기에 날마다 이 청사를 보여주면서 방송을 마무리할까.
북한에서 이 건물은 ‘당중앙위원회’라고 일컬어진다. 이 청사에 서기실이 있다. 3층 건물을 업무 공간으로 써서 ‘3층 서기실’로 불린다. 밤 11시 서기실 청사의 환한 불빛을 보여주면서 TV 방송을 끝내는 것은 인민이 잠자리에 든 시간에도 수령은 불 밝히고 일한다는 인상을 주려는 의도다.
서기실의 존재를 아는 북한 사람이 거의 없다. 일반 주민은 당연히 모르고 간부 중에서도 고위층만 안다. 수령(김정은)이 위치하는 곳이 당중앙위원회다. 중앙위원회 아래에 조직지도부, 선전선동부 39호실 등 각 부서가 있다. 그중 조직지도부가 간부, 주민을 통제하는 지도기관이다. 공식 기관인 조직지도부와 달리 서기실은 숨겨진 기구다. 김정은을 보좌하는 집단으로 그 힘이 막강하다.”
신동아가 서기실을 ‘북한 통치 구조의 핵심’으로 지목하자 학계 일각에서는 김일성 시대의 비서국과 헛갈린 게 아니냐는 지적마저 나왔다. 북한을 연구하는 학계에서도 서기실은 그간 거론된 적이 거의 없다.
신동아는 2018년에도 서기실과 관련한 보도를 이어나갔다. 4월호 ‘연쇄 정상회담 성사 막전막후 : ‘靑국정상황실-北서기실’ 핫라인 뚫었다’ 제하 기사를 통해 서기실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김정은 위원장이 남측 특사단과 면담·만찬을 한 3층 높이 노동당 청사에 ‘김정은의 집무실’이 있다. 평양 사람들은 이곳을 ‘당중앙위원회’라고 일컫는다. 이 건물에 입주한 기관이 서기실이다. 김정은과 같은 공간에서 일하는 것이다. 3층 건물을 업무 장소로 쓰기에 간부들 사이에선 ‘3층 서기실’로 불린다. 북한과 같은 독재 체제에서는 절대 권력과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권한 또한 강하게 마련이다.”
신동아가 서기실에 주목한 것은 2016년 5월호에서 “북한이 서기실 중심 집단지도 체제”라고 보도하면서부터다. 일련의 보도는 노동당 출신 비공개 탈북 인사, 해외 거주 탈북 노동당 간부, 해외 거주 북한 연구자, 전직 정보당국 고위인사 등의 증언을 바탕으로 이뤄졌다.
24시간 ‘깨어 있는’ 통치 구조 중추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 공사가 5월 15일 회고록 ‘3층 서기실의 암호’를 펴냈다. 북한 실상을 적나라하게 기록한 책이다. 교보문고 종합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태 전 공사는 ‘3층 서기실의 암호’ 뒤표지에 ‘북한의 핵심… 3층 서기실’이라는 작은 제목을 달고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3층 서기실은 북한 주민도 잘 모르는 조직이다. 서기실이 어느 건물 3층에 있어서 붙여진 별칭이 아니라, 3층 규모 건물 전체를 쓰고 있어 유래된 이름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김정은의 집무실이 있는 당 중앙 청사가 3층 규모인데, 이 청사에서 김정은의 사업을 가장 근접해서 보좌하는 부서를 3층 서기실이라고 한다.
3층 서기실은 기본적으로 김정일·김정은 부자를 신격화하고 세습 통치를 유지하기 위한 조직이다. 3층 서기실이 실세 중 실세인 것은 북한에서 생겨나는 모든 정보와 권력이 이곳에 모이게 되고 막후에서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당 중앙 청사는 중앙당 일꾼들도 마음대로 접근할 수 없는 완전한 금지구역이다. 그런데 김정은은 3월 5일 한국 대통령 특별사절단을 여기서 맞이했다. 이때 북한 언론은 처음으로 이 청사를 ‘조선 노동당 본관’이라고 소개한 바 있다.”
신동아 보도와 ‘3층 서기실의 암호’ 서술이 데칼코마니 같다. 신동아가 보도한 ‘김정은의 비선실세 3층 서기실’을 태 전 공사가 ‘3층 서기실의 암호’라는 제목의 저서를 통해 확인한 것이다.
‘김정일이 만들어’ ‘김정은에 물려줘’
6월 12일 북·미 정상이 단독 정상회담을 마친 후 핵심 참모와 함께 진행한 확대 정상회담에 배석한 리용호 외무상이 ‘3층 서기실’ 실장을 지낸 리명제(사망)의 아들이다.“강석주가 대미 협상을 이끄는 과정에서 막후 책사 역할을 한 인물이 현 북한 외무상인 리용호다. 1990년대 전까지만 해도 서방 국가와 대화할 수 있는 군축 전문가가 없었다. 그런데 1990년 유엔에서 외무성으로 공문이 왔다. 미국에서 6개월 과정 군축 전문가 양성 프로그램이 실시되니 회원국마다 1명씩 보내달라고 했다. 외무성 군축과장으로 있던 리용호는 이 공문을 들고 강석주를 찾아갔다. 보내달라는 얘기였다. 국제기구국 군축과는 1년 내내 할 일이 없어 허송세월하는 곳이었다. 북한 권력의 실세인 ‘3층 서기실’ 리명제 실장의 아들인 리용호가 왜 군축과에서 일하는지 다들 의아해했다. 외무성 원칙상 해외연수는 최소한 2인이 한 조를 이뤄야 했다. 리명제 실장 아들이 찾아와 부탁하니 무작정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강석주는 ‘리용호를 미국 군축 강습에 보내려 한다’는 보고를 올리며 ‘리명제 실장의 아들’이라는 주해를 달았다. 리명제를 대단히 신임했던 김정일은 곧 승인을 내렸다.”(‘3층 서기실의 암호’ 78쪽)
리용호의 아버지 리명제는 ‘조직지도부 부부장’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가 서기실장이었다는 사실은 ‘3층 서기실의 암호’에서 처음 공개된 것이다. 신동아는 “서기실 고위 인사들이 부득이하게 공개 활동을 할 때 ‘조직지도부 부부장’ 직함을 쓰곤 한다”고 보도한 바 있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 시대로 이어지는 북한의 통치 구조 변화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김일성 시대에는 김일성이 총비서를 맡은 노동당 중심의 통치였다. 노동당 정치국 상무위원회의 위상도 높았다. 김정일이 후계자로 확정된 것도 정치국 상무위원회를 통해서다. 김일성-김정일 공동정권 시대로 일컬어지는 1980~1994년 김정일에게 권력이 대부분 넘어가는 과정에서 노동당의 역할이 축소되고 수령 권력의 절대화가 심화했다.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김정일은 절대적 수령으로서 통치했다. 서기실은 김정일을 실무적으로 뒷받침하는 조직으로 발전했다. 김정일 시대 노동당은 수령과 서기실 지시를 집행하는 실무집단이 됐다. 김일성 시대만 해도 노동당 내에 ‘집체 토의 체제’가 있었다. 김정일 시대에는 모든 사안을 수령에게 보고하고 결론을 받아 처리하는 ‘제의서 체계’가 수립됐다. 이 과정에서 서기실의 역할이 확장된 것이다. 김정은은 김정일이 구축한 서기실 시스템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김정은이 틀어쥐고, 숙청하고, 안정화한 것은 기왕의 시스템이 그대로 작동된 덕분이다. 수령을 정점으로 한 서기실 중심 지도체제가 북한을 이끄는 것이다.
“3층 서기실 ‘모사 방침’ 수령의 생각과 똑같아”
북한 노동당 간부로 일하다 김정일 사망 직전 망명한 비공개 탈북 인사 증언은 다음과 같다.“서울에서는 노동당 조직지도부를 강조하던데 조직지도부가 서기실의 통제를 받는다. ‘서기실에서 나왔습니다’ 하면 김정일이 직접 온 것과 같다. 조직지도부 부부장도 자리에서 일어나 맞는다. 서기실 인사가 ‘○○ 문제가 제기돼 요해하러 왔다’고 하면 답을 내놓아야 한다. 김정일이 ‘서기실에서 요해한 대로 하시오’ 하면 그걸로 끝이다. 서기실에는 중앙당, 보위부, 무력부 등의 각 기관을 담당하는 조직이 있다. 정치·경제·군사·문화 등 담당 분야별로 조직이 다 있다. ‘모사 방침’이라는 것을 아는 북한 전문가가 서울에는 없던데, 서기실이 서명한 문서는 수령의 생각과 똑같다고 여기는 게 ‘모사 방침’이다. 막강한 권한을 가진 서기실 고위 인사들은 ‘노동신문’ 같은 곳에 등장하는 일이 거의 없다. 직위 등을 외부에 알리지 않으려는 것이다.”
북한의 각 부서는 컴퓨터를 통해 주보와 일보를 ‘3층 서기실’로 제출한다. 김정은이 서명을 하면 ‘친필비준문건’이 된다. 구체적 지시 사항을 적어 서명하는 경우도 있다. 김정은이 봤다는 표시만 한 문건은 ‘보아주신 문건’ 혹은 ‘당중앙위원회 지시’라고 표현한다. 김정은이 문건을 직접 읽는지, 제목만 보는지, 제목도 안 읽는지 알 수 없다. 특정 부서가 하루에 보고하는 문건만 수천 쪽에 달한다. 대다수 문건은 ‘3층 서기실’에서 읽어보고 중요한 문건만 보고될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태영호 전 공사는 지난해 신동아와의 대담에서 “3층 서기실은 기본적으로 김정일·김정은 부자를 신격화하기 위한 조직”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난 시기에는 모사기를 이용해 김정일에게 보고했다. 팩스를 북한에서 모사기라고 한다. 지금은 컴퓨터 시대이기에 정확하게 표현하면 ‘컴퓨터 방침’인데 관례적으로 ‘모사 방침’이라는 표현을 쓴다. 각 부서에서 직접 문건을 들고 가 김정은의 얼굴을 보면서 보고하는 게 아니라 기계로 보고한 후 지시를 받는다고 해 모사 방침이다. 서기실이 이 같은 과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한다.”
“정보와 권력이 모이는 길목 장악”
‘3층 서기실의 암호’ 233~236쪽 소제목은 ‘모르는 게 없는 지도자 만들어내는 3층 서기실’이다.“3층 서기실이 실세 중 실세인 것은 시스템을 지탱하는 연결고리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김정은이 2015년까지 통일할 수 있는 방안을 만들라고 지시했다고 치자. 그러면 3층 서기실은 김정은의 지시라며 각 부서에 개별적인 하달문을 내려보낸다. 인민무력부는 남조선 공격 계획을 작성해 보고하고, 외무성은 대북 유엔 제재 극복 안을 강구해 제출하라는 식이다. 어떤 부서든 이 사안에 대해 총체적으로 접근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가능한 3층 서기실이나 김정은에게는 모든 정보와 권력이 모이게 된다. 구체적인 정책이나 방안을 수립하는 기능이 없는 3층 서기실이 막후에서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는 이유다.”(235쪽)
서기실은 당의 조직이 아니라 수령의 조직이다. 조선왕조 때 왕명을 출납하던 승정원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 태영호 전 공사의 증언을 더 읽어보자
“모든 결정이 신(神)인 김정은의 머리에서 나온 것처럼 보여야 하므로 서기실을 직속으로 두고 보좌받는 것이다. 서기실과 김정은만이 각 부서가 어떤 안을 보고했는지 안다. 서기실 인사가 각 부서를 찾아오면 부장, 부부장이 문 앞에 나가 ‘오셨습니까’ 하면서 맞는다. 간부들이 반쯤 죽는다. 서기실 인사가 외무성에 나타나면 외무상도 그 앞에 딱 서서 꼼짝하지 못한다. 김일성 시대까지는 노동당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갔으나 김정일 시대를 거치면서 서기실이라는 비선 보좌 그룹이 생겼다. 현재 각 부서의 보고가 서기실에 집중되고 서기실이 김정은과 협의해 정책을 밀고 나간다. 서기실 인사들은 노동신문에 이름, 얼굴이 안 나오는 것은 물론이고, 격폐(隔閉)된 지역에서 거주한다.”
김정은 체제는 통상의 인식보다도 훨씬 더 강고(強固)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