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호

‘연평도 피격’ 두 달… 文 ‘피해자 중심주의’도 총 맞았다

일본에는 있고 북한에는 없는 ‘文 피해자 중심주의’

  • 백승주 국민대 석좌교수·전 국회의원

    kidabsj@gmail.com

    입력2020-11-22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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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文 “피해자 중심주의는 국제사회 합의된 원칙”

    • 日 위안부·강제징용 문제에서는 ‘피해자’ 강조한 文

    • 해수부 공무원 피격사건은 추정·예단으로 일관

    • 軍, 구명조끼 전수조사…3차 조사에서 ‘조끼’ 분실

    • 선장이 세 번 전화해 “조끼 조사는 절대 발설하지 말라”

    • 이래진 씨 “‘월북 증거’ 만든 느낌…‘월북 부정’ 증언도 수두룩”

    • ‘월북 가족’ 멍에 써야 할 유족, 아들은 육사 입학 제한될 수도

    • 월북 확인되지 않은 상황…월경 표현이 적확

    • 대통령 심기 고려 업무 수행, ‘피해자 중심주의’도 총 맞아

    • 美 오토 웜비어 사례가 웅변하는 ‘진짜’ 피해자 중심주의

    업무 중 실종된 서해어업지도관리단 소속 어업지도 공무원 이모 씨가 탑승했던 어업지도선 무궁화 10호가 9월 24일 오전 조사를 받기 위해 북방한계선(NLL) 인근 소연평도 남방 1.2마일 해상에 떠 있다. [원대연 동아일보 기자]

    업무 중 실종된 서해어업지도관리단 소속 어업지도 공무원 이모 씨가 탑승했던 어업지도선 무궁화 10호가 9월 24일 오전 조사를 받기 위해 북방한계선(NLL) 인근 소연평도 남방 1.2마일 해상에 떠 있다. [원대연 동아일보 기자]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017년 12월 28일 입장문을 통해 2015년 한일(韓日) 양국이 합의한 ‘일본군 위안부 합의’에 대해 “인정할 수 없다”며 사실상 합의 파기를 선언했다. 문 대통령은 “한일 양국 정부 간 위안부 협상은 중대한 흠결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며 “이는 무엇보다 피해 당사자와 국민이 배제된 정치적 합의였다는 점에서 매우 뼈아프다”고 했다. 2년 만의 파기 선언에 깔린 문 대통령의 정치철학은 ‘피해자 중심주의’였다. 

    문 대통령은 2020년 8월 14일 ‘일본군 위안부 기림의 날’ 축사에서도 “위안부 문제 해결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피해자 중심주의”라며 “정부는 할머니들이 괜찮다고 하실 때까지 할머니들이 수용할 수 있는 해법을 찾을 것”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앞서 2월 일제의 강제징용 문제와 관련해서도 “피해자 중심주의는 국제사회의 합의된 원칙”이라고 했다. 


    2018년 8월 14일 충남 천안시 국립 망향의 동산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 [뉴시스]

    2018년 8월 14일 충남 천안시 국립 망향의 동산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 [뉴시스]

    문 대통령의 말처럼, 피해자 중심주의는 국제사회의 합의된 원칙이자 보편적 인권에 관한 문제다. 피해자가 입은 상처와 그 아픔을 공감하면서 피해자 처지에서 문제를 해결한다는 피해자 중심주의는 상식이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9월 21일 서해에 표류하던 대한민국 해양수산부 공무원 이모 씨가 북한군이 쏜 10여 발의 총탄을 맞아 사망한 사건에 대해선 ‘국제사회의 합의된 원칙’이 적용되지 않았다. 청와대나 정부가 피해자 유족들이 ‘괜찮다’고 할 때까지 북한군 만행을 규탄하고,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는 보도는 없었다. 국방부는 11월 3일 이씨가 북한군에 사살된 상황이 담긴 특수정보(SI)를 공개하라는 유족 측의 요구도 거절했다. 


    “문전박대 받은 느낌”

    윤성현 해양경찰청 수사정보국장(오른쪽)이 10월 22일 인천 연수구 해양경찰청 대회의실에서 서해 피살 어업지도 공무원 실종 수사 관련 브리핑을 진행하고 있다. [뉴스1]

    윤성현 해양경찰청 수사정보국장(오른쪽)이 10월 22일 인천 연수구 해양경찰청 대회의실에서 서해 피살 어업지도 공무원 실종 수사 관련 브리핑을 진행하고 있다. [뉴스1]

    오히려 대한민국 해경은 9월 24일 사망한 공무원의 자진월북 가능성을 강조했다. 해경은 두 차례 중간수사 결과 발표 자리에서 “이씨가 북한 해역에서 발견될 당시 구명조끼를 착용한 상태로 부유물에 의지하고 있었고, 북측 민간선박(수산사업소 부업선)에 자신의 인적 사항을 밝히고 월북 의사를 표명했다”면서 “이씨는 인터넷 도박에 깊이 몰입해 455일 동안 591차례 도박자금을 송금했다. 각종 채무 등으로 개인회생 신청과 급여 압류 등이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도박 빚 때문에 정신적 공황 상태에서 현실도피를 목적으로 월북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사망한 피해자는 말이 없다. 피해자 가족은 분통을 터뜨린다. 피해자 가족 대표 격인 이씨의 아들은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절제된 표현으로 분노를 전달했다. 사망한 이씨의 큰형인 이래진 씨 등 유가족들은 해경 발표 내용을 조목조목 반박하며 시민단체, 유엔 등에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이씨는 “수사 당국이 폐쇄회로(CC)TV나 결정적 증거 없이 소설 쓰듯 월북이라고 추정해 마치 범죄자인 것처럼 발표했다”며 “월북은 불가능하다는 연평도 주민과 다른 승조원들의 증언은 배제한 해경은 (오히려) 수사를 받아야 하는 (대상인) 만큼 검찰이 수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재인 정부의 피해자 중심주의는 피해자를 골라서 적용되는 걸까. 

    필자는 사망한 해수부 공무원 이씨의 형 이래진 씨를 만났다. 5남 2녀 중 장남인 그는 원양어선 항해사로 일하다가 원양선사에 근무했고, 이후 20년 이상 보트 개발을 한 ‘바다 전문가’였다. 그는 동생의 피격사건 이후 동생과 가족의 명예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그러나 위안부 및 징용 문제 해결에 적용된 ‘피해자 중심주의가’는 적어도 이씨 가족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이다. 

    - 동생 실종 사실을 언제 처음 연락받았나? 

    “9월 21일 오후 2시 30~40분 사이 서해 어업관리단 직원에게 연락받았다.” 

    - 동생의 피격 소식은 언제 통보받았나. 

    “그건 언론을 통해 알았다.” 

    - 서해 어업관리단 외에 정부 당국으로부터 설명 들은 적은 있는가. 

    “통일부와 국방부, 합동참모본부를 찾아갔지만 자세한 설명을 듣기는커녕 오히려 문전박대당한 느낌이다. 그들은 ‘차후에 연락하겠다’고 했는데 어느 기관도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사망한 이씨가 서해 어업관리단 소속 공무원이었던 만큼 그 기관을 통해 실종 연락을 한 것은 이해가 간다. 그런데 진실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정부 당국은 피해자인 가족의 말에는 귀 기울이지 않았다. 

    해경은 피해자가 구명조끼를 착용한 사실을 월북 추정의 중요 근거로 제시했다. 그러나 북한이 보내온 전화통지문(전통문)에는 ‘부유물’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지만 구명조끼에 대해선 기술하지 않았다. 구명조끼를 입은 사진도 없다. 이래진 씨는 사망 경위에 대해서도 정부 발표를 신뢰하지 않았다. 오히려 “군과 해경이 세 차례 구명조끼 전수조사 사실을 감추려 했다”며 사건 조작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다. 동생의 사망 경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3차 조사에선 사라진 구명조끼…‘월북 추정’ 근거

    숨진 공무원 이모 씨의 형 이래진 씨는 “사건 처리 과정에서 정부 당국이 보여준 모습은 피해자 중심주의는 커녕 유가족 문전박대”라며 “당국은 구명조끼 전수조사를 하면서 동생의 ‘월북 증거’를 만들려고 한 거 같다”고 말했다. [지호영 기자]

    숨진 공무원 이모 씨의 형 이래진 씨는 “사건 처리 과정에서 정부 당국이 보여준 모습은 피해자 중심주의는 커녕 유가족 문전박대”라며 “당국은 구명조끼 전수조사를 하면서 동생의 ‘월북 증거’를 만들려고 한 거 같다”고 말했다. [지호영 기자]

    9월 21일 오전 11시 30분쯤 소연평도 인근에서 실종된 동생 이씨는 다음 날인 22일 오후 3시 30분쯤 북한 등산곶 앞에서 발견됐다. 28시간 동안 고무 튜브에 의존해 38km를 이동,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북한은 10월 7일 보낸 전통문에서 “단속 명령에 계속 불응해 더 접근하면서 2발의 공탄(공포탄)을 쏘자 도주할 듯한 상황이 조성돼 10여 발의 총탄으로 사격했으며, 이때 거리는 40~50m였다”라고 했다. 반면 국방부는 당초 “북한군이 이씨가 탄 부유물(고무 튜브)을 밧줄에 3시간가량 매달아 끌고 다니다 놓치자 2시간가량 수색 작업을 벌여 찾아낸 뒤 사살하고 시신을 불태웠다”고 했다. 

    - 동생 사망 경위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나는 바다를 잘 안다. 만약 북한군에 의해 2시간여 끌려 다닌 게 사실이라면 차가운 바닷속에서 심정지 또는 익사했을 거다. 동생이 죽은 사실이 알려지는 게 두려워 북한이 시체를 훼손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 구명조끼 착용을 월북 근거로 제시하는데. 

    “내가 9월 22일 서해 어업지도선(무궁화 10호)을 타고 사고 현장을 찾았을 때에도 군은 배 안의 구명조끼 전수조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선장은 군이 두 번째 조사할 때까지는 조끼가 그대로 있었는데 세 번째 조사에서는 ‘하나가 분실됐다’고 하더라. 분실된 조끼는 동생이 착용한 것으로 추정하고…. 그런데 현장 방문 이후 (어업지도선) 선장이 세 차례나 전화해 ‘군에서 구명조끼 전수조사 사실을 군사보안이니 외부에 발설하지 말라’고 했다. 왜 구명조끼를 전수조사한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했을까. 세 번째 조사에서야 ‘한 개가 분실됐다’는 결론을 내리고, 분실된 조끼를 동생이 착용했다고 단정하는 이유는 뭘까. 백번 양보해서 구명조끼를 착용했다고 해서 월북으로 추정해야할까. 결론은 ‘월북 증거’를 만들려고 한 거 아닐까.” 

    이래진 씨는 필자와 인터뷰하면서 ‘구명조끼 조사 함구령’에 대해 처음 밝혔다. 그러면서 구조에 집중해야 할 군경이 동생 이씨가 살아 있는 시간에 구명조끼 전수조사를 하면서 ‘월북 증거’를 만들었다고 봤다. 피해자 유족이 타고 있는 배에서 말이다. 필자는 해수부 서해어업관리단 상황실을 통해 여러 차례 선장과 접촉을 시도했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선장은 필자와 통화하기를 피했다. 


    ‘월북 아니다’는 증언에 귀 닫은 軍警

    인천해양경찰이 9월 26일 인천시 옹진군 소연평도 인근 해상에서 북한군에 의해 피살된 해양수산부 공무원 이모 씨의 시신과 소지품을 찾는 수색 작업을 하고 있다(위). 피살 공무원의 아들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 [인천해양경찰서 제공]

    인천해양경찰이 9월 26일 인천시 옹진군 소연평도 인근 해상에서 북한군에 의해 피살된 해양수산부 공무원 이모 씨의 시신과 소지품을 찾는 수색 작업을 하고 있다(위). 피살 공무원의 아들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 [인천해양경찰서 제공]

    군이 세 차례나 구명조끼 전수조사를 한 것은 월북 ‘의도’를 판단하는 중요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구명조끼를 조사하는 게 군사기밀이라는 것도 어불성설이지만, 1·2차 전수조사에서 그대로 있던 구명조끼가 3차 조사에서는 하나가 사라졌다는 것도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군 당국이 선장에게 전화를 하고, 선장이 세 차례나 구명조끼 조사 사실을 발설하지 말라며 입단속을 한 것도 그렇다. 처음부터 ‘월북 증거’를 만들려고 한 것처럼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결국 9월 29일 해경은 피격된 이씨가 구명조끼를 착용했다고 확신하고, 구명조끼를 입은 이씨가 부유물에 의존해 북쪽으로 헤엄쳤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런데 월북이 아니라는 증언도 잇따른다. 사망한 이씨가 탄 배에 동승한 공무원 누구도 이씨가 구명조끼를 착용한 모습을 보지 못했다고 증언했고, 사고 해역 인근 연평도 어촌계장 신중근 씨는 “(이씨가 실종된) 9월 21일에는 바람이 많이 불고 날씨가 추웠다. 실족했다고 하더라도 소연평도나 연평도로 올 수 있지 않았겠느냐고 하지만 이 시간대는 조류가 바뀌는 시간”이라며 “유속도 빨라 (월북을 하려고) 사람 손으로 인위적으로 갈 수가 없다”고 강조했다. 구명조끼를 착용했더라도 차가운 가을 바다에서 30여 시간 있었다면 심정지가 발생했을 거라는 이래진 씨의 추측이 자진월북보다는 좀 더 합리적으로 들린다. 

    일반인이 생각할 때 월북(越北)이나 월경(越境)은 큰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그 차이는 확연하다. 월북은 형법상 대전제인 ‘범죄 의도’가 들어 있다. 국가보안법 제6조(잠입·탈출)에 따르면 “①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점을 알면서 반국가단체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으로부터 잠입하거나 그 지역으로 탈출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한다. 월북으로 규정되면 피해자는 범죄자가 되는 것이다. 보안법상 반국가단체는 북한 당국을 의미한다. 반면 월경은 실수로 경계선을 넘은 것이고 범죄와는 관계없다. 따라서 월북이 확인되지 않은 현재의 상황에서는 월경이라는 표현이 적확하다. 

    사망한 이씨의 고교생 아들은 10월 8일과 19일 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자신은 육군사관학교 진학을 희망하고 있다는 뜻도 밝혔다. 사망한 이씨가 월북자로 규정되면 아들의 사관학교 입학은 제한될 수 있다. 연금 지급 문제도 있지만 유가족은 ‘반국가범죄 가족’이라는 불명예를 평생 감내해야 한다. 그런데도 군경은 예단과 추정 결과를 발표하고, 피해자 가족에게는 구명조끼 전수조사 과정을 숨기려고 했다. 이 정도면 피해자 중심주의가 아니라 ‘가해자 중심주의’ 일처리의 표본이 아닐까. 해경도 중간수사 결과가 궁색해선지 10월 22일 다시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하며 이번에는 사망한 이씨가 인터넷 도박에 빠져 수백 회 도박 자금을 송금했고, 도박 빚 때문에 월북한 걸로 추정했다. 또다시 예단에 기초한 해경의 추가 수사 결과 발표는 피해자 유가족들에게 분노를 일으켰다. 

    우리 군경이 실종부터 월경에 이르기까지 30여 시간 동안 표류하던 공무원을 적극적으로 찾아 구조하지 못한 데는 입이 열 개라도 할말이 없다. 표류 중인 피해자가 북한에 발각돼 심문받고 있던 시간이 피해자 생명을 안전하게 확보할 수 있는 골든타임이었다. 그러나 청와대는 피격된 9월 22일 오후 9시 40분 이후 다음 날 오전 8시 30분 서면 보고할 때까지 대통령에게 사망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피해자 중심주의가 아닌 ‘대통령 심기 경호 중심주의’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더구나 피격 다음 날인 9월 23일 오전 1시∼2시 30분에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 긴급장관회의가 열렸다. NSC 회의는 대통령이 소집할 수 있고, NSC 상임위원회는 청와대 안보실장이 소집할 수 있다. 심야 청와대에서 안보 관련 장관회의가 열리는데 대통령이 우리 국민 피격 사실을 몰랐다는 것도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필자의 경험으로는 대통령에게 알리지 않고 청와대 안보 관련 장관들을 불러들여 회의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외교부 장관은 이날 회의 연락도 받지 못했다고 국회에서 증언했다.

    오토 웜비어 사례가 웅변하는 피해자 중심주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17년 6월 20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북한에 억류됐다 미국으로 돌아온 지 며칠 만에 사망한 오토 웜비어와 관련된 발언을 하고 있다. [AP=뉴시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17년 6월 20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북한에 억류됐다 미국으로 돌아온 지 며칠 만에 사망한 오토 웜비어와 관련된 발언을 하고 있다. [AP=뉴시스]

    정부와 군경 당국이 피해자 중심주의를 외면하던 사이 유가족에게 손을 내민 이는 미국의 오토 웜비어 부모인 프레드·신디 웜비어 부부였다. 이들은 이래진 씨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는 똑같이 북한 정권의 반(反)인도 범죄에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다”며 “이 비극적인 슬픔 속에서 두 분을 향한 무한한 연대의 정을 느낀다”고 했다. 이씨는 “힘겹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웜비어 부모님께서 보내주신 편지에 다시 힘을 내본다”고 말했다. 

    미국 대학생 오토 웜비어의 죽음에 대한 트럼프 정부의 태도는 피해자 중심주의가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웜비어는 버지니아대에 재학 중이던 2015년 말 여행자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했는데, 2016년 1월 2일 평양의 양각도국제호텔에 설치된 정치선전물을 훔치려고 한 혐의로 체포됐다. 북한은 오토 웜비어에게 노동교화형(징역형) 15년을 선고했지만 트럼프 정부는 외교적 노력을 통해 2017년 6월 13일 그를 석방시켰다. 안타깝게도 미국 송환 당시 웜비어는 혼수상태였고 진단 결과 뇌조직에 광범위한 손상을 입은 것으로 드러나 결국 6월 19일 사망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웜비어가 사망하자 공식 성명을 통해 “법 규범과 기본적인 인간의 품위를 존중하지 않는 정권들이 저지르는 비극이 무고한 사람들에게 닥치지 않도록 막겠다는 미국 정부의 결의를 더욱 굳게 만든다”고 했다. 웜비어 가족은 북한의 만행에 대해 사법 절차를 진행해 5억113만 달러(약 5643억 원) 배상을 받으라는 승소 판결을 받아 북한을 압박했고, 미국 의회는 북한을 겨냥한 미국의 새 대북제재법인 ‘웜비어법’을 제정했다. 4월 18일 발효된 이 법은 불법 대북 거래를 돕는 중국의 대형 은행과 같은 해외 금융기관의 미국 금융 시스템 접근을 막는 금융 제재가 핵심 내용이다. 미국 행정부도 북한을 새롭게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했다. 웜비어 가족과 미국 정부와 의회가 북한의 만행을 다루는 방법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철저하게 피해자 중심주의였다. 그러면서도 미국은 북한과 대화의 창구를 열어놓고 핵 문제 등 현안을 논의할 준비를 했다. 그 과정에서 미국 조야(朝野)의 어떤 정치인도 웜비어가 정치선전물을 절도했다는 북한 주장을 근거로 그를 비난하지 않았다. 제대로 된 피해자 중심주의는 이런 것이 아닐까.

    “국가의 의무는 무엇인가”

    30여 시간 표류하던 피해자는 지친 몸으로 눈앞에 다가오고 있는 경비정을 보고 ‘살았다’는 안도감이 들었을 것이다. 평소 업무를 고려할 때 피해자는 그 배가 북한 경비정임을 쉽게 알았을 것이다. 그들이 던지는 질문에 답하면서 ‘잠시 억류되겠구나’하는 생각을 하던 순간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만행이 벌어졌다. 이후 진행된 사건 조사 과정을 감안하면 대한민국의 피해자 중심주의도 이날 함께 총을 맞았다. 

    만행에는 가해자, 피해자가 있다. 이번 사건의 가해자는 북한 위정자와 북한군이고, 피해자는 피격된 공무원과 그 가족,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이다. 누가 심판받아야 하고, 누가 위로받아야 하는가. 국민은 갈팡질팡하는 정부를 보면서 마음속에 깊은 상처가 생겼고, 그 상처는 통일 과정에서도 큰 상처가 될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영혼’을 설명하기 위해 레온티오스라는 아테네인 일화를 인용한다. 레온티오스가 길을 가다가 사형 집행장 옆 시체들이 누워 있는 곳을 지나가게 된다. 그는 한편으로 시체를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또 한편으로는 외면하려는 마음이 든다. 북한군의 만행에 희생당한 국민을 대하는 정부의 태도에도 국가의 영혼이 담겨 있다. 소크라테스가 “공무원의 죽음에 대한 국가 의무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분노한 이래진 씨에게 물어보라”고 답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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