쏜살같이 흘러간 한 해의 끄트머리에서 마음이 텅 빈 듯 느껴질 때 먹기 좋은 달콤한 도넛들. [GettyImages]
춥다. 겨울이니 추운 게 당연하지만 주고받는 안부에 섞여 있는 한숨과 걱정을 들으니 괜히 더 춥다. 일 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고, 여기저기서 휑하고 멍하다는 말이 줄줄이 들려온다. 요즘 다시 방영하는 드라마 ‘전원일기’에서 ‘일용엄니(김수미 분)’는 손녀가 사온 ‘도나스(도넛)’를 먹으며 ‘야야, 구멍이 뻥 뚫려 속이 텅 빈 게 꼭 내 팔자 같다’며 푸념한다. 그러고는 ‘그래도 참, 달고 맛나다’라며 한입 두입 먹는다.
설탕을 듬뿍 뿌린 튀김 빵 도넛은 먹는 이에게 폭신하고 달콤한 위로를 준다. [빵에 관한 위대한 책]
가운데가 뻥 뚫린 튀김 빵 도넛은 사람 마음에 곧잘 비유된다. 가운데 난 구멍 덕에 속이 없는 것 같지만, 죄다 폭신폭신하고 달콤하니 더없이 꽉 찬 것 같기도 하다. 빛과 그림자처럼 상반된 이야기를 가져다 붙이기 좋은 빵이다.
이 재미난 빵이 2020년 현재 꽤 호황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화려하고 독특한 외모를 뽐내기 바쁘다. 매력적인 도넛을 찾아 사람들은 멀리멀리 떠나기도 한다.
폭신하고 바삭한 도넛의 세계
두툼한 도넛 위에 초콜릿 과자가 잔뜩 붙어 있는 랜디스도넛의 ‘오레오 오즈 도넛’. [랜디스도넛 공식 인스타그램]
50년 넘는 역사를 지닌 미국 도넛 브랜드 ‘랜디스도넛’은 지난해 8월 제주도에 문을 열자마자 핫 플레이스로 떠올랐다. 올해 서울 연남동에 생긴 2호점 역시 줄 서는 맛집이다. 두툼한 도넛 위에 초콜릿 과자가 가득 붙어 있는 ‘오레오 오즈’는 폭신하고 바삭바삭한 맛이 일품이다. 연두색 초콜릿이 가득한 ‘민트 초콜릿’은 화사하고 달고 향기롭다. 색동 초콜릿 옷을 입은 ‘앰앤엠’, 마시멜로우를 쌓아 놓은 ‘스모어’의 거침없는 단맛에서는 미국 본토 도넛 풍미가 진하게 묻어난다.
올드페리도넛 속에는 각종 크림이 터질 듯 가득 들어 있다. [올드페리도넛 공식 인스타그램]
올드페리도넛에 솔티밥 라벤더 아이스크림을 한 스쿱 넣어 만든 도넛 샌드. [올드페리도넛 공식 인스타그램]
미국 스타일 ‘육덕진’ 도넛이 먹고 싶다면 한남동 ‘올드페리도넛’도 좋다. 커다란 도넛마다 과일이나 초콜릿 등으로 만든 크림이 터질 듯 가득 들어 있다. 올드페리도넛 1층에는 ‘솔티밥’이라는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다. 여기서는 먹고 싶은 아이스크림 한 스쿱을 도넛에 끼워 주는 ‘도넛샌드’가 맛있다. 개인적으로 향긋한 피스타치오나 라벤더를 추천한다.
‘donut worry, be happy’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 핑크색 아이도넛케어 포장 상자. [아이도넛케어 공식 인스타그램)]
이태원 ‘아이도넛케어’는 도넛 반죽의 가벼움이 남다르다. 도넛 반죽에 유난히 공기층이 많아 두툼해도 말랑하고 푹신한데 그 속에 맛좋은 크림을 채워 넣었다. 초록향이 나는 쑥크림, 까무잡잡 고소한 흑임자크림 등 독특한 메뉴가 여럿 있다. 아이도넛케어의 핑크색 도넛 박스에는 ‘donut worry, be happy’라는 재치 있는 문구가 적혀 있어 선물하기 좋다.
‘스마일’ 스티커가 보는 이를 웃음 짓게 만드는 ‘카페 노티드’의 도넛들. [카페 노티드 공식 인스타그램]
웃는 얼굴 ‘스마일’ 스티커로 첫인사를 보내는 ‘카페 노티드’의 ‘우유 생크림 도넛’과 ‘누텔라 도넛’ 역시 소담하게 담아 누군가에게 슬며시 건네기 좋다.
형이상학적 고찰 안 해도 그냥 맛있는 도넛들
구름처럼 상큼한 크림을 얹은 플러피도넛의 ‘레몬 머랭’. [플러피도넛 공식 인스타그램]
서울 연남동 ‘플러피도넛’은 맛 종류가 9가지뿐인데 고르기 힘들 정도로 개성이 제각각이다. 대표 메뉴는 진분홍 글레이즈를 매끈하게 입힌 ‘라즈베리’. 묵직하며 조밀한 도넛과 부서지며 녹아내리는 달고 향긋한 핑크 초콜릿 글레이즈를 우적우적 함께 씹는 맛이 참 좋다. 메이플시럽 글레이즈에 짭짤한 베이컨을 구워 올린 ‘메이플 베이컨’은 ‘단짠’에 쫄깃함, 바삭함까지 뒤섞여 있어 빙긋빙긋 웃음이 나오는 맛이다. 묵직한 단맛 대신 구름처럼 상큼한 크림을 얹은 도넛 ‘레몬 머랭’도 있다.
화려한 색과 모양을 뽐내는 도넛 사진은 요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이용자 사이에서 큰 인기다. [GettyImages]
화려함과 재미에 조금 시큰둥해지는 날이면 ‘크리스피 크림’의 오리지널이나, ‘도너츠’라는 이름을 버렸지만 여전히 도넛 가게인 ‘던킨’의 ‘스트로베리필드’ ‘페이머스 글레이즈드’ 같이 비교적 담백한 맛으로 잠깐 쉬어보면 좋겠다.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양을 쫓는 모험’이라는 책에 이렇게 썼다. “도넛의 구멍을 공백으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존재로 받아들이느냐는 어디까지나 형이상학적 문제고, 그 때문에 도넛 맛이 조금이라도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2020년은 분명 존재했지만 도넛 구멍처럼 공허함을 남기고 떠나려고 한다. 그렇지만 반죽처럼 조밀한 우리의 발자취는 도넛 맛처럼 분명 달콤한 기억도 남기리라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