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선제 이후 운동권은 세 그룹으로 분화
1그룹, 이부영·장기표·김근태·이재오의 전민련
2그룹, 백태웅·김영환·구해우의 사노맹·민혁당·자민통
3그룹, 변호사·교수 경력으로 시민단체 활동
1·2그룹 야전 뛴 세력, 3그룹 관망한 세력
사회경제적 지위 확보한 뒤 운동 뛰어든 3그룹
文정권 참여 엘리트집단 다수가 3그룹 출신
문재인 대통령이 2019년 9월 9일 청와대 본관에서 조국 신임 법무부 장관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갈등은 더 큰 권력투쟁 국면으로까지 비화하는 모양새다. ‘윤석열 검찰’이 문재인 정권의 약한 고리를 건드리고 있거나, 혹은 앞으로 그럴 개연성이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문재인 정권의 약한 고리가 무엇일까.
문재인 정권의 기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87년 대통령 직선제 직후의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직선제 시행 이전 운동권의 거의 대부분은 거리에 있었다. 그들의 관심은 ‘군부를 어떻게 끌어내리느냐’였다. 직선제 이후 운동권들은 다양한 갈래로 쪼개지기 시작한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 이후의 이야기
1989년 2월 21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에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이 결성대회를 갖고 정식 출범했다. 오른쪽부터 김근태, 이부영, 장기표 씨. [동아DB]
전민련은 당시 운동권의 핵심 인사 대부분을 포괄했다. 의장 이부영, 사무처장 장기표, 정책 김근태, 조국통일 이재오 등 당시로 보면 최강의 라인업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전민련에 각별한 애정을 보인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전민련은 오래가지 못하고 균열되기 시작한다. 거리에서 무언가를 하자는 주장이 시대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1990년대, 민주화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확산했다. 전민련에 속한 이들은 각기 지향과 노선에 따라 민주당, 민중당, 신한국당(한나라당) 등으로 갈라진다.
두 번째 그룹은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이나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등이다. 사노맹 총책 백태웅은 서울대 법대 81학번, 민혁당의 김영환은 서울대 법대 82학번, 자주민주통일(자민통) 그룹 구해우는 고려대 법대 85학번이다. 이들은 1985~1987년 불타오른 민주화운동을 현장에서 실질적으로 주도한 뒤 직선제 이후 민주화의 아젠다를 넘어서고자 전진한 집단이다.
세 번째 그룹은 직선제 이후 존재감을 드러냈다. 변호사·교수 등의 직업을 운동의 1차 근거지로 확보한 후 시민단체 활동 등을 통해 점진적으로 운동에 개입하거나 아니면 직업 정치인이 된 경우다. 문재인 정권에 참여한 엘리트 집단 다수가 이에 해당한다. 이 그룹은 운동 경력에서 앞선 두 그룹과 비교되지 않는다. 첫 번째, 두 번째 그룹은 실제 야전에서 무언가를 한 사람들이고 세 번째 그룹은 그런 기회가 주어졌을 때 관망한 사람들이다.
이 차이가 세 번째 그룹의 사상이나 생활 기풍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민주화운동의 어떤 시기에 운동가들은 일상적으로 연행되고 구속됐다. 운동권은 이와 같은 위험을 무릅쓰고 혁명이나 항쟁을 꿈꿨던 사람들이다. 따라서 부동산이나 자녀 입시 등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자연히 투기나 입시 부정 같은 의혹에 연루되지 않았다. 사람을 평가할 때도 상대방의 노선과 사상을 중심으로 평가하지 재산 규모를 갖고 평가하지 않았다. 나만 해도 그렇게 살았다.
반면 세 번째 그룹은 일단 사회경제적 지위를 확보한 후 운동을 했던 사람들이다. 그 탓에 이들 대부분의 몸과 머리가 따로 논다.
2009년 이후 기회주의자들의 득세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튿날인 2009년 5월 24일 당시 민주당 영등포당사 건물 전면에 노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다. [동아DB]
사람들은 운동권을 NL(민족해방)과 PD(민중민주) 등으로 구분하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2005~2006년 무렵, 나는 운동권에서 참으로 희한한 광경을 목도했다. 세 번째 그룹의 인사들은 목소리 높여 무언가를 주장하곤 했다. 그런 주장 모두 그냥 하는 소리에 불과했다. 그들이 구사하는 말이 아니라 그들의 경제적 처지, 아파트 평수, 재산 규모로 평가해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문재인 정권의 곳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의 DNA는 정치 노선이 아니라 돈이다. 그들이 여전히 개혁에 관심 있다고 스스로 착각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진짜 개혁운동을 통해 구속, 연행, 경제적 궁핍, 사회적 고립 등에 처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운동가다운 삶을 살아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그들이 핵심부에 진입하는 데는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가 결정적 요소로 작용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이듬해 치러진 지방선거,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2012년 총선과 대선 등에서 이른바 민주진보진영이 약진했다. 2012년 대선에서는 석패했지만, 차기 대선에서는 해볼만하다는 인식이 진영 내에 확산됐다.
이 과정을 거치며 훗날 두 번째 대선을 치르는 ‘문재인 캠프’의 골간이 형성됐다. 차기 대선 승리 가능성이 커지자 기회주의자들이 득세했다. 시민단체에 느슨하게 결합돼 있던 교수와 변호사 그룹도 본격적으로 문 캠프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당시 정세를 역사적이고 구조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기업의 동향이다.
1992년 대선 때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출마하는 등 1990년대 초반 대기업은 한국사회의 실질적 리더 중 하나였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등이 연이어 사법처리 됐다. 여론 역시 한국의 양대 기업에 우호적이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대기업은 시장에서 약진했다. 반면 우호적이지 않은 여론 탓에 대기업이 정치사회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영향력은 제한적이었다. 그 틈을 타 문재인 캠프의 인사들이 세력을 확장했다.
이건희 前 삼성전자 회장의 장례식
이 간극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박원순 전 서울시장과 이건희 전 삼성전자 회장의 장례식이다. 두 사람 모두 공과(功過)가 있다. 서울시는 박 전 시장 장례를 서울특별시장(葬)으로 5일간 치르면서 서울도서관과 서울광장 사이에 분향소를 운영했다. 이 전 회장의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물론 가족장이야 유족의 선택이지만, 한국사회 여론지형의 무게추가 기업보다는 정치권과 시민사회 쪽으로 얼마나 치우쳐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극적이었던 것은 더불어민주당의 태도다. 10월 25일 이낙연 민주당 대표는 “재벌 중심의 경제구조를 강화하고 노조를 불인정하는 등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고 밝혔다. 허영 민주당 원내대변인은 이날 “이 회장은 삼성의 글로벌 도약을 이끌며 한국경제 성장의 주춧돌을 놓은 주역이었다”면서도 “경영권 세습을 위한 일감 몰아주기와 부당 내부거래, 정경유착과 무노조 경영 등 그가 남긴 부정적 유산은 우리 사회가 청산해야 할 시대적 과제”라고 강조했다.
이건희와 박원순 모두 공과가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진보와 보수를 떠나 역사에서 가진 무게감이 엄연히 다른 인물이다. 이건희의 공과는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공과와 비슷한 무게로 재야한다. 박원순의 공과를 그 정도 수준의 무게로 논할 일은 아니다.
참고삼아 김범수 카카오 의장이 이 회장 빈소에서 45분 간 조문한 후 꺼낸 발언을 소개한다.
“제 직장은 삼성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삼성에서 배운 모든 것들이 고스란히 한게임이나 네이버나 카카오로 이어져 왔다. 삼성에서 신경영, 한창 변화할 때, 프랑크푸르트 선언(1993년)할 때 있었던 사람으로서 회장님의 경영(방식)이 (제게도) 배어있다고 생각한다. 이해진 네이버 글로벌투자책임자(GIO)도 삼성의 입사동기였고, 이후 ‘삼성 키즈’들이 한국의 새로운 사업을 이뤄내고 그 뒤로 또 네이버·카카오 출신들이 사업을 일궈내는 게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김 의장의 말처럼 네이버, 카카오가 ‘삼성 키즈’가 창업한 회사라면 이 회장은 적어도 30년 간 한국경제의 주역이었던 셈이다. 이낙연 대표와 허영 대변인의 발언은 민주당과 그 지지자들의 정서를 잘 보여준다. 그들은 1990년대와 2000년대에 걸쳐 한국경제의 경이로운 발전을 이룬 주역들과 아무런 정서적‧인적 교감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2010년대 한국정치를 장악했다.
내로남불 ‘부패 DNA’
수많은 이야기가 있다. 특목고, 해외유학, 부동산 축재, 뇌물, 성추행, 문서위조….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권력은 사람의 뇌를 바꾼다’에서 이렇게 썼다. “문재인 정권의 내로남불 사례를 일일이 정리하다가 중도에 그만두고 말았다. (…) 굳이 지적할 것도 없이 거의 모든 게 ‘내로남불’이었기 때문이다.”나도 그랬다. 이 글을 쓰면서 정리해보려 했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무언가를 조사한다는 것이 무망한 일이다. 그냥 전부 그렇다. 내로남불, 부정비리는 조사할 필요 없이 문 정권을 규정하는 키워드다. 그들이 좋아하는 말을 사용하자면 그들 전체의 DNA다.
4‧15 총선에서 민주당이 압승을 거뒀다. 기업에 이어 야당도 정치적으로 무력화 또는 약화됐다. 이제 민주당을 가로막을 세력은 없다. 여기에 ‘문파’(문재인 대통령 열성지지자)가 철벽처럼 문 정권을 지켰다. 코로나19 국면에서도 천운이 따랐다. 이 정도면 이해찬 전 대표의 주장처럼 20년은 아니더라도 10년 정도는 무난히 집권할지 모른다. 야당이 뭔가를 한 것도 아니다. 보수언론의 저항은 찻잔 속 미풍에 불과했다. 많은 사람들은 총선에서 야당을 지지할 마음이 아예 없었다.
그럼에도 한쪽에서는 조국 사태와 윤미향 및 정의연 논란, 박원순 사건이 발발했다. 누가 공격한 것도 아닌데 그들은 알아서 자멸했다. 현재 문재인 정권 핵심부 인사들이 2010년 이후 권력을 쥐기 위해 정치에 뛰어들기 시작했을 때부터 내장된 ‘부패 DNA’가 이와 같은 사건들을 통해 스스로 말하고 있는 셈이다.
그 후 또 많은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다. 이 국면의 주된 플레이어는 조국 전 장관, 추미애 장관, 윤석열 총장, 이성윤 서울중앙지검장, 한동훈 검사장 등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조국 사태였다. 첫 단추가 모든 걸 결정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성역 없이 수사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 편은 예외인가? 원칙을 부정하기 위해 문재인 정권은 참으로 많은 길을 돌아 왔다. 이제 결판 낼 때가 됐다.
● 1965년 출생
● 서울대 국사학과 졸업
● 서울대 인문대 학생회장
● 조국통일범민족연합 사무처장·진보연대 정책위원회 부위원장
● 저서 : ‘수학 공부의 재구성’ ‘새로운 보수의 아이콘’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