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호

[명작의 비밀㉑] 백자 위 한국의 추상화 철화백자

  • 이광표 서원대 교양대학 교수 kpleedonga@hanmail.net

    입력2020-12-08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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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一筆揮之로 그려내야 하는 철화무늬

    • 특별한 구도에 단순하게 그린 도자기 위 추상

    • 철화무늬백자 최고 명품 백자철화포도무늬항아리

    • 물욕의 파도 타다 이화여대 박물관 안착

    병 외부를 타고 내려오는 곡선 무늬가 매력적인 백자철화끈무늬병. [국립중앙박물관]

    병 외부를 타고 내려오는 곡선 무늬가 매력적인 백자철화끈무늬병.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제1060호 백자철화끈무늬병(15세기). 이 백자는 단순하다. 목을 휘감은 뒤 S자로 몸통을 타고 내려간 흑갈색 끈 무늬 하나뿐 아무런 장식이 없다. 끈처럼 생긴 그 선(線)도 반듯한 것이 아니라 삐뚤삐뚤하다. 무얼 표현하려 한 것인지, 그냥 별생각 없이 그려 넣은 건 아닌지. 조선시대 철화 도자기에는 이와 비슷한 분위기의 무늬가 꽤 있다. 저것이 새인지 구름인지, 풀인지 꽃인지, 그냥 지나간 붓 자국인지, 잘 그린 무늬인지, 알 듯 모를 듯하다. 그런데 자꾸만 보고 싶어진다. 묘한 끌림이 있다.

    기증 통해 세상에 나온 백자철화끈무늬병

    백자철화끈무늬병은 국립중앙박물관 도자실에 있다. 기다란 끈 한 가닥이 몸통을 타고 아래로 비스듬하게 흘러내린 모습. 저 단순하고 삐뚤삐뚤한 흑갈색 선. 그런데 이 무늬를 차분하게 보고 또 보면, 놀랍게도 마치 병에 묶어놓은 실제 끈 같아 보인다. 백자 병에 술을 넣어 마시다 술이 남으면 허리춤에 차고 가라는 의미에서 끈을 그려 넣은 것이 아닐까. 생각이 이즈음에 미치자 옛 도공의 재치와 해학이 기발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실제로 허리에 꿰찰 수는 없겠지만, 참 기분이 좋다. 상쾌하고 자유분방하다. 특별한 꾸밈없이 쓱 그려 내려간 선 하나에 15세기 이름 없는 도공의 익살과 여유, 허를 찌르는 상상력이 살아 숨 쉰다. 

    저렇게 선 하나만으로 도자기 표면을 꾸밀 수 있다니, 참으로 대담하고 과감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한두 개 더 선을 긋고 싶지 않았을까. 선을 좀 더 반듯하게, 굵기도 더 일정하게 처리하고 싶지 않았을까. 그 유혹을 참아낸 절제의 미학이 돋보인다. 그 덕분에 이 백자는 꽤나 현대적 분위기를 뽐낸다. 

    조선시대 도자기 마니아들, 고미술 마니아들 사이에서 이 작품은 비교적 유명한 편이다. 그러나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이렇게 유명해지고 친숙해진 것은 1995년 한 기업인 컬렉터의 기증 덕분이었다. 그때까지는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전문가들 사이에서만 알려졌다. 

    이 백자의 원래 소장자는 서재식 한국플라스틱 회장이다. 당시 한국플라스틱은 골드륨이라고 하는 바닥장판으로 히트를 쳤고 서 회장은 광고에 직접 출연해 인기를 끌었다. 우리나라에서 최고경영자(CEO)가 해당 기업의 광고에 직접 출연한 첫 사례라고 한다. 그런 기업인이 1995년 국립중앙박물관에 이 백자를 기증했으니 언론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보도가 이어지면서 ‘골드륨 회장=백자 수집가’라면서 화제가 됐고, 사람들은 그의 조건 없는 기증에 감동을 받았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백자철화끈무늬병은 어느덧 스타가 됐다. 이제 사람들은 이를 두고 “가장 한국적인 디자인”이라고 찬사를 보내기도 한다.




    대담하게 한 번에 그려내는 철화무늬

    간결한 붓놀림으로 풀을 그려낸 분청사기철화풀무늬대접. [국립중앙박물관]

    간결한 붓놀림으로 풀을 그려낸 분청사기철화풀무늬대접. [국립중앙박물관]

    이 백자의 끈 무늬는 철화(鐵畵) 기법으로 처리한 것이다. 철화무늬는 철분이 함유된 철사(鐵砂) 안료로 자기 표면에 그림을 그려 장식한 것을 말한다. 철화무늬는 청자, 백자, 분청사기에 골고루 나타난다. 고려청자엔 주로 넝쿨무늬, 풀무늬, 모란무늬, 국화무늬 등이 등장한다. 조선시대 분청사기의 경우 물고기무늬, 초화무늬, 연화넝쿨무늬, 모란무늬, 버드나무무늬 등이 주류를 이룬다. 백자의 철화무늬로는 16~17세기 중반에 유행하던 매화무늬, 대나무무늬, 국화무늬, 초화무늬 등이 있다. 특히 철화백자 전성기이던 17세기엔 간결하고 추상적인 초화무늬와 해학적인 구름·용(雲龍)무늬가 두드러졌다. 17세기 후반부터 포도무늬도 적잖이 나타났다. 

    백자철화끈무늬병에서 본 것처럼, 도자기의 철화무늬는 시대를 막론하고 간결함과 추상성, 활달함과 대범함, 익살과 해학 등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왜 그럴까. 이러한 특성은 우선 철화무늬를 표현하는 시문(施文) 방식에서 기인한다. 붓을 이용해 그림을 그려 넣는 철화 기법은 조각칼을 이용해 태토(胎土)의 표면을 음각 또는 양각으로 새기는 각(刻) 기법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난다. 각 기법은 미리 정해놓은 디자인에 따라 정교하고 조심스럽게 작업이 이뤄진다. 이와 달리 철화 기법은 재료의 특성상 숙련된 솜씨로 빠른 시간에 그려야 한다. 정밀하게 그리기보다는 대범하게 붓을 놀려야 한다. 이 같은 이유로 철화무늬는 필선의 강약과 운동감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 그 운동감이 대범함과 간략화, 추상화 등으로 나타난 것이다. 

    분청사기는 15세기 전후에 만들어졌다. 분청사기 하면 자연스러움과 자유분방함의 미학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그러한 자유분방함은 철화무늬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쓱쓱 몇 번의 붓질로 풀을 표현한 분청철화 대접, 물고기를 낚아채는 새를 천연덕스럽게 표현한 분청철화 장군 등. 일본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에 있는 분청철화연못·새·물고기무늬장군(15세기)을 보자. 연못의 풍경을 생동감 있고 재미있게 포착한 조선 도공의 시선이 예사롭지 않다. 특히 새와 물고기를 같은 크기로 표현한 것이 이채롭고 장난스럽다. 그 장난기는 대담함과 연결된다. 더 나아가 무언가 깊이와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이 분청사기 앞에서 사람들은 무언지 모르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백자 위에 펼쳐지는 한 폭의 추상화

    호텔프리마뮤지엄에 전시된 철화백자들. [호텔프리마뮤지엄 제공]

    호텔프리마뮤지엄에 전시된 철화백자들. [호텔프리마뮤지엄 제공]

    철화무늬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대담함과 추상성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분청사기철화풀무늬대접(15세기 후반~16세기 전반)을 보자. 쓱쓱 몇 개의 선으로 풀을 기막히게 표현해 냈다. 이 분청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아, 풀이란 것이 저렇게 생겼었나’ 하는 특이한 생각을 하게 된다. 풀을 낯설게 보여주는 철화무늬. 추상화가 따로 없다.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가면 프리마 호텔이 있다. 이 호텔은 미술품으로 유명하다. 이 호텔을 이끌어온 이상준 대표는 내로라하는 컬렉터 가운데 한 사람이다. 호텔 곳곳엔 현대미술품과 고미술품이 다채롭게 전시돼 있다. ‘호텔프리마뮤지엄’까지 꾸며놓았다. 이곳에 백자철화풀무늬병이 여럿 있다. 백자에 그려진 철화 풀무늬는 한결같이 단순하면서 추상적이다. 풀 한 포기를 이렇게 간략하면서도 세련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절제의 미학, 추상의 미학을 기막히게 구현한 조선 도공의 감각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곳에는 매화나무를 추상적으로 그려 넣은 철화백자도 있다. 붓 선을 몇 번 툭툭 꺾은 것 같은데 매화를 저렇게 간결하게 표현할 수 있다니. 그 덕분에 도자기 위 그림이 한 폭의 추상화로 보인다. 같은 곳에 전시된 백자철화새·구름무늬항아리도 마찬가지다. 

    추상성이 강한 철화무늬 도자기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결국에는 ‘묘하게도 군더더기를 버리고 핵심만 남겨놓은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그렇기에 더 많은 것을 돌아보게 한다. 철화무늬가 고미술 감상의 독특한 매력 하나를 제공해 주는 셈이다.

    철화의 비대칭 구도

    철화무늬에는 또 다른 특징이 있다. 무늬를 도자기 표면의 상부나 하부 등 한쪽에 치우치게 배치해 나머지 공간을 여백으로 남겨놓는 점이다. 그림으로 빗대 설명하자면 비대칭 공간 구성, 비대칭 구도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다른 기법의 도자기 무늬에서는 거의 발견할 수 없다. 철화무늬에서만 나타나는 독특한 특징이다. 

    비대칭 구도는 주로 항아리나 병의 구연부(口緣部·아가리) 아래 어깨 쪽에 바짝 올려 무늬를 배치하고 아래쪽 대부분의 공간을 비워두는 형식이 가장 많다. 

    서울 강남구 호림박물관에는 17세기 백자철화국화무늬항아리가 있다. 활짝 핀 국화 네 송이를 경쾌하게 표현한 철화백자다. 국화 송이의 특징을 핵심만 포착해 그것을 과감하게 단순화했다. 단순화했지만 국화의 분위기는 물씬 풍긴다. 서툴고 순진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노련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 국화 네 송이를 엮어 항아리 몸체의 윗부분에 배치하고 아래쪽은 살짝 여백으로 남겨놓았다. 

    몸체 아래쪽에 무늬를 집중 배치하고 위를 여백으로 남겨둔 경우도 있다. 일본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에 있는 16세기 분청사기철화풀무늬병이 그렇다. 별다른 장식 없이 간략하고 추상화한 풀무늬를 몸체 하부에 치우치게 배치했다. 그런데 풀무늬 자체도 인상적이다. 풀의 줄기 몇 개가 원을 그리며 서로 만나며 헤어지고 그러면서 율동감을 자아낸다. 그 율동감이 몸체 아래쪽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더욱 독특한 울림을 준다. 

    철화무늬를 아래쪽에 배치하고 위쪽을 남겨둔 경우는 우리의 시각 경험상 더욱 신선하고 더욱 파격적인 느낌을 준다. 무늬를 위에 배치하고 아래쪽을 비워놓는 것보다는 좀 더 낯설고 신선하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비대칭 파격의 효과는 더욱 극대화된다.

    철화백자 최고 명작 백자철화포도무늬항아리

    이화여대박물관이 소장한 백자철화포도무늬항아리. [이화여대박물관 제공]

    이화여대박물관이 소장한 백자철화포도무늬항아리. [이화여대박물관 제공]

    철화백자를 논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게 있다. 조선시대 철화백자 걸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국보 제107호 백자철화포도무늬항아리(18기 전반·이화여대 박물관). 육중하고 당당한 어깨에서 몸통으로 이어지는 곡선은 우아하면서도 날렵하고, 철화로 그려 넣은 두 가닥의 포도 줄기는 생생하면서도 그윽하다. 특히 표면의 포도 그림이 보는 이를 사로잡는다. 포도나무 잎의 적절한 농담(濃淡), 살아 있는 듯 섬세하게 이어진 줄기, 싱그럽게 윤기 나는 포도송이. 조선시대 전체를 통해 백자 항아리에 등장한 포도무늬 그림 가운데 회화성이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순수 회화 작품 못지않은 품격이다. 이 포도그림은 도공이 그리지 않았을 것이다. 도공의 그림치고는 너무 뛰어나기 때문이다. 18세기에 활약하던 당대의 뛰어난 전문 화원(畵員)이 심혈을 기울여 그렸을 것이란 견해가 지배적이다. 

    포도 그림 자체도 대단하지만 백자항아리 표면의 화면 구성, 즉 여백 처리도 매력적이다. 맨 위 구연부 바로 아래에서 몸체의 상반부까지만 포도나무를 그려 넣고 하반부를 완전히 비워놓아 여백을 시원하게 살렸다. 항아리의 모양과 여백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탁월한 공간 구성이다. 

    이 항아리는 일제강점기까지는 거의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광복 직후였다. 일제강점기 이 항아리의 소장자는 당시 용산 철도국 철도기사(공무과장)이던 일본인 시미즈 고지(淸水幸次)다. 한국 고미술에 조예가 깊었던 그는 수십여 점의 한국 고미술품을 소장했고 그 가운데 이 항아리를 특히 아꼈다고 한다. 1916년경부터 이 포도무늬 항아리를 소장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주변 사람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정도였다고 하니 말 그대로 그의 비장품(秘藏品)이던 셈이다. 

    1945년 광복으로 변수가 생겼다. 일본으로 한국 문화재를 반출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그는 고민 끝에 이것들을 믿을 만한 사람에게 맡겨놓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집안일을 도와주던 한국인 지인 A에게 이 백자와 수십여 점의 골동품을 보관해 달라고 부탁했다. 정성스레 포장한 백자를 A에게 건네면서 “다른 것은 몰라도 이 백자철화포도무늬항아리만큼은 잘 보관해 달라. 꼭 찾으러 오겠다”고 신신당부했다.

    거래마다 최고 몸값 경신한 백자界 스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A의 아들과 사위가 그 골동품들을 야금야금 팔아먹기 시작한 것이다. 1946년 상황이다. 돈맛을 본 아들과 사위는 급기야 이 백자철화포도무늬항아리까지 골동상 B에게 2만5000원을 받고 팔아 넘겼다. 명품을 손에 쥔 B는 이것을 되팔아 큰돈을 벌겠다는 꿈에 부풀었다. B는 당시 수도경찰청장이던 장택상을 머리에 떠올렸다. 장택상은 권력자이면서 내로라하는 고미술 컬렉터였다. B는 ‘안목도 있고 돈도 있는 장택상이라면 이 백자를 알아보고 후하게 사들일 것’이라고 믿었다. 장택상에게 줄을 댈 수 있는 골동상을 찾았다. B는 골동상 C를 통해 장택상의 의중을 떠보기로 했다. 

    그런데 이게 화근이었다. 권력자이던 장택상은 순순히 넘어갈 사람이 아니었다. 장택상은 이 백자가 장물이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장택상은 장물이라는 이유를 들어 B를 겁박해 소유권을 포기하도록 했다. 이어 A로부터는 강제로 양도를 받아냈다. 장택상이 그 대가로 A에게 내준 돈은 5만 원. 이 항아리가 정상적으로 거래됐다면 당시 돈으로 최하 수십만 원은 했을 것이다. 당시 크고 좋은 기와집이 대략 2만 원 정도에 거래됐다고 한다. 장택상은 그런 엄청난 백자를 권력의 힘을 이용해 매우 저렴하게 손에 넣은 것이다. 

    1946년 장택상의 품에 들어간 이 백자철화포도무늬항아리는 1960년경 다시 세상에 나왔다. 대통령선거에 출마하려던 장택상이 선거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이 백자를 처분하려 했다. 장택상 집에 자주 드나들던 골동상 여럿 가운데 장택상의 신임이 돈독한 D가 이 항아리의 거래를 주선하기로 했다. 

    D는 골동상 E, F를 찾아갔다. E는 당시 최고의 컬렉터이던 이병철 삼성 회장의 신임을 받던 골동상이다. D는 내심 이병철 회장에게 이 백자를 넘기고 싶었다. 그런데 E와 F는 모두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유자 장택상이 값을 너무 비싸게 불렀기 때문이다. 소유자는 1000만 환을 불렀다. 너무 비싸다 보니 E는 이병철 회장에게 말도 못 꺼냈다고 한다.

    대학생 1000명 등록금 가격에 이화여대로

    백자철화포도무늬항아리가 시장에 나왔다는 소문이 당시 이화여대 총장이던 김활란의 귀에 들어갔다. 김활란 총장은 6·25전쟁으로 황폐화된 이화여대 박물관을 어떻게 재건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김활란은 소식을 듣자마자 이 백자에 빠져들었고 대학 박물관의 부흥을 위해서라면 엄청난 거액을 기꺼이 지불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거래는 성사됐다. 거래가는 1500만 환. 엄청난 가격이었다. 당시 괜찮은 청자, 백자가 2만 환 정도였다고 한다. 이병철 회장이 수집하는 최고급 청자, 백자도 250만 환 안팎이었다고 하니, 이 철화백자 항아리의 가격이 어느 정도였는지 쉽게 짐작이 간다. 당시 대학 등록금이 1만5000환이었다고 한다. 

    이 백자철화포도무늬항아리는 자타가 공인하는 조선 백자의 최고 명품이다. 이화여대박물관의 간판 유물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화여대박물관에 가면 제일 먼저 이 백자 앞에 서야 한다. 항아리 자체의 형태도 아름답지만 농담과 필선이 살아 있는 철화 포도 그림과 여백 넘치는 공간 구성은 그야말로 압권이다. 
     
    이것이 철화백자다. 포도무늬뿐만 아니라 어눌한 듯 비뚤비뚤한 선도, 풀인지 꽃인지 알 듯 모를 듯한 무늬도 모두 저마다 매력을 보여준다. 그 핵심은 자유분방한 추상성이다. 번거로운 것을 다 덜어내고 핵심만 남겨 결국 추상의 경지로 다가간 과감함. 그래서 여운이 길게 남는다.


    이광표
    ● 1965년 충남 예산 출생
    ●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졸업
    ● 고려대 대학원 문화유산학협동과정 졸업(박사)
    ● 전 동아일보 논설위원
    ● 저서 : ‘그림에 나를 담다’ ‘손 안의 박물관’ ‘한국의 국보’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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