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분 간 이어지는 탁탁 추적추적 스삭스삭
베짜기 명인의 노동 현장
“‘전통문화는 재미없다’ 인식 깨는 시도”
생생한 소리와 감각적 영상이 가진 치유의 힘
등이 굽은 장인(匠人)이 긴 나무 베틀에 앉는다. 손과 발로 베틀을 앞뒤로 밀어 당기자 ‘탁탁’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하늘에서는 제법 굵은 비가 떨어져 뽕나무 잎을 적신다. 빗소리 위로 누에나방의 애벌레가 뽕잎을 갉아 먹는 소리가 덧씌워진다. ‘추적추적’ ‘스삭스삭’…. 언뜻 보면 ‘이게 뭔가’ 싶은데, 가만히 보면 섬세하고 자연스러운 소리에 몸과 마음이 녹아내린다.
다큐멘터리인가, 명상 영상인가. 글로 설명하기도 어려운 소리를 생생하게 잡아낸 25분 분량 영상 한 편이 대박을 쳤다. 영상의 정체는 문화재청 소속 한국문화재재단이 제작한 ‘국가무형문화재 제87호 명주 짜기’ ASMR(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뇌를 자극해 심리적인 안정을 주는 소리) 영상.
1월 23일 유튜브 ‘문화유산채널’에 올라온 이 영상은 11월 하순 232만 조회수를 돌파했다. 공공기관이 선보인 영상으로는 이례적인 인기다. 이로 인해 1월 4만5000명이던 문화유산채널 구독자는 11월 중순 현재 14만3000명으로 급증했다.
MZ세대 열광시킨 감각적인 매력
한국문화재재단 ‘국가무형문화재 제87호 명주 짜기’ ASMR 영상의 한 장면. [문화유산채널 유튜브 캡처]
문화유산 영상이 ‘지루하고 따분하다’는 편견을 깨고 ‘힙’하게 거듭난 요인은 뭘까. 우선 꼽을 것이 ASMR이다. 지금까지 한국문화재재단은 문화재의 역사와 그 안에 담긴 이야기 등을 보여준 다음, 그 이면의 의미를 강조하는 스타일의 영상을 만들었다. 무엇을 보여줄까에 집중했다. 이번에는 기획 단계부터 내용보다 형식에 초점을 맞췄다. 김한태 한국문화재재단 콘텐츠기획팀장은 “2010년 유튜브 ‘문화유산채널’을 개설한 뒤 다양한 영상을 선보였지만 일부 영상을 제외하곤 큰 반응을 얻지 못했다. ‘가치’ 있는 문화유산을 ‘재미’있는 문화유산으로 만드는 방법을 고민하며 여러 실험을 이어가던 중 ASMR을 주목하게 됐다. 한국인 누구나 본능적으로 문화유산의 숨결에 반응할 거라는 판단이 좋은 결과로 이어진 것 같다”고 했다.
그 결과 탄생한 콘텐츠가 ‘K-ASMR’ 시리즈다. 2018년 10월 ‘한국의 정원’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궁중병과, 한지, 한산모시, 소반, 명주, 가야금 등을 소재로 한 ASMR 영상 25개가 채널에 등록됐다. 명주짜기를 제외한 다른 영상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상황이다.
생생한 소리와 감각적 영상미가 시청자에게 치유 역할
한국문화재재단은 K-ASMR 시리즈 흥행 요인으로 ‘문화유산이 주는 위안’을 꼽는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여파로 우울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아진 상황. K-ASMR 시리즈에 담긴 자연의 소리와 감각적인 영상이 시청자에게 힐링 콘텐츠로 다가갔다는 게 재단의 해석이다. 제작진은 문화유산이 화면에 아름답게 담기도록 최적의 색감을 찾고, 생생한 소리를 잡아내는 데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K-ASMR 시리즈에 대한 대중의 긍정적인 반응 덕분에 한국문화재재단은 새로운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360도 가상현실(VR) 영상’이 한 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진 사람들은 이 영상을 통해 제주도 용천동굴을 거닐고, 천연기념물 제336호 독도천연보호구역을 바라보며, 한국인의 흥이 녹아든 농악 공연을 관람한다. 문화유산에 담긴 이야기를 추리 형식으로 풀어낸 ‘5분 추리 역사 X-파일’도 반응이 뜨겁다.
언택트(비대면) 시대, 문화유산을 기록하고 보존하는 단계를 넘어 공유하고 활용하려면 지금보다 더 많은 문화기획 전문 인력이 필요하다. 김한태 팀장은 “어떻게든 화제를 모으려 하기 보다는 문화유산에 담긴 스토리를 발굴해내 앞으로도 꾸준히 양질의 콘텐츠를 제작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